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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교회를 좋아한다

1월 둘째 주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3.

제 2부. 1월 둘째 주

 

 

 

절제가 필요해요, 하나님!

 

 

 

저녁마다 두꺼운 파커입고 머플러매고 집 주변의 천변을 한 시간 신나게 걸으면서 생각한다. 새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날마다 늘 새로운 마음이면 좋겠지만 희노애락애오욕에 찌들어 사는 범인들로서는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럴 때 새해가 많은 도움을 준다.

좋아, 이제부터는 새롭게 한 번 살아보는 거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잖아!

그렇게 다짐하면서 작심삼일이 될망정 새롭게 결단도 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새해부터 한 시간씩 걷기를 통해 체지방을 줄이는 것과 동시에 식탐도 조절해서 절제된 생활을 하려는 계획이 아직까지는 잘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술 줄이고 담배 줄이고 음식 섭취 줄이고, 운동하고! ‘건강한 몸만들기’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야밤에 산책을 나가는 또 하나의 이유도 간과할 수 없다. 산책 후, 집에 들어오기 전, 집 옆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 하나 꼬나무는 것이다.

집에서까지 담배를 피우면 도저히 절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속으로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므로 산책하기 싫을 때도 집에 들어오기 전, 담배 한 대 속 시원히 피워보고 싶은 욕망이 사무치는 바람에, 추운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부는 천변 산책을 한 번도 거르지 못하는 것이다.

한 바퀴 코스는 대략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운동장 뱅뱅 돌 때처럼 지루하지도 않고, 기분은 상쾌하다. 워낙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해서 과연 내가 매일 할 수 있을까 정했지만 아직까지는 무난하게 견디고 있는 중이다.

한 바퀴를 거의 돌아 집 근처에 오게 되면 그때부터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진다. 오늘도 나를 이기고 운동을 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저기만 가면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다는 것이 나를 감격시키는 것이다.

모르겠다, 하나님이 또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셔서 다시 담배를 끊게 할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시간을 즐기면서, 절대로 도에 지나치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또 한다.

 

그것과 더불어 절제하는 것이 음악이다.

나는 거의 언제나 음악을 들었다. 전철에나, 성경 쓸 때나, 산책할 때는 물론이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음악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음악도 마약과 같아서 듣지 않으면 집중도 되지 않고, 음악 하나하나에 실핏줄처럼 감성이 연결되어 있어서 끝없이 마음이 출렁거리는 경험을 많이 했다.

그것은 글쓰기에는 좋기도 하지만 한 편, 절제되지 않음으로 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감성만 누리게 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새해 들어 나는 휴대폰의 이어폰을 콘솔 속에 집어넣어버렸다. 가방에 넣고 다니면 자꾸 귀에 꽂고 음악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 시간의 산책도 음악 없이 온전히 생각만 하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무미건조하게도 느껴졌지만 이내 익숙하게 되자, 기도도 많이 할 수 있고, 하루의 반성, 점검, 모든 생각이 음악에 구애받지 않고, 전개되었다.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제인가는 다시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겠지만 중독 현상처럼 듣지는 않을 결심이다.

 

산책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뱉는 단어가 있다.

“주님~”

그것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랑의 고백이었다. 무엇인가 생각의 결론에 이르렀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가슴 아픈 어떤 일을 기억할 때, 그 모든 것을 잊게 해달라는 간구의 마음으로, 시도 때도 없이 나는 주님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실은 산책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홀로 길을 걸으면서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이 나를 보시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등등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돌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이 경이롭다. 산책을 나설 때는 언제 한 시간이 다 가나, 언제 저 한 바퀴를 다 도나, 하는데, 생각에 빠져 기도하면서 걷다가 문득 보면 축지법을 쓴 것처럼 가볍게 한 바퀴를 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시간이란 얼마나 오묘한 시간인가. 예배드리는 시간도 대략 한 시간인데 그 수많은 의식을 치루는 한 시간이 산책할 때는 이렇게 짧게 느껴지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덧붙여 말한다면 음식에도 절제하게 되었다. 맛있는 것을 보면 마력에 끌린 듯이 탐닉했던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원하면서 먹게 된 것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식탁을 대하면서 계속 속으로 주님, 주님을 외쳤다.

