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다는 주일성수한다

1월 다섯째 주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3.

제 5부. 1월 다섯 째 주

 

 

명절을 즐기는 법

 

 

 

설 연휴이어서인지 주일 예배에 빈자리가 제법 눈에 띄었다. 교인들이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내일이 설이니 고향에 내려가는 분도 계시겠고, 믿지 않는 시댁에 가서 음식 준비하는 분도 계시겠고, 집으로 몰려온 친척 대접에 교회에 오지 못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몇 해 전인가 설날이 주일인 적이 있었다. 확 줄어든 교인들을 보는 관점은 목회자와 하나님이 반드시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간만에 만나는 친척 친지들과 집에서 지내느라 교회에 오지 못하는 교인들을 목회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잘은 모르지만(실은 그 속을 대강은 알고 있다) 하나님은 그다지 기분 나빠하실 것 같지는 않다.

 

그래, 좋은 시간이다.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나를 만날 수 있으니 마음에 부담 갖지 말고 즐겁게 지내거라!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아들이 강원도 간성, 그 먼 곳에서 군 복무 할 때의 일이다. 면회를 가려고 하는데 토요일 가서 아들 외박 신청하고 주일 오후에 다시 부대에 복귀시켜야 했다.

나는 주일 성수를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마음에 걸렸다. 며칠 고민하다 엊그제 기독교 TV에서 강의하시던 신학자에게 메일을 보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리저리 해서 아들 부대로 면회 가느라 주일 성수를 못하게 되어 심히 마음이 두렵고 떨리고 편치 않습니다. 워쩌면 조으까요잉!

즉시 답 메일이 왔다.

 

모처럼 아드님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누리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충분히 즐기십시오.

 

아아, 정말 멋진 분이시다!

마음의 구속에서 해방시키시는 말씀이었다. 마치 우리를 자유롭게, 율법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유대인들에게 오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메일을 읽은 후, 정말 아주 편한 마음으로 면회를 갈 수 있었다. 일박이일동안 아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충분히 누렸음은 물론이다.

 

 

예배 후, 여선교회에서 판매하는 떡국 떡을 한 보따리 샀다. 온 가족이 실컷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제법 마음이 뿌듯하여 교회 지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작년까지 4년 동안 함께 속회 예배를 드렸던 권사님을 발견.

아, 이 권사님으로 말한다면 정말 힘들고 어렵게 사시는 분이었다. 일흔이 넘으신 연세에도 편안하게 살지 못하시는, 정말 가련하고 불쌍한 권사님 손을 잡아드렸다.

“권사님. 설에는 누가 오시나요?”

“아니요, 준비해 놓은 것이 없어서 오지 말라고 했지요.”

“아무도 안 오셔도 떡국은 끓여 드셔야지요.”

권사님은 그냥 가만히 웃기만 하셨다. 나는 안다, 그 권사님의 핍절한 상황을. 정말 눈물 없이는 듣고 있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일생을.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환란 가득한 나날들을.

나이 드신 분들의 보편적인 신앙을 가지고 계신 그 권사님이 얼마 전 해 준 이야기 하나.

“아이고, 추수 감사절에 언제나 헌금을 했는데, 이번에는 글쎄 한 푼도 없어서 감사 헌금을 못했시유. 한 번도 추수 감사헌금을 안 드린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아주 힘들었시유. 돈 오만원도 못하고 아이구 내 팔자야. 헌금을 못했더니 하나님이 노하셔서 아들이 저렇게 자빠지고, 나는 이렇게 고생하고( 그 즈음 권사님은 설상가상으로 끔찍한 일을 겪으시는 중이었다) 하나님 것을 떼먹었더니 아, 글쎄 그런 환란이……”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목회자들에게 화가 나 견딜 수 없다. 저런 이상스런 믿음의 사고방식을 누가 가르쳤단 말인가!

그 때, 나는 병들고 가난하고 온갖 풍상을 다 겪고 계시는 권사님 손을 잡고 교회 목회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가서 목회자 앞에 세워놓고, 저런 슬픈 믿음을 가지고 계신 권사님을 위로하라고 다그치고 싶었다.

설날 아무도 오지 않고, 떡국도 못 끓여 드실 형편인 할머니 권사님을 보는데 정말 목이 메었다. 아마 예수님도 목이 메었을 것이다.

나는 들고 있던 떡국 떡을 권사님께 드리면서 적은 액수지만 지폐 한 장도 주머니에 넣어드렸다.

“내일 떡국도 드시고, 나물도 하셔요.”

이럴 때 나는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하나님께 항의성 기도 한 방 날렸다.

하나님, 이 권사님 좀 어떻게 해주세요. 돈벼락 좀 맞게 해주세욧!“

 

날씨가 추워 동네 교회에서 예배드린 남편이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교회에서 떡국 떡 사온다더니 사왔어?”

나는 아파트 상가 슈퍼에서 사온 떡보따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여선교회에서 진짜 맛있는 떡국 떡을 팔더라고.”

“에이, 떡국 떡이야 다 똑같지.”

“아니야, 이번 쌀은 진짜 좋다는데? 이번에 끝내주는 떡국 먹게 생겼어요~”

 

 

설날, 열 네 사람이 모였다.

친척들은 다 가난하다. 오죽하면 24평 우리 아파트가 그나마 제일 커서 우리 집에서 모이는 것일까. 나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다. 친척들은 즐겁게 식사하고 오래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누구는 집안의 어르신인 작은 아버지께 성심껏 용돈을 드렸고, 누구는 세뱃돈을 돌렸다. 정말 미약한 액수지만 즐거웠다. 음식을 차리느라 수고했다고 동생들이 봉투를 주었다.

고맙다, 동생들아.

아픈 매형을 위하여 동생들은 용돈도 준비했다. 기특한 녀석들!

남은 음식을 이것저것 담아 싸서 돌렸다. 적은 양인데도 모두들 즐거워한다.

나는 안다. 살아가는데 이런 정도의 돈은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 부담 없이 음식을 차릴 수 있고, 초대한 손님들에게 무엇인가 나누어 주고, 어린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은 정말 필요하다. 하나님은 왜 나를 가난하게 살게 만드는지 모르지만 철들면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나는 저금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늘 통장은 마이너스 대가리가 붙어있는 숫자들이 꼬물꼬물 자라고 있었고, 카드 결제일인 월 말이 되면 몇 시간 동안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머리를 짜내어 이리저리 펑크나지 않게 돈을 밀어 넣느라고 늘, 월 말은 우울하게 보내게 마련이다.

하나님께 다시 화살기도.

하나님, 저에게도 돈벼락을 좀……

 

 

저녁 남편과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제목이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이었다. 남편과 나는 흥미롭게 읽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일 때 역전시키신다는 것이다. 결론에 좋은 말씀이 붙어 있었다. 그래, 우리라고 늘 빚만 지면서 살라는 법은 없는 거지!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평생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역전시키신다잖나!

로또보다 더 귀한 하나님! 하하하. 우리는 말미의 덕담 말씀을 소리 내 읽었다.

