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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사람의 행복이 나에게 고통이 될 때 VS 나의 행복이 주윗사람에게 고통이 될 때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20. 8. 31.

한때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가까운 어떤 사람이 행복에 겨워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그것이 오롯이 고통이 되어 찔러댈 때.

쟤는 저렇게 행복한데 나는 왜 이리 고통스러운가, 그런 차원은 아니었던 것 같고.

무슨 비교를 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부러워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냥 슬펐다. 

 

그것은 인간에 국한되지 않았다.

재가요양보호사를 하던 시절의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

할아버지를 산책시킨답시고 휠체어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를 낑낑거리며 밀고 다니는데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나 아름답게 한 무더기 피어있는데 나는 정말 펑펑 울고 싶었다. 

입술을 깨물어 겨우 울음을 참았다.

이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그 끝이 보이지 않아서 더욱 불행했던 순간이었다.

그 몇 달 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슬픔의 구덩이에서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땐 그걸 몰랐다. 하나님의 때가 그때인지 내가 어떻게 안담.

 

그때 나는 거의 죽음직전까지 갔었고, 그때의 고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모든 것이 꿈만 같다.

고통이 깊을수록 그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지금 살고 있는 51제곱미터의 집은 이사 한지 삼년 반이 지났지만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하다.

저절로 감사하다. 어떻게 이렇게 쾌적한 공간에서 이렇게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냥 하나님이 보너스를 너무 후하게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나의 마음을 나는 여러 곳에 말하고 다녔다.

 

그러니 여러분. 지닌 것에 대하여 감사하세요. 그러면 더 큰 기쁨이 와요.

소박한 것, 지금 지니고 있는 것, 아주 소중한 작은 어떤 것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을 주는지 같이 느껴봐요.

그래서 새처럼 '나는 행복하다'고 종알거리며 다녔다. 나는 나의 (남들이 보면 겨우 그것때문에 그렇게도 좋아? 할 정도의)행복이, 별 것 아닌 것으로 투덜대고, 화내고,

짜증내고 속상해하는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어서, 작은 것들이 주는 귀중한 기쁨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아, 맞아 저 인간은 별것도 없는데 저렇게 기쁘다고 하는데 나는 쟤보다야 백배는 더 많이 가지고 있잖아. 그런 생각도 좀 하면서 살기를 바랐다. 

 

(이건 딴 이야기인데...올해는 침대를 사는 바람에 몇 달 동안 늦잠의 행복으로 아침 시간을 망쳐버렸지만 여전히 침대에 눕는 그 순간,

사락거리는 이불을 들추는 바로 그 순간, 행복하다. 와, 이렇게 좋은 침대가 있다니!

엊그제는 남편에게 무려 100만원짜리 일인용 리클라이너를 사주었다. 

"당신은 명품이니까 당신은 명품 리클라이너에 앉아야 해!" 

명품 남편은 매일 명품 리클라이너에 앉아 하루를 보낸다. 명품답게 자리를 지키고. ㅋ)

 

그런데.. 나의 기쁨을 가감없이 전할 때, 상대방이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얼마 전 알아차렸다.

나는 원래 눈치가 없어서 늦게야 눈치 챈 것이다.

나는 기쁨을 전하며 그 기쁨이 그에게도 전이되기를 바랐지만 그에게 나의 기쁨이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요즘에사 느낀다. 음...그것은...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흐드러진 철쭉더미를 보고 느꼈던 슬픔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어느 때는 나의 기쁨이 그에게 기쁨으로 온전히 전해질 때도 있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도때도없이 늘상 기쁘다고 온종일 재잘거리는 나의 말이 누구에게는 짜증이고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왜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나는 단순하게도 '기쁨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반' , 이런 말을 너무 믿으며 살아온 것 같다.

 

나의 행복이 주윗사람에게 고통이 될 때가 있다.

부디 조심하며 살지어다.

좀 더 조신하게 살아야겠다.

 

이것은 반성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