나의 힘으로는 식탐을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그것에 대하여 초연할 마음을 주신다는 확신에서였다. 과연, 하나님은 노력하는 나의 마음을 긍휼히 보셨는지 새해 들어서는 그다지 음식에 탐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예전 교회 선배 오빠가 선언한 적이 있다.

“여자가 60킬로가 넘으면 여자가 아니야, 그건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해. ‘가축’이라고!”

아이구, 나는 작년, ‘가축’으로 살아온 세월이 반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절제, 절제를 부르짖는 요즘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체지방도 좀 줄어들고, 해서 뱃살도 많이 들어갔고, 더불어 가축의 존재에서 다시 여자가 되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성령의 열매에서의 절제가 왜 맨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가 하면 그것은 제일 어렵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그 말은 정말 인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어렵고 힘든 길을 한 발짝씩 한 발짝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그저 감사드리옵나이다.

 

드디어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화장품 가게를 들어갈 때면, 기천 원짜리 하나 사는데도 심혈을 기울여 계산하고 또 계산하지만 책을 주문할 때는 호기로워지는 것이 참 이상한 일이다. 아무튼 무려 11권의 책이 도착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책이 다섯 권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가장 만만한 책 한 권을 펼쳤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에세이다. 나는 수필 강사이긴 하지만 에세이 류를 극도로 혐오하는 편이다. 내가 사서 읽은 에세이 물중에서 돈이 아깝지 않다고 느낀 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도 남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에세이는 다르다. 그것은 대단히 난해하기는 하지만 매력이 철철 넘쳐 나로 하여금 맥을 못 쓰고 그녀의 주장에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아주 신비한 책이다.

나는 종종 그녀의 책을 읽고 또 읽고는 하는데 나보다 몇 살이나 어린 그녀를 나는 진심으로 존경하기까지 한다.

 

그녀는 진정한 작가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짝퉁 중에서도 가장 하급 짝퉁이다. 루이비똥 가방 짝퉁을 사려고 해도 A급은 수십만 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마구 만들어낸 저급 짝퉁은 시장바닥 리어카에서 만원, 만원 소리 질러도 잘 안사는 수준이 아니런가.

나의 작가적 수준은 딱 그거다. 만원, 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단 한 사람도 사주지 않을. 이 말은 진심어린 고백이기도 하다. 언제인가 교인 한 분이 내 소설이 보고 싶다고 하시기에 내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볼 것도 없는 쓰레기여요. 내 소설 읽을 시간에 성경 한 구절 더 읽으시는 게 훨 낫습니당.”

 

지나친 자기비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인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녀의 에세이를 읽는 순간은 나의 오감이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느낀다.

충격과 더불어 어쩔 수 없는 긍정이 뒤따르는 기묘한 시간들. 나로 하여금 나의 내면에 숨어있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감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그녀의 말을 듣노라면 나는 오싹해지기도 한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녀의 선언들은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 죽는 사람, 병든 사람과 함께

 

 

 

책을 읽는데 교회에서 문자가 왔다. 발인예배를 알리는 문자였다.

나는 발인예배를 가는 중, 전철 안에서 그 책을 읽었다. 한 번 책을 들면 끝장을 봐야 하는 내 성질도 있지만 그 책은 정말 중간에서 손을 떼기 어려웠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전철은 공공 교통기관이니만큼 나 혼자서만 탄 것이 아니다. 옆 사람, 앞 사람, 서 있는 사람의 주시 속에서 글이 있는 페이지도 넘기도 사진이 있는 페이지도 넘겨야했다. 그 에세이는 여자의 몸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중간 중간 심심치 않게 흑백 사진이 글에 대한 보완설명의 의미로 삽입되어 있는데 그 사진이 문제였다.