 

올해에는 우리의 상황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과 나는 목청껏 소리쳤다. 아멘!

 

 

설 연휴 마지막 날, 친구들과 친구 병문안을 갔다. 우리가 설을 실컷 즐기고 노는 동안에도 친구는 병실에 누워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친구 얼굴이 해쓱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돈은 있어야 하고 병은 없어야 하고.

요즘은 한 글자로 이루어진 것들이 나를 깊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한 시간 좀 넘게 친구 병실에 앉아 노닥거리는데 내 온몸도 쑤시는 것처럼 아파왔다. 하나님은 저 친구에게 고통을 주시면서 무엇을 깨닫게 하려는 것일까.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는 친구를 나에게 보여주시면서 나로 하여금 어떤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일까.

아무리 역전시키는 하나님을 믿어도 하루 만에 인생이 역전되지 않은 나는, 친구들이 통행료 내는 모습, 차에 기름 넣은 모습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몇 푼 되지 않는 통행료쯤은 내주고 싶고, 그리고 매일 차로 우리를 태워주는 친구에게 기름 한 번이라도 넣어주고 싶단 말입니다, 하나님!

물론 나보다 훨씬 큰 집에서 큰 차 굴리면서, 통장에 빵빵하게 돈이 쟁여져 있으니, 가난한 내가 지갑을 연다 한들 펄펄 뛰며 말릴 것이 분명하지만 내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시죠? 하나님, 역전의 하나님! 기대하고 있습니당~

 

원래 병문안 후, 친구 남편들과 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친구들이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홀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와서 남편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모임 빵꾸났어. 그러니까 우리끼리 한 잔 합시다.”

“조오치!”

설 음식 남은 것을 뒤졌더니 한 상 푸짐하게 차려졌다. 남편과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하나님께 감사!”

“감사!”

참 이상한 건배도 다 있지만 우리는 가끔 그렇게 건배를 하기도 한다^^

남편과 마주 앉아 신나게 술을 마시는데 교회에서 문자가 왔다. 저녁 즈음에 오는 문자는 대개 장례식 안내이다. 누구누구 별세. 언제 입관, 언제 발인, 장지 어디. 언제 어디어디로 모일 것.

솔직하게 말한다면 교회에서 문자 온 것 치고 즐거운 일은 거의(나는 전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없었다. 특별 새벽기도 참석 요망, 보고서 제출 요망, 헌금 통장 보고하시오, 예배 변경 안내 등등으로 뭔가를 제출하라거나, 어디로 오라는 명령이다.

성실한 전도사님은 일주일에 몇 번씩 문자를 날려주기도 한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내 앞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주 안에서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말씀이야 귀하고 좋지만 그 문자를 읽는 나는 조금도 반갑지 않다. 별로 착하지 않은 내 심보로는 주님의 말씀조차 스팸 문자로 보이니 이를 어떡할까.

 

스팸 문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교회 문자를 참다못해 속회 인도자 교육시간에 담임 목사님께 항의한 적이 있다.

“될 수 있으면 교회에서 단체 문자 좀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전달사항이 하루에도 몇 통 씩 오니 짜증납니다.”

목사님은 즉시 비서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는 부목사와 전도사에게 지시했다.

“잘 들었지?”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듣기만 잘 들었을 뿐이었다. 그 후로도 교회에서 문자 오는 회수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교회란 원래 그렇지 뭐.

무엇이든 즉시 해결되는 일은 드물고, 한없이 더디고, 교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는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내 생각에) 교회 행정의 모든 촉수는 담임 목회자에게 뻗쳐 있는 것 같다. 담임 목회자의 마인드, 담임 목회자의 리더 십, 담임 목회자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담임 목회자가 이 문제를 허락할 것이냐, 담임 목회자가 바라는 방향은 이게 아니다, 등등

정말 어느 땐 담임 목회자 생각대로 하느라고 예수님 생각까지 물어볼 겨를이 없는지도 모른다. 오오, 거대한 조직을 거느리고 계시는 예수 주식회사, 교회 회사!

 

요즘 생각인데 담임 목회자는 CEO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성직자는 절대 아니다!

자산 규모 이삼백 억, 연간 매출(예수님을 팔아서) 30억 원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시는 회장님 정도?

(이 말은 결코 심한 말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교회 조직도를 보면 딴딴하고 야무진 중소기업 같다)

 

예수님! 그래서 매우 좋으신가요? 만족하고 기쁘신가요? 이런 한국 교회의 형태가?

 

교회 사무실에서만 문자가 오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못하다. 내가 속한 성가대에서도 오고, 조가 중창단에서도 오고, 속회에서도 오고, 교회 홍보지 출판물 편집부에서도 온다.

그래도 착한 교인들은 나처럼 항의하지 않고, 에구 또 왔네, 하면서 싹 지워버린다고 한다.

하여튼 술 마시다 문자를 보았다. 역시 긴급소집 문자였다.

 

내일 발인예배 있습니다. 오전 6시까지 교회로 오십시오. 사랑합니다.

 

내가 문자를 보면서 문자에게 대답했다.

“네, 사랑하는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전 6시까지 교회에 가려면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4시 반에 집을 나서야 하고, 5시에 출발하는 첫 전철을 타야한다.

그렇다면 술을 좀 적게 마실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술이 아주 잘 당기는 바람에 내가 원하는 만큼 절제하지 못하고 넘치게 마셔버렸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이어진 남편과의 회식(^^)에 알딸딸해진 나는 마음이 풀어져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은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자버리자.”

십년 동안 장례위원회에서 조가를 부르러 다녔지만 이런 엉뚱한 마음은 정말 처음이었다. 가기 싫다고 해서 안 간 적도 없었거니와, 장례 문자가 왔을 때, 가기 싫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정말 내가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결심을 해 버린 것이다.

 

나는 4시에 울리기로 했던 휴대폰 알람 시간을 해제해 버렸다.

이왕 자는 거 편하게 누리면서 자는 거야. 나는 코를 골면서 잤다. (나는 평소에는 얌전히 자는데 술만 마시면 코를 곤다고 같이 사는 남자들이 말해주었다. 코를 고는 것도 술을 얼마나 마셨느냐에 따라 강도가 틀려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술을 안 먹은 척하고, 조금 마신척하고 들어와도 코고는 소리로 증명되는 음주량 때문에 나는 거짓말 하는 것을 포기하고 산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발인예배에 가다

 

 

 

꿈결에 나는 목이 너무도 말랐다. 자면서도 내가 마른기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목마르구나. 일어나서 물을 마셔야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우물을 찾고, 수돗가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그렇게 목이 말라 허우적거리면서(그러면서도 코는 신나게 골았을 것이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남편이 일어나 가습기를 트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잊어버리고 가습기를 안 틀었더니 공기가 너무 메마른 것 같아. 당신이 계속 마른기침을 하더라고.”

