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즐거운 경건의 시간 후, 공부하고 있다. 아주 열심히!!
좀 난해하긴 하지만 이곳에 글 좀 올려야겠다... 나의 네이버 블로그는 노트북을 바꾼 후로, 퍼다 옮기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다...그러니까니 그 블로그에는 순수 나의 글만 디립다 올려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왔다. 종교적은 아닌 글이지만 자연이나 아침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가벼?
몇 번 계속 읽어야 하니까 이 또한 경건하게 음미할 것이다.
아, 유다는 공부도 참 열심히 하는구나!! ㅋㅋ
(요즘 열심히 배우러다니는 현대시 창작 강의를 하는 시인 조연호 샘의 칼럼이다.
확실한 제목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아침>이라고 해보자.... 한 번 읽었는데 미치도록 매력적인 아침의 표현이다!!! 으윽, 역시 샘은 정말 멋진 샘이야! 아, 내일 다시 그 즐거운 수업이 기다리고 있구나!! 오늘은 열심히 시 공부하고, 책 읽고, 그리고 저녁에는 현대시 한 편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아침.
1. 기억을 생각의 지옥이라고 쓴다. 마찬가지로 초인을 인간의 괴물이라고 쓴다.
2. 떠오른 것은 구름이라기보다는 구름적이었다. 산책길의 꽃들은 꽃이라기보다 원예적이었고, 자아는 상태라기보다는 형상적인 것이었다. 반려(伴侶)와 산책을 하다 젊은 나이에 숨진 한 사람에게 나는 팔과 다리로 엮은 꽃바구니를 선물했다. 촉지(觸肢)는 가장 높은 곳에서 내가 인식할 수 없을 만큼의 감촉을 내가 인식하는 모든 지평에 넓고 길게 펼쳐놓고 있었다. 무리수들은 유리수적이었다. 그는 망각 속에서조차 망각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잃었던 신체가 지금 누구의 영혼에 담기고 있는지조차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연이라는 간명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것이 종(種)에 대한 플라톤적 세계.
3. 알 수 있는 것에 (아무것도 모른 채) 얽혀 있는 것은 그것이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기술되지 않기 때문에 과정이라는 당혹을 낳는다. 그럴 때의 나는 반드시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반드시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은 추(錘)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체의 필연적 속성처럼 중간이 없었다. 아침은 '더 멀리'라는 뜻만큼이나 '더 가까이'라는 뜻으로, 이편에서 저편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과 이가 없는 벌레에게 양화(量化)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준다. 나는 늘어나고 있다. 네가 남긴 색채를 이 인체에 발라대는 승리로, '나는 있지 않았다'라는 참으로.
4. 나 외의 주어에 대해 내가 술어로서 보편하다면 그 세계가 이루는 보편자의 논리는 무엇이든 최소한의 의미의 낭비가 체험된 세계다. 종합은 더 많은 가치의 절망을 원한다. 그러한 세계에서의 지평선은 바라볼 수 있는 자에게 자연의 정신이 사람에게서 씌어진 것과 같이 자연의 정신 안에서 사람이 씌어지며, 신에게 부여된 소실의 권리이자 증거가 그것의 용법에서만 우리를 자연에서 떠나가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침의 붉은 빛이 나에게 '당신은 나라는 비유로 멈추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침묵은 더 많이 말하고 있었다, 침묵의 음소(音素)들이 음영(陰影) 모두에게 입을 달아주고 있었다. 합리로서 소각(消却)하며 불합리로 종세(終歲)를 위로하는 이 시제(時制)에 나는 자아를 내 부속지에 붙이는 괴물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는 미래의 일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내가 떠날 때 나는 임(臨)할 것이다. 내가 삼갈 때 나는 머무를 것이다. 내가 자연일 때 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회상은 신체만큼 직접적이었다. 절개된 힘줄과 근육은 계절 꽃처럼 타인에게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으로 자신의 빛을 숨긴다. 이것이 당신이 씹고 있는 모든 인간의 육편(肉片)이라 하더라도, 내가 당신 이야기의 기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 역시 나를 씹어대고 있는 자연의 구강(口腔)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절망의 비용이라고 부른다. 알아볼 수 있는 그 어떤 대상도 그 자신의 측면에서는 일부일 수밖에 없고 가능한 모든 미덕이 그의 악덕을 감싸고 있으니, 이 비용은 형태로 변형되는 한 그것과 대비되는 가능성과 함께 사실이라는 교란으로 바라보는 자의 눈 속에 자기 자신을 가둔다. 이것이 식용으로서의 세상. 혹은 침묵의 시(詩)적 상태.
5. 자의(自意)가 자의된 것이 아닐 때 인간은 인간의 선명한 유령이 된다. 그토록 많은 경시와 강조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촉지적인 것을 자신의 감각보다 앞에 두고 두려워 떨며 또 하나의 아침을 자신의 경기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경주마처럼 가파르게 원을 돌며 우리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똑같이 불합리한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소년시대, 나보다 더 작은 것이 나를 만족시키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이 인간 본성의 기능적 단계라고 생각했었다. 가능성을 병폐로 만들며 상을 맺는 상승을 하기 위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기원은 보정(補正)되기 위해 정현조건(正弦條件)을 만족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매번의 아침에 대한 폭로는 내 앞의 그토록 작고 연약하던 자연에 까마득히 매달린 겨울눈으로 움트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의 이야기가 담긴 씨앗 자신이며, 물 한 방울의 마성(魔性)으로도 푸르게 신록으로 변질될 자연 본성의 지성적 단계들, 얼룩들이었다. 전염은 그곳에서 탄생하여, 대응의 모습으로 혹은 자기의 정당한 변명을 적극적으로 위배하는 모습으로, 계(界)를 계(系)로 경과하는 지속 아닌 지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붉게 동터오는 아침은 바람 위에 올려진 하나의 정치시(政治詩)처럼 숭고히 뒹군다. 아침에, 아버지와 그의 형제와 그의 근친자로부터 '(너에게) 좋게 생각되는 것은 나쁘며, 나쁘다는 생각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나머지 생각에게로 성립하려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좋게 생각되는 것을 분명하게 (네가) 나쁘게 생각하는 것을 (우리에게) 참으로 부를 수 있는 (너 자신의) 나쁨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년시대, 상설적인 슬픔이야말로 일과적인 것이 되어갔다. 변질된 신록으로 스스로의 수상(穗狀)을 향유하며, 노예의 모습을 우리에게서 되찾으며, 자연은 그 밖의 모든 것에서 진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그리고 이슬 같은 폭로들은 증발하는 것으로 아침을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의 기나긴 밀폐 앞에서조차 대지는 대지(大地)적이었다. 허공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듯, 대지는 대지에게로 떠오른다. 밝아옴은 우리의 씨앗이 묻힐 곳이 그들이 뿌리내리는 이 대지의 첫 번째 도약이라고 믿게 한다. 갑판 밑으로 사라지는 수부(水夫)와 같이, 혹은 침몰을 앞에 두고 두려움으로 이완된 자가 느끼는 격랑과의 연애감정같이, 어둠은 자신의 대지 위로 이 난파선의 조각들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침에, 빛은 붉은 야행(夜行)을 한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 어떻게 인체가 그 자신의 부속지들과 대비된 판이함과 싸우는 것을 목격할 수 있겠는가? 본 것은 말하여진 것이 아니고 동시에 말하여지지 않은 것은 본 것이 아니다. 말해져야 목격될 수 있는 이 불우한 인식으로만, 우리는 농아(聾啞)상태를 견딘다. 나는 나의 사라진 얼굴에서 시간 뒤의 황혼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