사진은 포르노에 가까운 여자의 누드사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 그랬다. 흑백사진이어서 더욱 포르노 느낌이 짙었다. 홀딱 벗은 여자들의, 어느 면에서는 다분히 쾌락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그로테스크한 여자의 벗은 몸 사진이 몇 장 넘기면 전면을 다 할애하여 큼지막하게 나타날 때, 나는 자유롭게 사진을 볼 수 없었다. 타인의 시선이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여자의 벗은 몸 사진을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의 벗은 몸 사진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겠지만(그래서 나는 좀 다행이었다고 안도하고 있다) 그래도 내 방에서 나 혼자 보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 이래서 한국에서 여자는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도서관에서 담배 피울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매일 아침 도서관에 가서 작업을 하고 오후 늦게 집으로 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직업이므로 도서관은 엄밀하게 말한다면 나의 일터다. 그곳에서 나는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대략 두세 번 정도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는 흡연구역에 가서 담배를 피운다. 도서관 전체가 금연구역이기 때문에 도서관 측에서는 한적한 곳에 스탠드 재떨이와 벤치를 마련해 놓아 흡연구역을 정해 놓았으므로 딱히 다른 곳을 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이 든 아줌마가, 쌩얼에 오직 방한복의 의미로만 주워 입은 솜바지, 파커 차림으로 바람 부는 흡연구역에 서서(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을 줄이기 위하여 나는 항상 연못가를 주시하면서 다른 흡연자들에게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담배 피우는 나를, 많은 젊은 남자들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보고 밥맛이야, 하고 생각할지, 뭐야, 아줌마가 왕 재수네, 할지, 그네들의 생각의 자유에 대하여 뭐라고 할 마음은 전혀 없지만 역시 운신의 폭이 좁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 딴에는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화장실에서 반드시 가그린을 한 후 자리에 앉고, 흡연구역 주변에 견학 나온 유치원생들이라도 바글거리는 날이면, 어린아이들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에 충격이 가는 것을 원치 않는 갸륵한 마음과, 그네들의 여린 뱃속에 질 나쁜 타르를 흡입하게 할 것에 대한 진정한 배려로, 저만큼 떨어진 먼 흡연구역까지 빙 돌아가서 담배를 피우는 성의를 보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눈치다.

아무튼 힘들게 산다, 나는.

 

책 속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 주목했다.

 

...비록 은밀한 감동에 떨었던 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감동을 우리 인생의 전면에 내세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왜 언제나 반드시 완전무결해야 하는가. 또는 완전무결을 지향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는 자유롭게 비위생적이 되거나 비상식적이 되어도 된다.

그것은 완벽한 기호의 문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털어놓고 용서를 바랄 필요도 없다.

혹 그것 때문에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대, 고통 하나 없는 완전한 인생을 진정 원하는가?

상처 없는 관계를 원하는가?

하나의 비밀도 가지지 않기를 원하는가?

죽을 때까지 마음 아플 일이 없기를 바라는가?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인격을 진정 원하는가?

진정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고통 하나 없는 완전한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

나에게 고통은 분신과 같다. 고통은 고통과 함께 희열 섞인 쾌락을 동반한다. 나는 이 맛을 포기할 수 없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고, 그렇게 글을 쓰는 자체가 고통스럽고, 그 고통은 나에게 희열 섞인 쾌락을 선물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고통스러워지기 위하여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이런 글을 읽으면 나는 나의 몸과 정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감각이 살아나고, 감성이 노래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사람의 감성 속에서 겨우 몇 가지만을, 어떻게 보면 한두 가지 정도에 불과한 그런 양질(?)의 감성만을 고집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감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닐까?

나는 나의 글이 숨겨져 있던 교인들의 감성을 깨우는데 조금이라고 일조를 하기 바란다.

 

내가 맡은 교회 일 중에서 제일 영양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조가(弔歌) 중창단이다.

교회에서 장례가 나면 장례위원회 소속인 조가 중창단이 반드시 출두(^^)한다.

발인예배나 여의치 않을 때는 입관예배 시 조가를 부르는데 실력은 뭐라 말하기 쑥스럽지만 그 성의와 열심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보통 장례식은 6시, 7시 등 꼭두새벽에 진행되는데 그 발인예배에 맞추어 나오려면 대체 언제 일어나 언제 준비하고 언제 오는지 계산이 막막해 질 것이다. 하여튼 그 조가 중창단이 올해 십 주년이 되었으니(한 해 평균 20여 차례의 장례가 난다) 아닌 말로 이백 번 이상 장례식을 간 것이다.

발인예배만 가는 것이 아니라 외곽에 위치한 선산, 장지, 아니면 요즘 대세인 화장장까지 함께 동행 하는 것이므로 온전히 하루를 다 바친다고 할 수 있다.