착한 남편은 시원한 냉수 한 잔을 방까지 들고 왔다. 잠결에 일어나 마시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혹시나 하고 휴대폰으로 시계를 보았다.

A.M. 4:00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아주 정확한 시간, A.M. 4:00 !

하나님이 내 머리통을 한 대 확, 후려친 것 같았다. 눈이 번쩍 떠졌다. 발인예배 가라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목마르게 만들어놓고, 그래서 깨어나게 하셨구나!

어제 밤 좀 과하게 마셨는데 두통도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정신없이 준비하고 새벽 4시 반 집을 뛰쳐나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남편이 허허, 웃고 있었다.

 

 

교회에 도착하니 5시 40분.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이십분의 남은 시간 동안 기도를 할 참이었다. 참으로 아늑한 공간. 마음이 따사로워지고 요동쳤던 번뇌(불교적 용어일까? 번뇌라는 말은?)들이 순한 양처럼 조용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단상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십자가 십자가 그 속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그의 생명 내 속에 그의 능력 내 안에/ 그의 소망 내 삶에 나의 삶 주의 것

 

분명 십자가 속에 나는 죽었다. 예수님의 사랑도 내 속에 강같이 흐른다. 그것은 과거 완료일까? 여전히 나는 죽어 있고, 내 안의 예수님이 살고 계시는가?

눈물이 핑 돌았다. 분명 죽긴 죽었는데 어느 순간 살펴보면 여전히 죽지 않고 팔팔하게 살아있는 자아. 입에서 저절로 기도가 흘러나왔다. 오강남 교수가 가르쳐준 기도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들이 다니던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서는 쉬운 성가를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쳐주었다. 만 네 돌이 겨우 지난 아들은 집에서 놀면서도 종종 노래를 불렀다.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쉽고 아름다운 가락으로 어린 아들이, 뜻을 알 리 없는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가슴이 늘 벅찼다.

마가복음을 필사하면서 느끼는 것이 많았다. 예수님의 아낌없는 사랑, 베푸심. ‘예수 따르미’로서 나도 그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텐데, 사랑을 베풀기는커녕 너무 면목 없이 살고 있구나!

 

 

지하에는 꼭두새벽부터 매서운 바람을 가르고 뛰어온 조가 중창단들이 모여 있다. 단원 모두 새해에 굳은 다짐을 했는지 결석자가 없었다. 정성스레 연습하고 승합차에 끼어 앉아 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날은 아직 밝지 않아 어두운 시내에는 차들이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바쁘게 사는 사람들, 왜 그렇게 바쁜지, 왜 그렇게 바빠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려가는 차들을 보니 무작정 무리를 지어 뛰어가는 스프링 벅 같아 보였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풀을 뜯어먹어야 하는데!

 

 

장례예배를 드리면서 국화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나이 드신 할머니다. 직분을 쓰는 곳에 그냥 교우, 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교회에 드문드문 나오셨거나 자식들만 교회에 다녔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병석에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늘 듣는 장례식 설교지만 언제나 그렇듯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돌아가는 것이다. 근원적인 어떤 곳으로. 그곳은 종교에 따라 단어가 틀려지지만 사실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곳은 장소만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갔는데 어느 식물원 현판에 이런 글귀를 써 놓았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그 말은 맞기도 하지만 맞지 않기도 하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받아주신다.

장례예배에서 마지막 찬송은 늘 같은 곡을 부르는데 스코틀랜드 노래인 ‘애니 로리’에 한국에 온 선교사 소안론이 시을 붙인 찬송가다. 그 중 3절을 부를 때면 언제나 가슴이 울컥한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해 주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위로받는 시간이다. 어쩌면 나는 그 찬송가를 부르기 위해 그렇게도 많이 장례예배를 참석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우리 교회는 6시에 시작하는 조찬기도회가 있는데 그냥 회사로 출근하는 교인들을 위하여 따뜻한 밥과 국으로 식사를 제공한다. 빈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으려고 부엌으로 갔더니 심통권사님이 고무장갑을 끼고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늘 교회에서 철야를 하고, 늘 교회 부엌에서 힘들게 봉사하면서도 가시돋힌 말을 잘 하는 바람에 상처받은 교인들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교인들로부터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할머니 권사님이다.

“권사님,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권사님은 인사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말씀하신다.

“됐어!”

하하, 역시 권사님이시다.

열에 아홉 가지를 잘하면서도 말실수 때문에 은근히 왕따 당하고 있는 할머니 권사님을 위해 화살기도를 드렸다.

저 권사님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저라도 권사님을 더욱 사랑하게 해 주세요.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집에 돌아와 교회 100년사 원고 교정 작업.

집필을 맡은 교수님이 이번에 보내온 원고 묶음은 해방 후부터 약 십 년 간의 교회 역사 기록이었다. 빨강 펜을 들고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탈자, 오자를 솎아내면서 읽는데 진한 감동이 왔다.

그 시절의 교인들은 참 순수했던 것 같다. 교인뿐일까, 목회자도 열과 성을 다하여 교인들을 보살핀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때는 교회 규모가 작아 목회자와 교인들의 사이가 무척 가까웠던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삼십 여 년 동안 한 사람의 목회자를 모셨는데(?), 단 한 차례도 독대하여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정말 단 한 번도!

물론 나는 목회자에게 묻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목회자님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로님들의 벽이 하도 두꺼워 근접하기 어려웠다.

십 년 넘게 목회자와 마주칠 때 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하면서도 내심 궁금했다.

지금 목사님이 나를 알고 인사를 받는 것일까? 이름이나 제대로 알고 계시는 걸까?

이십 년 넘어가면서야 비로소 그 의문의 답을 찾았다. 어느 날 무엇인가 지시하시면서 내 이름을 부른 것이다.

목회자가 내 이름을 알고 모르고가 무슨 중요한 일도 아니고, 목회자와 악수 한 번 한다고 해서 무슨 정이 새록새록 오갈까마는 그것에 대단한 의미를 두는 사람이 없지는 않은 모양으로, 우리 집, 바로 내 옆에서 수십 년 살고 있는 남편이 그러하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정죄할 마음은 없으므로 나는 남편의 그러한 성향을 배려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의아스럽기는 하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목회자의 눈에 뜨이려고 하는지……

 

신앙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은 때가 있을 때도 선뜻, 전화를 하거나 목회자실의 방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게 평범한 교인들일 것이다.

나는 정말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성경도 그렇고, 교회 생활도 그렇고, 신앙생활도 그렇다. 쓸데없는 탐구심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나에게는 늘 퀘스천 마크가 따라다녔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언제인가 부목사님이 집으로 심방 왔을 때 어떤 신앙적인 질문을 했더니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 근데 지금 시간이 없어서요, 다음 집 심방 시간을 잡아 놓아서 좀 곤란하군요’

참 나…… 한 시간 간격으로 심방 시간을 잡아놓고, 그 중 30분은 집에서 집으로 이동 시간, 그리고 남은 30분 동안 찬송, 기도, 설교 다 끝내고 의례적으로 물어보는 몇 마디 안부, 거기다 다과를 대접받고 기도해준다.

