새벽 두 시 반, 나는 배추된장국을 끓이고 있었다. 내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이전의 삶의 방식과 사뭇 동떨어진 행동이기도 했다.
이전의 나였다면 눈을 뜨자마자 노트북을 열었을 터였다. 가장 작은 볼륨으로 가장 귀에 거슬리지 않는 클래식을 틀어놓고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했을 것이다. 이어 책을 펼쳤겠지. 쪼르륵 쪼르륵 드립커피를 내리고 그윽한 커피 향내에 미소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의 나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는 것을 알겠다.
책상과 일 미터 떨어져 있는 싱크대(그것은 부엌에 책상이 있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를 힐끗 보고 아침 국거리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오랜 가정주부(대체 이런 자각이 언제부터 나에게 있었단 말인가)의 경력으로 멸치를 넣고 된장을 풀었다. 왜 하필 배추된장국이었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치 책 속의 등장인물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나에게 빙의된 것 같았다. 한 수저 떠서 국을 맛보는 내가 신기하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나의 이분법적 생은, 이제껏 '쓰는 나'와 '사는 나'로 분리되었던 자아는, 다소곳하게 합체가 되어 드디어 일체가 되었다.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사는 것 같다던 동생의 말이 떠오른다. 그 때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되돌아보니 허공에서 부유하던 시절이었다. 꿈꾸는 자의 모습 치고는 너무 붕 떠 있는 바람에, 보는 관점에 따라 몰입과 미침이라고 인정할 수도, 삶을 망상으로 분해시켜 버린다고 매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만 있어도, 자신을 제대로 알 수만 있어도 삶은 달라질 텐데 거개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나를 모르고 살았다.
진지하고도 겸손한 모습으로 된장국을 끓이고 이어 토란을 씻었다. 얼마 전 모임에서 정갈한 식당에 들렀다가 밭에서 캤다는 토란을 샀다. 흙내도 채 가시지 않은 싱싱한 것이었다. 나에게 추석은 토란국 먹는 날로 대변될 정도로 토란을 좋아한다. 토란껍질을 잘 까는 법을 검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게 하면 토란껍질이 잘 벗겨지는구나! 이런 감탄은 예전에 결코 맛보지 못하던 삶의 신비이다.
토란껍질을 잘 까려면 고무장갑이 필요하다는 설명에 쇼핑 메모를 하려고 포스트잇을 꺼냈다. 이사한 이후 고무장갑이 필요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아, 마늘도 없구나, 하면서 마늘, 아까 된장을 풀 때 망이 없어서 불편했지, 하면서 거름망, 을 덧붙여 적었다.
국거리 양지를 사려고 몇 번이나 포스트잇에 적어놓기만 하고 미뤄놓았는데 마침 어제 지인으로부터 양지를 보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잊을만하면 산타의 선물꾸러미가 배달되었다. 덕택에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처럼 풍성했고 즐거웠다. 어제의 산타를 위하여 감사기도를 했다.
뒤늦게 드립커피를 내린다. 하지만 배추된장국의 그늘에 에디오피아 원두의 그 진한 향기가 묻혀버렸다. 하는 수 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거름종이에 바싹 코를 들이대고 쌉싸래한 커피 향기를 찾았다. 새벽이 그윽해지는 순간이었다.
두껍고 얇은 책들 사이에서 책을 권하는 책을 골라 펼친다. ‘권독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수많은 책의 목록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읽는다. 모두 좋은 책들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책일 수록 잘 팔리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도 다시 재확인했다. 좋은 책일수록 가독력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해도 일 년에 겨우 오십여 권입니다. 늘 생각했던 사실인데 새삼 경각심이 치솟았다. 정말 이제는 쓸데없는 책은 읽고 싶지 않다. 이전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화를 내면서, 혀를 차면서, 인내하면서 읽을 필요는 없다. 가만히 덮고 다른 책을 찾거나 이미 읽었더라도 고전을 다시 들추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결심.
밤에 비가 온다고 했지.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일어선다. 지나간 어느 날인가 빗속을 무작정 걸었던 때가 있었다. 천변까지 물이 아슬아슬하게 차올랐던 길을 걸었지. 술에 취해 마음도 아슬아슬했었다. 때때로 나를 비참하게 했던 기억인데 시간의 윤색을 거치니 그리워지는 것인가. 베란다로 나가 어두운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빗방울이 손등에 떨어진다. 비에 젖은 새벽이 촉촉하다. 가로등 불빛에 물기가 배인 땅이 차갑게 빛난다. 가늠할 수 없는 저 곳, 짙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겨울이 오고 있다.
등 뒤에서는 배추된장국이 식어가고 있고 내 옆에서는 커피가 식어간다.
여전히 책이 좋고 독서의 시간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만 마늘과 고무장갑과 멸치망이 적힌 포스트잇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겠다. 수많은 책의 제목들이 뜨거운 가슴에 채 다다르기 전에 머릿속에서 식어가는 것은 모든 일에는 숙성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과정이 싫지 않다.
비가 오는 땅을 디딘 나의 발이 '소설(小雪)'이라는 절기를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알겠다. 나는 이 계절에 살아남았다는 것도 알겠다. 삶에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고 누군가에게 말한 기억이 난다. 그것 역시 뒤늦은 삶의 이해였다. 나의 뜨거움이 이성으로 조용히 탈바꿈하는 시간이라는 것도.
(원고지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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