이백 번 이상의 장례식을 했어도 내가 정작 아는 사람의 장례식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교회에 교인이 많다보니 얼굴만 겨우 알던 사람, 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타인의 장례식이라고 할까. 하지만 망자의 관이 로전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하관하는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하면서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귀중한 시간이 된다. 욕심에 이끌려 정신없이 다니다가도 장례식 한 번 갔다 오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것 같던 붕 뜬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다.

교회에도 여러 봉사가 있지만 장례위원회에서 속한 일은 정말 귀한 일인 것 같다. 더구나 연줄이나 친지나 관계로 얽힌 사람의 장례가 아니라 순수한 타인의 장례에 참여하여 그들과 애통함을 나누고, 슬픔을 위로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귀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번 장례식에서 아내를 잃고 슬퍼하는 권사님의 얼굴을 보니 한 번도 말을 나눈 적은 없지만 눈에 익은 분이었다. 아주 초라하고 볼품없어서 어찌 보면 혹시 홈리스가 아닐까, 할 정도로 (없어)보이는 분인데 이번에 돌아가신 아내 역시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

장례를 집례하는 담임 목사님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힘든 이생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리는 천국의 삶을 믿는다, 는 것이다. 장례식에서의 말씀은 정말 귀에 쏙쏙 들어온다. 하지만 나는 좀 힘이 빠졌다.

 

내가 몇 년 동안 인도했던 속도원 중에 일흔이 넘으신 권사님이 계셨다. 참혹하리만큼 가난했고 그 외의 갖가지 고난으로 꽉 차 있는 일생을 사셨고, 계속 그렇게 힘들게 사시는 분이다. 옆에서 몇 년 지켜보았는데 고난의 종류와 양과 진행시간에 기가 딱 막힐 정도였다. 고난과 어려움, 질병, 게다가 빈곤의 극치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앞으로도 그것을 벗어나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분인데 문제는 그분에게 슬픔과 고난만 있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다는 말이다.

찌든 얼굴, 늘 눈물짓는 사연들, 도저히 헤어 나올 길 없는 피폐한 삶, 이런 삶으로 일흔 해를 살아온 그 권사님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면 틀린 말이기도 하다. 요는, ‘복’의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내게 복이라’라는 말씀이나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에서 말하고 있는 복을 나는 믿는다.

들어오거나 나가거나 한 소쿠리씩 복을 받는, 신명기에서의 복은 어쩐지 기복적인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에서 건강한 사람, 돈 많은 사람, 그래서 잘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마음이) 가난한자, 애통한자, 온유한 자 등등 거의 마음 속의 상태를 말씀하셨다. 나에게 소소한 지극히 개인적인 유익이 있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는 말은 알아듣겠다.

하지만 의지박약하고, 어렵고 힘든 삶만 살아서 죽을 때까지 초막에서 궁색하게 사는 사람에게 -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는 -정신적인 부요를 누리게 하려고 예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좀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될 일인가.

하나님이 주신 분복대로 사는 것을.

하지만 못 살아도 좋으니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교회에서 당당하다. 나는 목회자나 장로나 그 밖의 높으신 어른들에게 역시 당당하다. 그 분들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 나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인데 구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내가 가끔 예의가 없고, 좀 날뛰어서 눈에 거슬리기는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그 분들과 나에 대한 상하관계나 종속관계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이다.

직분, 성별, 학력, 재력, 외모, 교양 상태가 다르다는 것이 신앙의 차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얼굴에 온유함이 있고, 예의 바르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다. 아무리 보아도 복 없어 보이는 사람(자식이 사고 당했다, 몸은 무지하게 아프다, 남편은 실직했다, 집은 사기로 넘어갔다, 학력도 없고, 안력도 별 볼일 없으며, 목소리마저 시원찮고, 성질도 좀 그렇다)일지라도 내면에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모든 것에 풍요로운 자가 되기는 정녕 어려운 것일까?

실은 그래야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닐까!

 

장례식에 다녀오는데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일 년 전, 난소 말기암으로 수술한 친구인데 이번 검사에서 재발되었다는 결과를 받았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발견 당시부터 수술까지 그리고 그 어려운 항암치료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본 나로서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그러니 본인이야 오죽하겠는가. 한 달 마다 혹은 두 달마다 검사를 할 때마다 가슴조리면서 일 년을 잘 버텼는데 이번 검사에서는 간으로 전이가 된 것이 발견되었다는 것.