나는 몇 십 년 동안 심방을 따라 다녀보았는데 교인들의 내면에 있는 진지한 이야기 5분 이상 이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수박 겉은 왜 핥는지 모르겠다. 결국 심방 때는 교인들의 빨간 속살은 열어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무정한 목회자들!

심방을 받는 교인들은 메뉴 짜기에만 분주해지는 대심방이다.

목사님이 뭘 좋아하신다더라. 집집마다 물만 드시면 곤란하니까 떡, 죽, 과일, 한과 등을 적절하게 나누자, 오전에는 커피 내 놓지 말자, 이런 전화가 수없이 오고가는 대 심방.

그리하여 수박 겉핥기가 되어버린 대심방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굳건히 지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작고 누추한 집은 목사님 모시고 예배드릴 장소로 절대 뽑히지 못하니, 구유에서 나시고 거리에서 방랑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같이 초라한 사람은 예배 받기도 힘들 것이다. 가장 크고 번듯한 집, 널찍하고 으리번쩍한 거실에서 영국제 커피잔으로 대접하는 교인들 집만 해마다 찾아가시는 목회자들. 컨테이너에서 온 식구가 생활하는 어느 교인의 한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누추해서 모시지 못해유.

이천 년 전,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다니셨던 예수님이 지금 컨테이너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계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교회에서나 집회에서 또는 수련회에 가서도 목회자가 식사를 할 때는 의례 장로들이 좌우 앞에 포진하고 앉아, 농담서부터 진지한 이야기까지, 하다못해 여행 다녀온 잡담도 줄줄 늘어놓는 모습을 보면 어느 땐 화가 나기도 한다.

나라로 치자면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는 대통령인 셈이다. 나는 가끔 이런 불손한 생각도 했다.

저러다가 목사님, 이기붕에게 끌려 다니던 이승만 짝 나지 않을까, 아니면 차지철 때문에 욕 디따 먹은 박정희 짝이나.

 

교인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고 같이 기도해 주는 목회자가 그립다.

요즘 목회자를 보면 온갖 잡무에 시달려 정작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시간이 없는(아니면 대강 가르치던가) 초등학교 교사 같은 생각도 든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고, 인격과 인격이 만나고, 사랑과 사랑을 나누며 아픔과 아픔을 나누는 목회자와 교인의 교제를 원한다면 그것은 천국에서나?

 

어릴 때 존 스타인백의 소설(영화로도 만들어졌다)<분노의 포도>를 읽었을 때 그 소설에 나오는 따라지 목사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습에서 나는 예수를 발견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 창녀, 무식자, 가난한 자, 눈멀고 중풍 걸린 자들과 함께 하셨다. 돈 있고 교양 있고 권세 있고 떵떵거리는 제사장 바리새인 들은 예수님께 매일 죽도록 욕만 먹었다.

회칠할 무덤에 들어갈 인간들아!

예수님께만 욕을 먹었나? 세례 요한도 눈 부릅뜨고 호령했다. 너희 독사의 자식들아!

현재 한국의 교회는 바리새인들의 교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창녀는 교회 못 온다, 가난한 자도 오기 힘들다, 교회에서 눈 먼 사람 한 번도 못 보았다, 중풍 걸린 우리 남편은 교회 오기 힘들어 한다, 술 좋아하고 담배 잘 피우는 나 같은 교인은(나야 뻔뻔하게 고개 쳐들고 열심히 잘 다니고 있지만) 대개 자책감에 시달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해버린다.

 

교회에 가서 구원받은 기쁨을 누리면 좀 좋겠는가. 그런데 말끝마다 죄인, 죄인 하면서 마음 약하고 착한 교인들을 다시 십자가에 매달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만 오면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하고, 눈물을 흘리고, 혹 용서 받을까 하여 분에 넘치는 헌금도 하는 것이다.

“여러분, 죄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신나고, 즐겁고 기쁘게 사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엔조이 유어셀프!”

이렇게 선포하는 목회자 별로 보지 못했다.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는 불쌍한 죄인들이여, 어서 와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런 말씀을 컬컬하고 쉰 목소리로(마이크 음량은 최대로 높여서 귀에 쟁쟁하게 만들어놓고) 협박하는 목회자는 참 많이도 보아왔다.

단번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히브리서 읽기가 무색할 정도다. 어쩌다 교회가 회칠한 무덤처럼 되어 버렸나!

복음서에서 보면 무지하게 욕도 잘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너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하는 자식들아!

나는 욕하는 예수님을 읽으면 속이 다 후련해진다. 카타르시스!

 

 

눈물의 카타르시스

 

 

 

시 쓰는 문우가 문자를 보냈다.

낮 술 한 잔 하시려우?

그럽시다

내가 사는 동네에 문우들의 아지트가 있다. 산책을 나서다 그 선술집을 지나치면 간혹 문인하나가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문우들과 만나 술 한 잔 하면 술의 안주감은 바로 문학이다. 문학이 결코 밥을 먹여주지는 않지만, 그들의 영혼을 살찌우게는 하는 모양이다.

문우와 마주 앉아 문학, 문단, 문예지, 문필 활동 등 ‘문(文)’자 돌림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대하여 눈을 반짝이며 대화하는데 띠릭, 또 문자가 온다.

역시 시를 쓰는 문우였다.

저녁에 번개합시당.

술 마시다 와하하 웃었다. 두 사람이 머리 맞대고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이 더 오고, 다시 한 사람, 또 한 사람 이렇게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시 쓰는 인간들은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긴 글 쓰는 인간들은 문장의 맛을 말빨로 풀어내면서 서로의 문학이 섞이고, 서로의 마음이 섞이고, 서로의 자아가 부딪히기도 하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년놈들은 그냥 만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했던 책도 몇 권씩 가져와 나누어 주기도 하는데 읽는 취향이 모두 달라서 그것에 대해 토론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면 한 자리에 죽치고 있지 않고 자꾸 자리를 옮기게 되는 것이 참 신기하다. 잘 사는 인간 하나도 없지만 서로의 형편을 배려하여 지갑을 잘도 연다. 결국 3차까지 갔다. 술 마시고, 밥 먹으면서 반주를 곁들이고, 다시 술 마시고.

한 시인이 말했다.

“주문한 책 보따리가 택배로 왔는데요, 글쎄 그것을 본 집 사람이 책 보따리를 발로 뻥 차지 않겠습니까! 집안 경제는 생각하지도 않고 딴 곳에 빠져 있으니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요.”

“대동소이허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는 그런 마누라의 투정이 사라졌어요. 슬쩍 물어봤더니, 다른 집 남편들은 바람도 피우고, 엇나가는 짓을 하는데 그에 비하면 매일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는 남편은 좀 낫다 싶더라나요.”

“글에 바람나는 것이 더 무서운지 모르시누만!”

“헤헤, 알 리가 없죠. 하여튼 요즘은 평화롭습니다.”

