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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유배지에서 한 달

6- 우는 여자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2. 6. 28.

알람이 울렸다. 또 식사시간이다.

때마다 식사를 해야 하는 것이 이곳에서 제일 큰 부담이었다. 1분 정도 늦게 내려갔는데도 이미 모든 사람이 둘러 앉아 수저를 뜨고 있었다. 칸트처럼 정확한 사람들이네?

나의 부탁으로 1/3정도 담아주신 밥그릇 앞에 앉았다. 압력밥솥에서 금방 한 밥, 텃밭에서 뽑아온 상추, 쑥갓무침, 두부와 버섯을 듬뿍 넣은 된장국, 고등어조림... 밥이나 반찬이나 모두 정갈하고 맛있었지만 나는 힘들게 입에 넣어야했다.

-혹시....지난 밤 두 시쯤 울지 않으셨어요?

앞자리에 앉아있던 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계신 방 쪽에서 울음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거든요.

-네?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한밤중에 내가 울다니?

옆자리에 앉은 다른 분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문자를 읽어주었다.

(지금 이 울음소리, 듣고 계세요? 분명 여자 울음소리 맞죠?) 두시 십오 분.

밤 두시에 사람들끼리 문자로 연통을 보낸 사실은 확인되었다.

숟가락을 든 채 멍한 표정으로 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사람이 분명 들었는데... 그래서 새로 오신 분이 혹시 울고 계시는가 했죠....

건너편에 앉아있던 분이 눈총을 주었다.

-아까는 새로 오신 분께 아무 말도 하지 말자더니 왜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놀래시게.

아직 얼굴이 익지 않아 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서로 말이 한참 오간 모양이었다.

이제는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밤 두시에 대체 내가 아닌 어떤 여자가 울었다는 말인가. 나와 동갑이라는 입실 선배여자는 전혀, 무관하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입을 열자마자 켁, 하고 사래가 들렸다. 서둘러 물을 들이켰다. 음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틀 동안 아주 열심히, 치열하게 잠만 잤는데요....

 

식탁이 갑자기 활기차게 변했다. 모두들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 그럼 누가 울었단 말인가.

이야기는 줄기차게 밤 두시에 울었던 그녀가 대체 누구인지에 쏠려있었다. 한참 듣고 있으려니 듣는 나조차도 헛갈려버렸다.

혹시, 내가 몽유병자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소리로 울었던 것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내 자신을 믿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밥알이 곤두서 넘어가질 않는다.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에 휩싸인 주위를 돌아보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모르겠어요...이야기를 듣다보니 혹시.... 한 밤중에 정말 제가 울었던 것은 아닌지 헛갈려요... 지금으로서는....제가 저를 못 믿겠네요...

 

울 수도 있었다.

나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밤새도록 큰소리로 흐느끼는 여자는 나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지난 몇 년간의 삶을 돌아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깨어있지도 않았다. 그럼...마음이 슬픈 나를 위하여 어느 여자가 대신 울어준 것은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까지 하며 밥을 먹으려니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 알량한 밥마저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 식사 칸에 X표를 하고 식당 아주머니에게도 저녁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당분간 식사 시간에도 얼굴을 내밀고 싶지 않았다.

 

우는 여자라는 노래가 있다. La Llorona.

멕시코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의 비극적 삶을 그린 영화 프리다에 늙은 차벨라 바르가스가 직접 출연하여 불러주는 노래이다.

화가 프리다를 알기 전 노래부터 먼저 알게 되었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무리 기쁨에 들떠 있던 사람이라도 그 노래를 들으면 즉시 가장 암울하고 괴로운 슬픔을 맛볼 수밖에 없으리만큼 노래에 흐르는 슬픔은 지독했다.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런 노래를 만들 수도 있구나, 이렇게 노래할 수도 있구나, 이런 목소리로 노래할 수도 있구나.

마치 한국의 한이 서린 듯한 허스키하고 늙은 목소리는 그야말로 애간장이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거의 한 달 동안 그 노래에 미쳐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수백 번 이상 되풀이해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정말 우는 여자를 앞에서 직접 바라보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노래, 우는 여자.

불현듯 그 노래가 다시 듣고 싶었지만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창밖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걷잡을 수 없는 거의 모든 욕구를 잠재워주는 마력이 있다.

천천히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우는 여자는 과연 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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