열흘 후 다시 수술하기로 했다는 말에 정말 나의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친구는 애써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두려움과 떨림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심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옆에서 친구의 투병생활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 말에 수긍하지 못한다. 육체의 고통은 정신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친구는 일 년 동안 거의 기도의 힘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감사해, 감사해. 그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번에도 통화 끝에 친구는 말했다.

“수술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해. 다행이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마디였다.

“열심히 기도해 줄게.”

 

 

책, 문학, 문우와 즐겨라

 

 

집에 오니 책이 와 와 있었다. 자그마치 이만 원짜리 책이다. 친구가 책을 읽다가 흥분해서 나에게 전화까지 했던 책은 결국 친구가 주문해서 나에게 선물했다.

우리는 책 교환을 잘 한다. 하지만 주로 친구가 나에게 선물한 책이 그 몇 배는 되는 것 같다. 친구가 선물한 책(어쩌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그 책을 신앙책이 아니라고 잘라 말할지도 모른다)에서도 나는 감성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친구와 나는 사도신경 대신 이 글을 외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불경스러운(과연 그 생각이 불경스러운 생각일까?) 생각도 했다.

그 시를 읽을 때 친구와 나는 똑같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깊은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우리는 목이 메어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내 평생에도 그런 좋은 시, 한 구절 쓸 수 만 있다면!

우리는 그 시를 프린트해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읽기로 약속했다.

 

예수님

 

사랑하고 싶은 님

높이고 싶은 님

따르고 싶은 님

 

님을 만나 기쁨을 알았고

님을 만나 참나를 알았고

님을 만나 하느님을 알았고

 

님이 아픔을 잊게 하였고

님이 슬픔을 이기게 하였고

님이 죽음을 없이 하였고

 

머리에 이고 싶은 님

가슴에 품고 싶은 님

마음에 받들고 싶은 님

 

그분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수에 대한 사랑은 알겠다. 그냥 입에 발린 사랑이 아니라 온몸과 마음으로 체험된 살아있는 예수의 모습을 그 책에서 볼 수 있었다.

 

친구와 나는 한 때 도올의 요한복음강해를 서로 교환해 읽으면서 기가 막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세간, 특히 종교계에서 도올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에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도올의 책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다.

그 두꺼운 책이 어쩌면 그처럼 입에 짝짝 달라붙을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 책꽂이에는 도올의 ‘여자란 무엇인가’ 와 ‘새춘향뎐’, 청소년을 위한 ‘철학 강의’ 등, 그 밖의 여러 책이 있는데 이 모든 책이 편협했던 나의 영역을 넓혀주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고마워요, 도올!

 

저녁, 문학 카페 번개가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돌연히 만나는 ‘번개’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번 모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좀 변했다. 나는 지금 절제된 삶을 추구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처럼 버선발로 뛰어나가 술추렴하면서 문학 이야기에 몰입하기는 싫었다. 나는 나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이전처럼 번개나 각종 모임에 중독된 모습일 것인가, 아닌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좀 이성적으로 관망할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 내 자신이 궁금했다.

해서, 원래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습성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몇 사람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하니 모두들 좋아한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틈에 끼어 앉아 술잔을 나누었다. 술 한 잔 마셨더니 가슴이 쩌르르 해진다. 하지만 예전처럼 술맛이 당기지 않은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덕택이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 만약 이전처럼 한 잔 마시는데 술이 잘 받으면 내가 얼마나 힘들 것인가, 까지 배려한 하나님, 감사해요!

 

문우들과의 대화는 즐겁다. 마음에 맞는 몇몇 사람의 얼굴을 보니 역시 반갑고, 또 밤이라도 새울 것처럼 열의가 뻗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간에 일어섰다.

절제!, 하나님 절제!

나는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외웠다.

이제껏 모임에서 내가 먼저 일어선 적은 없었다. 끝장을 볼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옆 사람, 앞 사람 빈 잔 채워주는 것을 목숨 걸고 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소설 쓰는 후배에게 살짝 귀띔을 하고 나는 혼자 일어섰다. 집으로 오는 길은 쓸쓸하기도 했고, 내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다.

나에게 문학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작년 한 해 동안 손끝 하나 까딱 못하게 내 손목을 붙잡아매는 바람에 나는 성과물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무지막지한 고통이었다. 그때 날마다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 저보고 대체 어쩌라구요!”