영혼에 가시가 박힌 년놈들과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알코올 중독이나 일중독처럼 글도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었다.

작년엔가 암 투병하다 세상을 뜬 소설가가 한 말이 있었다.

 

“암 투병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것이 소설 쓰기였습니다.”

 

죽기 직전 문병 온 사람들에게 토로했다는 유언 아닌 유언은 글에 미친 우리들에게는 소름끼치도록 공감되는 말이었다.

문학은 결핍에서 생성된다. 시대와의 불화도 한 몫을 한다. 나와 나의 자아가 갈등하고, 나와 가족이 갈등하고 나와 세상이 갈등하는 고통을 끌어안고 문학은 자란다.

술자리에 함께 있는 년놈들의 꿈은 소박하기도 하다.

언제인가 고통을 한 땀씩 이어낸 산물인 글을 묶어 책 한 권 내는 것.

어느 한 사람 문단에서 뜨지도 않았고, 기가 막히게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없지만, 그들의 열정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문인들과의 술자리가 즐겁기만 할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머릿속은 한 순간 뜨거워졌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하나님의 진심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진정 나에게 문학하기를 바라시는가. 글쓰기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라면 어찌하여 이제 와서 내 손목을 꽉 붙잡고 도무지 소설을 못 쓰게 하시는가!

나는 아껴 먹던 추파춥스를 빼앗긴 것처럼 서운하고 허전했다.

하나님은 나에게 알록달록 맛있는 막대 사탕 하나 쥐어주시더니 다 빨아먹기도 전에 왜 도로 가져가버리신다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 올리기 명수, 하나님께 나는 야속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리시든지, 좋아서 가는 길은 한 눈 질끈 감고 묵인하시든지 하실 것이지 지금 내 꼴이 이게 뭡니까!

그렇다면 그토록 오래 동안 애쓰고 힘써왔던 글 솜씨는 교회 미담 책 한 권 쓰고, 교회 홍보지 편집장 시키려는 목적이었단 말씀입니까!

왜 나의 그릇은 간장 종지 만하게 만드셨단 말입니까! 내 주위에 있는 글 쓰는 다른 년들은 하나님 안 믿어도 된장 마을 장독 만하게 주시면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믿음의 경력이 있지, 내 그릇은 적어도 뷔페 접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욧!

(하나님이 ‘그렇다면 간장 종지도 거두어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까봐 나는 귀를 딱 막고 소리쳤다)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한탄하고, 년놈들과의 대화는 작가, 문단, 요즘 동향, 습작의 고통 등을 나누면서 띵, 띵, 술잔을 부딪치는데, 이렇게 술술 술이 잘 넘어가는 순간도 있구나 싶도록 완전 술시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취했다.

“나 오늘 완전 취하네.”

앞에 앉아 있던 시인 하나가 말했다.

“내가 죽 지켜 본 바에 의하면 절도 있고 절제 잘하시던데, 뭘.”

“아닌데?”

“저도 알만큼은 압니다.”

거의 맞는 소리다. 이것들이 아주 귀신이네. 술이 잘 받는 날이면 나는 속으로 대략 계산한다. 오늘은 이만큼이면 딱이겠구나. 한계선을 그어놓고 마시다가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디따 집으로 뛰어가신다. (모임은 우리 동네에서 하기 십상이어서 집에 가기도 좋다)

내 소원 중의 한 가지는 ‘맛이 갈 때까지 마셔보는 것’ 인데 아직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마셔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될 때의 내 상태, 내 마음을 알고 싶었다. 이성은 무섭다. 죽을 때까지 나를 조종할 것이다.

 

나에게 허접한 소원은 몇 가지 더 있다.

일테면 잘 차려진 한정식 한 상 받아보는 것(정말 격조 높은 한정식을 말한다. 신선로도 있어야 한다^^.

어느 구석에 박혀 온종일 실컷 울어보는 것,

한 며칠 혼자 끝없이 걸어보는 것. 등등.

며칠 전 제주도에 섬을 한 바퀴 돌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뛰었다.

촉감 운동화 하나 사 신고 제주도로 날아간다. 이박 삼일이나 삼박 사일동안 제주도를 걷는다. 그러면 나의 내면에 꿈틀거리던 온갖 잡념들이 사라질 것 같다.

 

(이 글을 쓴 몇 달 후 이박삼일의 제주 올레를 다녀왔다. 그 첫날의 일기. 칸나는 블로그에서 사용하는 나의 닉네임이다^^)

 

 

감수광

 

 

마음이 복잡다단한 칸나, 6월의 어느 날 발동이 걸려 제주도로 날아갔습니다.

참나... 마치 유럽 일주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아들 내미와 남편이 줄줄이 사탕으로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가운데 친구가 선물해준 리꾸사꾸(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은 이 멋진 단어를 모를 듯하여 해석을 달자면 륙색이랄까, 뭐 그런 것이지요)에 뭔지 모를 어떤 것들을 잔뜩 꾸려넣고 공항로비에서 한동안 서성거렸습니다?

 

한참 일행을 기다리다 지친 칸나, 아들을 꼬드겨, 곰을 잡기에 충분한,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흡연실로 끌고 가 아들놈과 맞담배를 한대 꼬시고, 설렁설렁 걸어오는 친구 년들과 함께 티켓팅하구, 으리번쩍한 면세점을 본척만척하고 이내 아담한 버스를 타구설랑 비행기 앞으로 갔는데, 오마나, 내 손톱만한 비행기가, 마치 장난감처럼 앞에 살짝 꼬리를 내리고 서 있지 않겠습니까? 헤헤 제일 싸구려 이스타 항공을 친구년이 예약을 했던 것입니다!

 

내부를 살펴본즉, 아하, 이것이 바로 유치원 셔틀 버스로구나, 딱 그것이로구나 할만큼의 아담 사이즈 비행기 내부는 완전 유치원 교실과 다름없었던 바, 꽃 그림, 동글동글한 뭉게구름 그림, 왕자 그림, 별 그림으로 온통 도배되어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히야, 그 유치찬란에 감탄하여 혀를 내두르는데 덜 자란 코스모스 같은 스튜어디스가 내오는 것은 주스, 아니면 물 뿐이라...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는 것을 한참 고민하는 체 하다가 쥬스, 하도 한 마디 내뱉었더니만 일회용 컵에 샛노란 주스 반 컵 남짓 따라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너무 우스워 마시다가 사래 들릴 뻔 했습니다!

하필 예약한 좌석이 날개 바로 옆이어서 맹숭맹숭 납짝한 철판 옆구리만 질리도록 쳐다보면서 한 시간을 날아가 제주 공항에 내렸읍지요. 오후 7시의 제주 공항은 약간 흐린 저녁나절.

 

제법 생의 때가 진득하게 붙어있는 친구 한 년이 줄줄이 늘어선 택시로 다가가 쇼부를 보고 컴온!

