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임원회를 지켜본 후배가 오늘 글을 올렸다. 마치 내가 쓴 것 같은....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글은... 읽을 수록 가슴아팠다.....
이런 교회, 우리 교회뿐 아니라 한국에 하나 둘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고유명사를 적절하게 뺀 후 이곳에 다시 올린다....
똑똑한 후배, 글도 지혜롭게 잘 쓰는구나.)
교회를 나서며, 퍼붓는 장맛비만큼의 눈물이라도 속 시원히 흘렸으면 하는 마음에, 많이 슬퍼하고 답답해 했으며, 아픈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마치 이불 뒤집어 쓰고 부모님의 다툼을 숨죽여 듣다가 헤어지게 되었다는 통보를 들은 아이의 절망감도 느꼈습니다. 누구의 책임을 논하기엔 너무 발가벗겨졌고,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율동 함께 했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저놈”이 되고,
수련회 세족식에 두 손 잡고 눈물로 기도하던 선 후배가 이젠
“임마”가 되었고,
명절이면 인사드리러 가던 친구 부모님들도 이젠
노망든 “노친네”에 지나지 않고,
욕없인 대화하지 못했던
절실한 친구도 이젠 살벌한
“이X끼”,”저X끼”가
되고,
선교 오지에서 실신 할 만큼 뜨겁게 함께 찬양했던 단원들의 고운 목소리가 교련시간
연대장라도 된 듯 “쩌렁 쩌렁”합니다.
가정속에서 신앙인으로서
갈등을 함께 나누던 인도자도 속도도 “XX놈”이
되버렸고,
한 여름 사이다에 보신탕 나눠먹던 권사도 진정한
“개X끼”가 되어버렸습니다.
전도해온 형제 지간에도
“너”, “야”로 호칭하며,
사랑 싸움의 소원함을 주일
예배로 풀던 부부도 앞에 나서면 이혼하겠다고
“협박”하며,
이해가 빠르고 성경 열심히 암송했던 제자들도 이젠
머리 나쁜 “또라이”가 되었고,
문병가서 간절한 기도로 회복을
바랬던 집사가 이제 정신병자 “미친x”이 되었으며,
산상 기도회에서 혼절하여
쓰러진 성도와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이 서로 “지랄 x갑한다”
한답니다. 특정 누구를 지칭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세상 어느 모임에서도 듣기 쉽지 않을 육두문자가 쉬이 날아다니는 지금의 우리 교회 교인들이 언젠 그리 살갑게 지냈던가? 생각해 봅니다.
상호간 호불호가 있었으며, 갈등도 항상 존재하였었고, 미움도 있었습니다. 서로 많이 달랐습니다. 판자집에서 살던 사람도 있었고 그 옆에서 큰 공장을 하시던 분도 있었듯이 살아 가는 모습도, 신앙의 외적 모습도, 내적 모습도, 깊이도, 살아가는 방식도, 직업도, 배움도,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 조금 들어 생각해 보니 모두들 “식구들처럼” 지냈습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다름이 서로 충돌하지 않았으며, 배알이 꼴리더라도 다름을 인정하였고, 욕을 할지언정 다투지 않았으며, 다툴지언정 화해하려 했습니다. 오히려 상대의 부족함을 내가 채우려 했으며, 나의 부족함은 도움을 구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인생 과외 선생님이었고,
선배는 친형보다 더 가까운
상담자였으며,
찾아가면 항상 밥통에 밥이 가득했던 교회학교 친구 집 부모님에게 우리는
“어머니”라고 불렀으며,
교회 일 안주 삼아 포장마차 기웃거리던 친구들은 함께
땀 흘리며 수련회 짐꾼 동지였으며,
인자하셨던 장로님들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들 신앙의
모델이었으며,
아픈 일엔 부둥켜 안고 울며 좋은 일에는 콩 한쪽도 나누었으며,
교회에서 배필을 만난 우리는 가난함도 부끄럽지 않았고, 좁은 방에서 집들이,
돌잔치, 생일잔치로 밥상을 나누었습니다. 사는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선배의 영정 앞에서 며칠밤을 세우며 함께
울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리요 표범이었으며 때로는 어린 양, 송아지였습니다. 우리는 때론 살진 짐승이요 어린 사자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암소요 곰이며 젓먹는 아이였으며, 독사이었습니다.하지만 서로 해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높은 산이기도 하였고 낮은 골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낮아지기도 했고 골짜기를 메우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젓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 11: 6-8)
평화스런 땅에 살던 이리가 어린 양을 물고 표범이 어린 염소를
공격하고, 사자는 더 이상 풀을 먹지 않고 살진 짐승을 먹으려하고, 아이들도 사자를 무서워하고
독사의 구멍에서 놀지 않습니다.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평화가
깨졌습니다. 서로의 본성이 들어나고 숨기고 있었던 발톱을 드러냅니다. 이리는 이리끼리
모이고, 염소들은 염소들끼리 모여 생존하려 합니다. 우리를 벗어나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나는 울고
맙니다. 우리로 들어가려 해도 나는 염소인지 이리인지를 분명이 해야만 합니다. 문득 다른 우리들을
보니 역시 염소인지 이리인지 묻습니다. 100년넘게 평화로웠던 내 우리가
그립습니다.
책임을 논하면 평화가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염소가 염소라고 고백하고 이리가 이리임을 고백하면 평화가 다시 오려나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리가 이리인지 모르고 염소가 염소인지 모르던 우리에 누군가 “넌 이리야!
염소, 어린 양 잡아먹는 이리! “ “넌 염소고 어린양이야!
언제 사자가, 표범이, 이리가, 널 잡아 먹을 지
몰라!” 라고 가르쳐 준 것은 아닐까요? 설마 평화를 누리고 배부르게 잘 살던 이리나 사자 중에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깨달음을 득하고 염소가 어린양이 맛있어 보일 수 있을까요? 설마 평화를 인지하고 풀을 뜯던
염소가 아무런 이유없이 사자가 무서워 질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 교인들은, 아니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품고 살아가며, 한계와 무지함을 품고 살아갑니다. 어찌하여 오랫동안 함께했던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쑥스러워 드러내지 못했던 두려움을 창으로 들어내서 서로 찌르며, 상대의 한계와 무지함을 서로 비난하며 살아가게 되었나요.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언제부터 이 평화가 깨지기 시작한 것인지, 그리고 진정 교인들 스스로 깬 것인지…. 평화롭던 우리에 무엇 때문에 변화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