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순설, 2015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어벤져스 500퍼즐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5. 3. 23.

어제 저녁 K pop 스타를 보면서 틈틈히 부엌(한칸짜리 싱크대가 있으니 부엌은 부엌이겠지만 부엌이라고 말하기가 좀 그런)으로 뛰어가 뚱뚱 오징어 두 마리를 조각내어 맛난 오징어볶음을 만들었다. 부재료는 냉장고에 있는 것만 사용하였으므로 당근와 양파뿐이었다. 거기에 파와 호박 청양고추 등이 더 들어가면 정말 완벽할 텐데.

이진아가 생각보다 낮은 점수를 받는 것을 통분히 여기면서, 그래도 진정한 아티스트인 진아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꺼야 하면서, 과연 내 예상대로 된 것을 기뻐하면서 오징어볶음을 담은 냄비는 내가 들고, 물병과 엊그제 신세계에서 판매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결국 사버린 짬뽕라면인지 꽃게라면인지 네 봉지와 홈플러스에서 전시용을 업어온 커피주전자(싸기도 하여라, 이쁘기도 하여라) 등등은 남편이 이고지고 아들과 이쁜 우리 하나가 살고 있는 앞집으로 갔다.

만들기는 내가 만들었는데 남편이 큰소리를 친다.

너희들은 말이야 맨날 이렇게 들고 오는데 쥐뿔도 없느냐.

있어요, 드릴 거.​

아들이 내놓은 쥐뿔이 바로 어벤져스 500퍼즐이었다.

둘이 완성하는데 이틀 걸렸다고 한다.

이제 남편은 또 밤새게 생겼군.

그렇게 해서 주일 저녁의 필수코스인 고스톱이 시작되었다.​

28500원을 자본금으로(전 주일에 나는 13500원이나 잃었던 고로 자본금이 그처럼 줄어들었다) 처음부터 쓰리고를 부르고 피박 광박 씌우고 세번 뻑으로 2000원씩 받아내는 기염을 토하는 나에게 모두 기가 질려 있어서 한마디 했다.

내가 말이야, 내일부터 사순절 새벽기도에 가기로 마음먹었더니 이렇게....그런데 내 마음이 살짝 바뀐 것을 하나님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대박이넹~

예배당에 앉아서 내일부터 부활절까지 이주일 동안 새벽기도회 합니다, 라는 광고를 보고 있자니 새삼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어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작년 사순절의 고통을 생각하면 감사해서라도 새벽에 나와야 할 판이로군. 나올께요.

그러다가 집으로 와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생각이 달라졌다.

어디 갈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인간이 바로 나다.

하나님, 이렇게 합시다.

​내가 택시타고 전철타고 교회가려면 4시 1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그 시간에 일어날께요.

그리고 저 두꺼운 존 스토트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읽을께요.

그리고 택시값 전철값은 모아서 불우이웃돕기 헌금으로 할께요.

만약 그 시간에 안일어나면 다음날부터 새벽기도에 갈께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내맘대로 정해놓고는 자정이 넘어가자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남편,

어벤져스 500퍼즐을 방안에 좌악 깔아놓으셨다. 고통과 인내와 환희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잤다.

그리고 4시 10분에 일어났다.

일어나 보니, 불이 환한 안방에서 우리 남편은 퍼즐 맞추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배도 고프겠다. 밤을 새웠으니.

크림수프를 맛있게 끓여서 남편과 같이 먹었다. 새벽 4시 반에!

약속대로(그런 일방적인 선언도 약속은 약속일까?) 존 스토트 목사님의 두꺼운 책(얼마나 두꺼운지 무려 700쪽에 가깝다. 가격도 24000원이나 한다)을 ​나름 재미있게 흥미있게 밑줄도 그어가며 읽었다.

5시 반에 시작하는 100주년 새벽기도회에도 동참하고, 시도 한 편 필사하고 아침 시간을 너무너무 활기차게 보내는데 7시 반이 넘어가자 우리 남편이 좀비같은 모습으로 내방으로 들어온다. 푹, 쓰러지는 남편님.

내가 올 때까지 줄창 잠을 잘 것 같으시다.

남편에게 어벤져스 500퍼즐은 어떤 의미인가, 를 잠시 생각하다가 말았다.

어쨌든 좋은 아침이잖나. 노는 수단이야 좀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즐거운 것은 사실이잖나 말이다.

편안하고 평안하고 그리고 지극히 고요하며 사랑스러운.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미제레레를 지금 들려주시는 나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나이다~

​Now Playing: Miserere by Gregorio Alleg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