서귀포 어디어디 콘도까지 삼만 원에 달려가는데요, 해는 지고, 어둠의 자식들은 아직 저 멀리 있는 저녁나절의 제주 풍경이 아삼삼하게 다가오더구만요. 코끝도 상쾌해지는 그 어스름한 저녁 기운을 있는 힘을 다해 빨아들이고 심호흡을 하면서 제주를 가로지르는 길을 초고속으로 달렸더란 말입니다...

 

낯선 풍경은 칸나를 포함한 년들로 하여금 집을 떠났다, 기어이 떠났다 하는 감회를 일으켰고, 그것은 이내 환호성으로 변하여 제주토박이 기사님이 듣는 것도 개의치 않고, 조오타, 조오타를 질리지도 않고 연발하면서 그 시간을 즐겼던 것이지요.

 

이윽고 도달한 콘도, 쉰이 넘은 년들이 묵기에는 일단 콘도처럼 편한 곳이 없습디다.

가난하기 이를데없는 칸나야 이년들이 무슨 항공기를 예약하고 어디를 숙박업소로 삼았는지 관심도 없고, 걍 따라가는 형편인지라 콘도를 보고 약간 한숨이 나왔지만(콘도에서는 어떤 놈팡이를 만나 히히덕거릴 확률이 적다는 것에 대하여 절망하는 칸나, 그 내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약간 고생 쫌 했지요) 보잘것없는 짐을 부려놓고, 어디로 갈 것이냐, 무엇을 먹을 것이냐 고민할 것도 없이 걍 밖으로 뛰쳐나가 일단 눈앞에 보이는 번듯한 음식점으로 들어갔어라. 배가 무지하게 고팠거든요.

 

그곳에서 제주흑돼지 삼겹살을 놓고 일단 술 한 잔. (아참, 그곳에는 처음처럼은 없읍디다. 제주 산 순한 소주를 권하는데 맛에 대하여 불신이 가득한 년들은 차라리, 하면서 참이슬로 통일해 마셨습니다? 그리하여 각일병 뚝 딱! 가만 보아하니 손님들은 대개 콘도에서 원정 온 모양으로 제각기 즐거운 표정이, 보기에도 좋았더라. 아마 그들이 보기에도 년들 셋이 둘러앉아 줄담배 피우며 고기 굽고, 술 원샷 하는 모습이 꽤나 자유로워 보였겠지 싶기도 하구요.)

 

일단 발동 걸린 년들은 한라봉에 제주감귤에 또 뭐시기 뭐시기 안주거리를 하나 가득 쟁여 방으로 올라가는데 모두들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이는 여행의 첫 밤인지라 행복지수 이빠이 오른 상황.

제법 널찍한 콘도 거실에서 2차가 벌어졌습니다. 열 시 넘어서 시작된 2차는 장장 네 시간을 훌쩍 넘어서 새벽 2시 반이 넘어서야 끝이 났으니 이를 어쩌면 좋대요?

(게다가 술 취한 칸나, 어찌어찌하여 빈 소주병을 발로 차는 바람에 와장창, 깨친 소주 병 조각을 줍느라 한 밤중 난리도 아니었다는 말씀. 칸나야 뭐, 오마나, 오마나, 하면서 소리만 지르고 있었는데 년들, 시끄럽다, 치우지 않으려면 입이나 닥치고 있어라! 하고 호령하는 바람에 애꿎은 담배만 피우고 있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윽고 년들, 한 년은 더블 침대가 있는 방 하나를 차지하고, 칸나는 술 마시면 코를 무지막지하고 곤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년들에 의해 내침을 당해 쪽방에 홀로 자리를 펴고 눕고, 마지막 한 년은 알고 보니 갈 곳이 없어 거실에서 침대 밑으로, 침대 밑에서 거실로 밤새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면서 잠 한 숨 못 잤다고 합디다.

 

그래도 올레를 성실하게 할 것을 다짐한 칸나, 술 만땅 되어 자면서도 휴대폰 알람을 잘 조정해놓고 누웠는데, 참으로 아늑하고 한편은 왠지 서럽고, 슬프고, 아득하고, 가슴에 뭔가 꽉 치밀어 오르고, 울고도 싶은데 그만큼 술의 양이 안 받쳐 주는 것을 원망하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길게 통화하고 싶기도 하고, 시 한 편 줄줄 읊고 싶기고 하고, 허리 아래는 어쩐지 스멀거리고, 관자놀이 어디쯤엔가는 사금파리만한 고통이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그러면서도 어떻게 집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 나는지 히한하기도 했지만), 하여튼 오만가지 잡생각에 잠을 설쳤읍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와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하는가, 왜 와 있는가, 아니, 그런 생각을 왜 그때 꼭 해야 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거실 창을 열고 밖으로 나갔읍지요.

그곳에는 바다가 있고, 못생긴 야자나무도 꽤 늘어져 있고, 그리고 내 마음처럼 아득하고 시커먼 밤도 그윽하게 내려앉고 있는 저 편, 파도 소리가 제법 운치있게 들리는 베란다에서 휘청거리는 몸을 난간에 기대고 멀찌기 어딘가를 바라보았지 않았겠습니까?

 

무엇이 보였겠습니까? 헤~ 보이기는 뭘... 공중에 둥 떠다니는 칸나의 허상이 흑싸리처럼 -싸구려 허접데기 칸나!-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고, 쏴아 쏴아~ 제주 바다 파도소리만 내 귓전에서 맴돌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눈물 날 일이 있나... 술도 쫌 모자르고, 그리움도 약간 못 미치고, 글도, 사랑도, 삶도, 2%쯤 부족한 인생까지,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칸나 맨살에 진득하니 붙어서 속살거리질 않던가요.

“감수광”

뭔 뜻인고 하니, 가십니까, 랍니다...

 

 

자정 가까이 되자, 내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만 마시라는 신호가 왔다. 그 신호는 가슴이 뻐근해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알 수 없는 슬픔(고통이 동반된)이 핏줄을 타고 온몸을 흐르는 것을 느끼는데 특히 가슴께가(그것을 명치라고 하나?) 무척 아파온다. 한국 사람들은 그 어딘가에 한(恨)이 뭉쳐있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그런 것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년놈들과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 분을 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울었다. 나는 울면서도 지금 내가 왜 우는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분석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날은 분석을 포기했다.

집 앞에서 코를 팽, 풀고 아, 아, 소리 내면서 목을 가다듬고 씩씩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일찍도 오셨네.”

“딱 열두 시입니다. 저는 신데렐라!”

“하하하.”

남편이 웃었다. 신데렐라가 된 나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신데렐라는 아니었다. 눈자위를 누르고 담즙처럼 번지는 눈물을 막았다. 어쩐지 개운해지는 마음.

나는 눈물에도 카타르시스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대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동아리로 모여 열심히 공부하는 수강생들이 자습을 마치고, 내가 사는 동네까지 쳐들어왔다.

“선생님, 점심 같이 먹어요.”

맵기로 소문난 쭈꾸미 집으로 가니 일고, 여덟 명이 모여 앉았다가 반색을 한다.