역시 대답 없는 하나님, 내 속을 태우면서 약 올리는 하나님!

그렇지만 나는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추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언제라도 나에게 소설 쓸 능력을 주실 것이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이다. 예전에는 그것을 못견뎌하고 속을 끓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정을 안 넘기고 무사히 귀가한 나를 보고 남편이 놀라는 눈치다.

“일찍 왔네?”

나는 은근히 남편에게 으스댔다.

“정신을 좀 차렸지.”

 

생각난 김에 벤치에 대하여 쓴 수필 하나 곁들인다.

 

‘고통’의 현재 시각

 

집 주위에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공원 후미진 곳에 나의 ‘고통’이 있다. 나무도 아닌 것이 나무 흉내를 내느라 나무의 결을 본뜬 시멘트 벤치를 나는 그렇게 이름 지었다.

몇 년 전부터 일주일에도 몇 번씩 벤치를 찾았다. 주로 늦은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부터인가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어졌다. 그것은 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거리감 없이 평생 같이 지낸다는 ‘즐거움’이 어느 순간에는 ‘부담’으로 변질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인간은 팔을 휘둘러 닿을 수 있는 거리에 타인이 있으면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자신의 고유영역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공간을 내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자유, 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에게 가끔은 자신에게 침잠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활공간인 집을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고 싶고, 수십 년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그 접착(혹은 집착)의 부분에서 잠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었다. 어쩌면 평생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내 자신을 연애하는 시간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증오였는지도. 나에게 연애와 증오는 변별성이 없기는 하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면서부터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는, 혼자 있고 싶은 그 갈망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순간까지 갉아먹어, 나란히 앉아 TV를 보아도,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셔도 오로지 그 벤치 생각뿐이었다. 그렇다.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것이다.

 

호, 불호를 떠나 가족은, 가장 가깝게 존재하지만 가장 먼 존재이기도 하다. 운명을 신봉하는 나로서는 가족의 둘레(혹은 굴레)를 벗어날 생각은 추호도 해 본적이 없는데, 그들이 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극한 애정으로 감싸 안고 나름대로 이해하며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누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극의 자장이 서로를 완강하게 밀어내는 것처럼 나는 그들을 밀쳐내고 있었다.

 

밤, 뉴스가 시작되고, 세상의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집안에 꽉 차면, 인간들의 고달픈, 지루한, 어이없이 단순한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보노라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고 운동화를 찾아 신었다. 벤치에 앉아 있고 싶어서 밖으로 나간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산책을 빙자하여 늦은 밤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어느 땐 정말 천변을 한 바퀴 돌을 때도 있었고, 어느 땐 한 바퀴 돌 시간만큼 벤치에 앉아 있던 때도 있었다.

 

공원 건너편 길가에는 작은 상점이 줄지어 있는데 그 중 한 상점에는 행인들을 위해서 시계 전광판을 붙여놓았다. 몇 문장의 광고 문안이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현재 시각 몇 시 몇 분, 하면서 정지되고, 그 순간의 시각이 반짝거렸다.

 

‘현재’라니! 대체 삶에서, 그 시간에서 현재가 과연 존재한다는 말인가?

몇 분 뒤의 현재 시각과 또 다시 몇 분 뒤의 현재 시각을 바라보면서 나는 의아해했다.

일상의 시간들이 계속 ‘현재 시각’을 알리며 그것이 현재임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는데도, 나는 오로지 가족과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고 싶은 ‘욕망’-그것은 ‘고통’과 동의어이다-만 아우성치고 있는 뇌리 속에서 도무지 세상을, 삶을, 시간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전신을 사로잡는 이 시간도 ‘현재 시각’인가?

 

그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현재 시각에, 옆 상점에서는 누군가는 돼지갈비를 뜯고, 그 옆 상점에서는 꼬치에 맥주를 마시고, 길을 지나는 취객은 침을 뱉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주차된 차에서 헤비 패팅에 여념이 없는 연인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끊임없이 욕설을 지껄이는 틴에이저, 그들은 사물처럼 내 앞을 스쳐지나갔다. 타인이기에 관대해지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네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만약, 가족이라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어두운 밤, 그곳에 앉아 나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누렸다. 정말 누렸다, 라고밖에 할 수 없다. 짧게는 십여 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여까지 벤치에 앉아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나무들과 잡풀과 우중충한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는 한 것일까.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들을, 그 무생물들을, 그것들이 인간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안도하면서, 어느 때는 내가 인간인 것을 한없이 혐오하면서 흘려보냈던 시간들.

