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이었다.
재개발을 앞둔 낡고 쇠락한 아파트에서 8월로 예정된 영구임대아파트 입주일만 손꼽아 기다리던 그 즈음
또 다시 남편이 일을 냈다.
문을 열면 마주하는 바로 앞집에서 내다버린 화장대를 들고 들어온 것이다.
아이고. 서민중에서도 가장 서민스러운 분들이 사는 아파트에서(그것도 그중 제일 작은 면적인 실평수 11평 아파트) 더 이상 쓰지 못하겠다고 내다버린 가구라는 것의 몰골이 어떠하겠는가.
강남의 타워팰리스라면 또 모르지만 이건 아니었다.
남편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식 장난아닌 것이 한눈에 보이는, 낡음으로 무게를 잡기 때문에 더욱 무겁기 한량없는 둔탁한 화장대를 기어이 현관문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1940년 어귀에 태어나신 분의 안목으로 본다면 부서진 곳 없고, 튼튼해 보이고, 수납 활용도가 높은 화장대는 일급이었을 것이다.
나의 반항에도 불구하고(내가 써야하는 화장대인데 나는 왜 남편 취향의 화장대를 써야하느냐고, 내가 싫은데 왜 집에 들였느냐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것은 좁디좁은 작은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의 손길이 오래동안 묻어있을 화장대 앞에서 새로 이사할 집에는 절대 이 화장대를 가져가지 않을 결심을 단단히 했고, 남편에게 선언했다. 이사할 때는 절대로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하긴 새로 이사할 집은 살고 있던 곳보다 활용면적이 좁았다. 복도식이라 큰 상이며 쌀푸대며 각종 잡동사니를 쌓아둘 수 있었던 뒤베란다가 없었고, 온갖 허드레 물건들을 쌓아두었던 광도 없었고 세탁기를 밀어넣었던 보일러실도 없었다.
마침내 이삿날.
갖은 우여곡절 끝에 그 화장대는 이삿짐속에 꾸려져 새색시같이 깔끔한 아파트에 입성했다. 여기저기 넣어보고 둘 데 없으면 버린다는 전제하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아아 싫어싫어!
새로 이사한 작은 방은 이전에 살던 작은 방보다 더욱 작아 책상이 아예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책상은 식탁자리에 놓여졌다. 좀 이상했지만 한참 보니 익숙해져서인지 딱 알마춤한 자리라고 신기해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참...사람은 적응을 잘하는 종족인가 보았다...
화장대는...결국 신발장과 마주보고 현관바닥에 놓게 되었다. 내가 산 콘솔은 버리고(세상에) 거울만 떼어온 것을 떡하니 화장대 위에 걸었다. 멋지다. 딱 어울린다! 이것은 남편의 말. 나는 남편 뒤에서 울분을 삼키고.
그렇게 해서 나는 화장을 할 때마다 춤을 추어야 한다. 현관에 있는 센서에 불이 켜져야 얼굴이 보여 변장인지 분장인지 할 수 있는데 센서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화장 시간은 춤추는 시간이 되었다. 눈썹을 그리다가 몸을 흔들어 주고, 마스카라를 칠하다가도 제 자리에서 스탭을 밝아준다. 기분이 나면 노래도 부른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날이 환하게 밝은 시간에 화장하기는 더욱 어렵다. 어둡지 않으므로 센서가 켜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도 몸을 흔들어도 환한 현관에 센서가 켜지지 않으므로 결국 실내에서 가장 어두운 공간에서 '화장'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얼추 얼굴에 공을 들인 후 집에서 가장 환한 조명이 있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거울을 보고 리터치를 해야한다.
그런데 이 일 역시 나에게 익숙해졌다. 8월에 이사한 후 지금껏 그렇게 현관에 서서 자꾸 꺼지는 센서에 의지하여 화장을 하다보니 그 자리가 더할나위없이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신을 신을 때 화장대에 의지할 수도 있고 화장대 밑의 작은 공간에 남편의 신을 밀어넣을 수도 있다. 화장대 옆의 후미진 곳에 쓰레기통을 숨길 수도 있고 무엇보다 나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화장대 구석구석에 숨겨놓을 수도 있다.
누구든 우리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화장대가 현관에 놓여있는 것에 신기해 하고 놀라워하고 감탄한다.
남편은 옆에서 화장대가 얼마나 유용한지 곁들여 설명해준다. 남편의 설명이 끝나면 내가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
"춤추면서 화장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니깐요~~"
(산책을 가려고 화장대에서 핀을 찾다가 불현듯^^
에구에구 왕수다 덕택에 오늘도 산책이 늦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