메일로 보내준 회원 작품에 대하여 몇 가지 어드바이스를 해주면서 즐거운 대화.

“선생님, 참기름 그거 진짜인가 봐요. 정말 맛있었어요.”

“맛있게 먹으니 나는 좋지.”

뒤늦게 글 쓰는 맛을 알아가는 아줌마 부대를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워진다.

한 달 전, 종강파티를 하면서 수업을 들은 소감을 한 사람씩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녀들은 진지했다. 몇 몇 여인네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강의가 있는 날의 전날은 밤을 새운다는 여인도 있었다. 그들은 행복했던 목요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열심히 한만큼 실력도 부쩍 늘어 이제는 작품을 보는 안목도 평론가 수준이 된 그녀들은 할 말이 무척 많은 모양이었다.

“매일 수다만 떨고, 집안 살림 이야기, 남편, 자식, 돈 걱정에서 벗어나 오로지 문학만을 이야기하는 그 시간은 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어요.”

그녀들은 지금도 부쩍 부쩍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뿌듯한 심정이었다. 마치 내 자식처럼 애정이 가는 사람들!

수강생 중 연극을 하는 사십 대 아줌마도 있었는데 한 때 연극에 빠져있던 적이 있는 나로서는 궁금한 점이 많아 계속 질문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라는 구분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서로에게 배우는 시간이었다.

2월부터 시작되는 봄 강의도 내가 다시 맡게 된 것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중년 여인들을 보노라니 새삼 가슴이 뿌듯해왔다.

나에게는 공식으로 인정한 제자가 다섯 명 있다.

물론 모두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메일로 글을 보내고 애써 시간을 만들어서 만나 눈물을 쏙 빠지게 하는 나의 날카로운 비평을 듣기를 소망했다.

내가 말했다.

“우리 올해 빡세게 공부해서 연말 쯤 동인지라도 한 권 내는 방향으로 합시다.”

그녀들의 안색이 환해졌다.

나는 아줌마에 머물렀던 그녀들에게 작가, 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덧붙여 주고 자부심을 불어넣어주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봉사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사명감이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에게 밥 사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친구 남편과 또 다시 저녁.

물론 친구 부부와 만나서 밥만 먹은 적은 단 한 번도(이십년이 넘는 길고 긴 우정의 기간 동안) 없다.

“밥 먹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즉,

“술 마시자!” 와 동의어이다^^

친구 부부와 마주 앉아 삼겹살 코스 요리를 먹었다. 삼겹살, 술, 삼겹살, 술, 삼겹살, 술, 이렇게 이어지다가 잔치 국수 한 사발로 마무리 하는 우리 나름대로의 코스다.

술 반잔이면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친구가 모처럼 몇 잔 술술 넘긴다.

“어라, 주당 남편을 만나더니 업그레이드 엄청 됐넹.”

내가 친구를 놀렸더니 친구가 얼른 맞받아쳤다.

“헤, 주당 친구를 만나서 내가 이렇게 버린 몸이 되었어야.”

“서로에게 받은 은혜가 많소이다.”

친구 남편도 슬쩍 거든다. 하하하. 모두 웃었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기분이 업이 된 두 부부가 어깨동무를 하고 모처럼 노래방을 갔다. 남편이 노래방 값이라도 내려고 주머니를 뒤졌더니 친구 남편이 눈을 부릅뜬다.

“내비 둬!”

덩치 크고 목소리 큰 기세에 눌러 남편이 자라목을 하면서 뒤로 뺐다.

원래 노래방 체질이 아닌 사람들이라 십팔번도 몇 곡 되지 않아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데도 왜 그렇게 신이 나고 재미있는지.

밤이 이슥해지도록 놀다 집으로 오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언젠가는 이 원수를 꼭 갚을 날이 올 것이다!”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멘.”

팔짱을 끼고 남편에게 기댔다.

“요즘 우리 남편, 아멘을 무척 잘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복을 많이 받겠네.”

“아멘.”

 

 

이마리아 권사님, 사랑했어요

 

 

 

교회에서 또 문자가 왔다. 장례식을 알리는 문자였다.

고인의 이름을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가 4년 동안 말씀을 인도했던 속도 할머니의 부음이었던 것이다.

향년 95세이니 호상이긴 했다. 하지만 그 할머니 권사님은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던 분이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이런 모습의 천사, 저런 모습의 천사를 많이 보게 된다.

처음부터 천사는 아니었을 그 분들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천사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그 길고 긴 진화(?)과정을 나는 많이도 보았다.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은혜다.

그 많은 천사들이 있지만, 나에게는 나이든 어르신들의 모습이 천사로 보일 때가 많았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으로 목사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옛날 목회자들은 이 맛에 목회하는 맛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맹목적으로 교회에 헌신하던 어르신들!

이번에 소천하신 노 권사님도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리러 가면(권사님은 신혼집처럼 깨끗하고 아름답고 아담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계셨다) 식탁에는 언제나 분홍 보자기로 싸 놓은 쟁반이 있었다. 갖가지 과일을 풍성하게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집에서 음식을 차리지는 못하시지만 좋은 식당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맛난 것을 사주셨다. 그리고는 그 분홍 보자기를 푸는 것이다. 마법의 보자기 같은 분홍 보자기 매듭을 풀면, 귀해서 잘 먹지 않는 갖가지 과일이 보석처럼 쏟아져 나오곤 했다.

할머니 권사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말씀을 하실 땐 우리의 손을 꼭 잡으시는데 사랑이 절절 흐르는 것을 누구라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권사님, 무엇이 그렇게 감사해요?”

어느 날 짓궂게 내가 여쭈었더니 권사님이 다시 두 손을 꼭 잡았다.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손녀 뻘보다도 어린 우리에게 존대어를 사용하셨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힘 있게 기도하시는 할머니 권사님의 기도는 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곤 했다. 할머니 권사님의 기도로 예배를 시작하면 그 예배는 진짜 은혜의 도가니였다. 할머니 권사님께서 기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잠시 묵상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천국에서 권사님 만날 수 있게 해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내가 만난 교회의 여러 천사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었던 천사가 하늘로 올라가셨다.

갑자기 할머니 권사님의 기도 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졌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로 시작하는 그 기도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니!

 

 

50년대 초반부터 50년 넘게 우리 교회에 출석하신 권사님 장례식에는 많은 교인들이 참석했다. 조가(弔歌) 중창단은 한결같은 믿음으로 승리하신 권사님에 대한 조가로 ‘의의 면류관’을 준비해서 불렀는데 마침 목사님의 설교도 ‘의의 면류관’이었다. 말씀과 찬양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장례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어서 많은 장례식을 참석하지만 ‘의의 면류관’을 힘차게 부를 수 있는 장례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 권사님의 장례식은 달랐다. 참석한 교인 모두, 오래 동안 권사님을 지켜보았던 원로 목사님도, 그리고 가족들도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면류관 받으리 저 요단강 건너 우리 싸움 마치는 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나의 장례식에 면류관 받으리, 하는 찬송은 부를 것 같지 않지만 나에게도 불러줄 찬송가는 있었다. 장례식 마다 말미에 부르는 바로 그 찬송 말이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떠나라, 델마와 루이스처럼!