 

가끔 벤치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 무생물은 나의 신체와 접촉한 부분으로 교감할 수 없는 언어를 쏟아내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그 불통의 언어 역시 흘려보냈지만.

하긴, 석회와 모래와 물로 이루어진 형질을 고스란히 내보이지 못하고, 인간의 취향에 맞추어, 혹은 공원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나무 비스므레하게 존재하는 벤치 역시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이해한다, 고 나는 벤치에게 속삭일 때도 있었다. 벤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그것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고통.

 

요즘 들어서는 이른 아침에도 ‘고통’에게 간다. 새벽, 교회를 다녀오면서 그곳에 들르면 고통 혼자 고통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푸대 자루속에 쓸어 담겨 있는 낙엽이 고통의 허리춤에 기대어, 그들이 견디어 온 봄과 여름과 가을을 자분자분 들려주기도 한다.

길 건너 상점에서는 여전히 현재 시각을 성실하게 보여주고 있고, 현재 시각에 쫓긴 차들이 보닛위에 낙엽 몇 장을 매달고 속력을 내고 달리며, 현재 시각, 허리께가 두툼해져 버린 한 중년 여인네가 돌기가 많이 달린 훌라후프를 돌리고 있다.

현재 시각, 집 거실에서는 소파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신문을 읽으며 뉴스를 볼 것이다.

타인의 죽음과 타인의 성공과 좌절, 거짓말, 그네들의 지독한 연애담과 상처, 끝없는 불운과 허망한 희망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탐구하겠지.

 

나는 벤치에게 속삭인다. 네가 인간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인간의 일상은 아마 그런 것들의 조합일 것이다. 물론, 너 역시 어느 순간, 현재 시각에 쫓겨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인간들이 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 일말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과연 나의 동지가 될 수 있다. 원래 고통이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란다는 데서부터 시작되지 않디?

 

 

 

새해 두 번째 주일

 

 

 

날씨가 기가 막히게 추웠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무슨 심보에서인지 몰라도 주일은 바람 불거나 비가 오거나 괘씸할 정도로 춥다. 우리 믿음 시험하시는 것인가?

오후 예배 후, 회의가 있다고 하니까 남편이 뒤로 내뺐다.

자기 혼자 집에 오기 힘들다, 싫다는 것이다.

“같이 예배드리고 내가 당신, 집까지 모셔다 놓고 다시 가면 되잖아!”

“왜 그렇게까지 힘들게 해? 나 요 옆 교회 갈 테야.”

사실 오늘같이 추운 날은 중풍환자에게 매우 위험한 날이다. 게다 차도 없으니 버스 기다리면서, 전철 기다리면서, 교회까지 걸어가면서 그 매서운 바람을 다 맞아야 한다.

나는 머리를 한참 굴리다가 포기했다. 남편을 잘 꼬드겨서 같이 교회에 간다한들 아침 10시에서부터 오후 대여섯 시까지 그 오랜 시간을 변변히 쉴 곳도 없는 교회에서 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일단 쇼부를 보았다. 내가 회의가 있거나 교회일이 많아 오랫동안 교회에 머물러야 할 상황이 있는 주일에는 남편은 남편대로 동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두 손 꼭 잡고 같이 교회에 가기로 말이다.

교회가 집에서 멀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하고, 힘들다. 만약 우리 교회가 우리 아파트 단지 바로 뒤에 있는 저 교회라면 나는 신이 날 텐데 말이다. 그 동네 교회는 내가 오래 동안 새벽기도를 다녔는데 그곳에서도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 교회에서 바자회 하면 기웃거리면서 차돌박이 김치도 사오고, 40일 특별 새벽기도 하면 벽에 붙은 출석표에 스티커도 붙이고, 부흥회 하면 멀리 사는 내 친구들까지 초청해서 같이 은혜를 받곤 했으니 준 교인은 되는 셈이겠지.

 

예배는 즐겁다.

