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설교 패러다임(감신대성서학연구소 간행, 2002)에서 필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성서해석에서 소중한 것은 성서해석의 방법론이 아니라 성서를 해석하는 독자라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어느 날 문득
주석에서 으뜸가는 것은 주석방법론이 아니라 주석자 자신이라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말씀해석이 은혜롭기 위해서는 성서주석 방법론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주석을 하는 사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벅찬 깨달음이 온 가슴을 채웠다.
성서 해석에서, 본문주석에서, 설교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설교자의 변화이다. (아멘 열 번!)
경학은 성서본문을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신 편지"로 보게 한다.
서구 성서학은 모더니즘(현대성)에 기초한다. 이성과 지성에 기초하여 앎에 이르는 신앙을 추적한다.
그 앎의 기준이 인간의 이성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와 이해의 대상으로 변용시키고 만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어서, 깜짝 놀랄만한 구절 소개^^ )
프랑스어 '에크리튀르'는 글이나 문자언어를 의미하는데,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글을 쓰는 주체로서의 "나"가 없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글쓰기를 가리킨다. 가령,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다른 주체가 나를 대신하여 그 무엇인가를 쓰게 하는 글쓰기를 가리킨다.
같은 글쓰기라도 내가 쓴 글이 있고, 내가 무엇인가에 붙들려 쓴 글이 있다는 것이다. 에크리튀르는 후자 방식의 글쓰기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서해석에서 소중한 것은 사람의 글(문자)가 아니라 그 글을 붙들고 있는 정신(영)을 간파하려는 열정이다.
성경말씀을 읽는 자는 누구나 글의 모양만 보지 말고 글의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 이것을 폴 리꾀르 식으로 푼다면, 성서해석을 시도하는 자는 성서언어만 설명하지 말고 그 언어의 상징성까지 풀어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알게 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와, 놀랍다!!!)
말씀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디까지나 모던한 현상이다. 이제는 말씀에 붙들려야 한다.
말씀을 체험하여야 한다.
말씀을 즐겨야 한다.
말씀과 놀아야 한다.
내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나를 읽게 해야 한다.
과학적 해석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서해석의 모더니티를 극복하자는 이야기다. ...
(밑줄 그은 문장만 몇 개 필사하려고 들어왔는데 다시 읽으니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기분이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