 

 

 

그리하여 부족한 나는 일박이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더 부족하게 되어 돌아올 것이 분명한 친구들과의 여행을.

이틀을 오부지게 놀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이 반 토막을 내버리셨다.

할머니 권사님의 발인예배 때문에 정오가 되어서야 출발하게 되었고, 다음 날 출판팀 편집회의를 주관해야 하기 때문에 3시까지 교회로 뛰어가야 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만 하루, 24시간에 불과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하루 이십 사 시간이 그렇게 길수도 있었다.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점심과 함께 술자리가 시작되어서 무려 밤 두시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아침, 퉁퉁 부운 얼굴로(대체 왜 그렇게 부었는지) 일어나 환한 햇살이 그득한 펜션의 베란다로 나갔다.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눈앞에 아삼삼했다. 이월 날씨답지 않게 따스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새벽 담배 한 대 입에 물었다.

그렇게도 몸에 나쁘다고 하는, 빈속의 새벽 담배는 마약처럼 달콤하고 꿀맛이었다. 그리고는 또 하나님께 화살기도 올렸다.

“제가 앞으로는 담배도 더욱 많이 절제할 테니 제발 끊으라고 하지만 말아 주세요. 물론 들어주시고 안 들어주시고는 하나님 마음이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순수한 기호품으로 인정하시는 것만큼 아주 절약적인 흡연문화를 누리겠나이다.”

어제 술 많이 마셨다고 삐치셨는지 하나님은 입을 꼭 다물고 계시다. 아니면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듣지 말아야 하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아이고 하나님!

나는 얼른 담배를 껐다.

 

아침 해장으로 누룽지를 푹 끓여 땀을 흘리면서 먹었다. 속이 시원해졌다.

열 세 시간 동안 이어진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끝이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나는 고독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 영원히 버리지 못할 나의 사치, 고독!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커다란 호수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호수를 끼고 만들어진 산책로는 환상 그 자체였다.

중간 즈음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예불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주위 풍경과 너무 잘 어울리는 목탁소리도!

친구가 말했다.

“앗, 11시네. 절에서도 11시에 예불 드리나보다.”

“교회에서도 예배드릴 시간이구나. 우리도 예배드리자.”

“그렇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걷는 것도 예배지!”

친구들이 합창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친구 하나가 나를 보았다.

“어때, 짤막하게 설교도 하시면 좋겠는데?”

그래서 나는 호숫가를 걸으면서 친구들에게 설교했다.

“오늘의 말씀 제목은 지금 이 시간을 누려라, 입니다. 과거는 흘러갔으니 후회해도 소용없고, 그리워해도 더더군다나 소용없는 일이지요? 내일 일은 알 수 없으니 그것은 아무리 계획하거나 꿈을 그려도 내 소관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마음 아니겠습니까?

지난 오십 평생을 한 번 보시지요. 그렇게 많은 계획을 세우고 살았지만 어디 뜻대로 됩디까? 결국 우리는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는 손오공처럼 하나님 손아귀에 꽉 붙잡혀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안에 내 욕심, 내 자아 다 내던지고 알몸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겠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소복하게 받아, 기쁘고 즐겁게 살자 이겁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진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셨으니 우리는 비스듬히 누워 하나님이 차려주시는 진수성찬 밥상 받고 신나게 먹어치우면 되는 겁니다. 이럴 때 빠질 수 없는 것, 바로 감사기도지요, 어쩌구 저쩌구……”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은 짤막한 설교를 했는데 친구를 진지하게 예배드렸다. 그녀들의 소감.

“아이고 오늘은 아침부터 은혜 만땅이다!”

한 시간 동안 호숫가를 걸으면서 술 담배에 찌들었던 어제와는 질이 다른 상쾌한 시간을 누렸다.

 

나 때문에 일 년에 겨우 두 차례 있는 일박이일 여행이 반 토막 난 것이 친구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워쩌면 좋으냐. 편집회의만 아니라면 물 좋은 곳에 들러 온천도 하고, 명승지 관광도 할 텐데 그냥 가야 하다니, 정말 미안스럽넹.”

“오늘만 날이냐. 또 기회를 만들어서 여기저기 다니자.”

한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이상도 하다. 우리끼리 오면 이렇게도 편하고 자유로운데 어째 남편을 달고 오면 그렇게도 불편한지 모르겠다.”

“그러게. 젊었을 때는 그렇게 밖으로 돌던 남편들이 나이를 먹더니 엄마 치마꼬리 붙잡는 애처럼 마누라 얼굴만 쳐다보고 왜 그렇게 찰싹 달라붙는지!”

“이번에도 같이 가자고 안 그러나, 하면서 계속 눈치만 보더라니깐.”

“그럼 가까운 시일 안에 남편들을 모시고 어디 가자. 위로 차원에서.”

 

오면서 <몸에 대한 예의>에 대하여 생각했다.

절제되지 않은 음주가무는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라고.

반성모드로 진입하여 진지하게 묵상하는데 하나님의 속삭임.

 

반성을 했으면 실행에 옮겨야지?

 

앗, 듣고 계셨네요, 하나님!

네, 2월을 기대합니다.

체인지! 아이 캔 두잇!

반드시 절제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겠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더욱 본드처럼 달라붙는 남편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오는 길에 순대국으로 진하게 해장을 하고 집에 잠깐 들러 짐 보따리만 풀어놓은 후, 뛰다시피하며 교회로 달려갔다. 전철 안에서 부지런히 회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생각했다.

하나님도 요상하셔라. 어차피 시간 내어 놀러 가는데 좀 편하게 지내도록 시간을 만들어주시지 않고, 왜 이렇게 꽉 조이신다냐. 이왕 쓰시는 김에 팍 쓰시지않구! 하나님도 심통을 부리시는 것 같네.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 회의에 참석했다. 주일 한 번 빼먹는 기분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해서 이번 기회에 좀 알까 했더니만 기어이 교회 문전을 밟게 만드시는 하나님!

편집회의를 진행하면서 열심히 적고 의논하고 질문하는 편집위원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았다. 정말 귀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는 꼭두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교회 안에서 뺑뱅이 돌며 이런 일, 저런 일 감당했을 것이다. 열성분자들이어서 주일은 대개 교회에서 보내는 그들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맡은 일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하나님 저들에게 복 많이 내려주세욧!

발간 일정에 맞추어 스케줄을 다시 조정하고, 미비한 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보완하느라 꼬박 두 시간 동안 회의가 이어졌다.

 

교회를 나서니 어느새 어스름했다.

교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편집위원들과 악수하고 교회 마당을 나서는데 마음이 홀가분했다. 호숫가를 돌면서 자연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예배요, 독경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눈 것도 예배요, 늦게나마 교회에 와서 회의를 진행한 것도 예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삶 자체가 예배인 사람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