난 개인적으로 담임 목사님을 매우 존경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성실성 때문이다. 목사님은 설교 원고를 토씨 하나까지 모두 써서 작성한다. 교회 홈 페이지에 올라온 설교 원고를 보면 나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힌다. 가끔 설교 원고를 출력해서 뽑아보곤 하는데 그 양이 장난 아니다.

원고지로 6,70 매 가량이나 하는 설교를 매 주일 쓴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하다못해 다음 성경 본문을 읽겠습니다, 하는 말까지 고스란히 씌어 있는 설교문을 보노라면 목사님의 열정과 성실함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뿐인가, 오후 예배(우리 교회는 오후 예배 설교도 거의 담임 목사님이 맡아서 한다), 금요 철야 예배, 새벽 예배 모두 원고를 가지고 설교하신다.

글을 쓰는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가 막힌 필력이다. 그렇게 샘솟는 필력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도 목사님은 있는 열과 성을 다하여 설교했다. 나는 그러한 목사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광야에서, 산에서, 배를 타고, 장소를 마다하지 않고, 모인 사람들이 많거나 적거나, 제자들만 있거나 상관없이 저렇게 있는 힘을 다하여 설교했을 것이다.

목사님의 열정은 늘 나를 감동시킨다.

 

그에 반해 아쉬운 점은 교인들 모습이다. 삼사십 분 남짓한 설교를 집중하지 않는다. 졸기도 하고, 딴 생각도 하는 모양이고, 그리고 주보를 분석하기도 한다. 만약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한다면 도저히 다른 행동은 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하다못해 부모님이 말씀하실 때라도 무릎 꿇고 경청하지 않는가!

예배 자리에 참석은 모든 교인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리는 모습은 정녕 볼 수 없는 것인가? 어차피 교회에 왔는데……

작년 4월에 부임한 목사님은 매우 바쁘다. 나는 가끔 목사님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계산해 보곤 하는데 그 많은 일정을 다 소화해 내면서 대체 언제 그 많은 원고를 집필하는지 모르겠다.

목사님의 목회 방향이 나와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성실성과 진실함만으로도 나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목회자를 성직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직자는 -내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야 그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는 엄연히 직업이다. 직업란에 쓰지 않는가, 목사라고.

나는 목회자가 성스러운 직업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성스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을 성직자라고 할 때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성직자, 라는 꼬리표를 붙여 줄 수 있는 한국의 목회자가 몇이나 될까, 하고 나는 회의한다.

이런 면에서 가톨릭에서의 신부나 수녀는 성직자의 범위에 들 수 있다고 본다. 결혼도 포기하고, 그러므로 가족도, 자식도 포기하면서 전심으로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 신부다. (그래서인지 나는 신부들로 이루어진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이렇게 멋진 목회자 단체가 없는 것인가? 있다면 선전을 좀 해서라도 교인들에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이에 반해 교역자는 직업의 일종이다. 직업인 이상 그 직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기본인데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직업에 충실해 보이지 않는 교역자도 적다고 아니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돌려서 이야기해야 하는지 여러분은 아실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목회자는 사적으로 전화할 때는 꼭 공중전화를 사용한다고 했다.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비용은 교회의 헌금으로 충당되어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일 것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그리고 그것을 엄격하게 자신에게 적용하는 그 목회자는 내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선배다.

공무원도 관용차를 쓸 때는 공적인 일에만 쓰는 것처럼 목회자도 자신의 사적인 일 때문에 교회에서 제공한 차량을 쓸 때, 최소한 죄송하거나 감사한 마음이라도 가져야 할 것인데 그런 목회자 별로 보지 못했다.

 

헌금 시간에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언제나처럼 헌금기도를 하기 위하여 전 교인이 일어섰는데 단상에서 목사님이 제법 큰 비닐봉지를 들고 말씀하셨다.

“오늘 특별한 헌금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작년에 소천하신 모모 권사님의 아들 되시는 모모 집사님이 택시 운전을 하는데 작년 일 년치 수입을 모두 헌금하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교회에 잘 나오시지 않는 분인데 위하여 잘 나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이 보여주는 비닐봉지에는 각양각색의 봉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택시 운전! 일년 치 수입 전부 헌금!

교회에 잘 나오지도 않는(나오지 않는지 나오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 집사님이!

 

택시 운전을 한다니 그다지 풍족한 살림은 아닐 터. 그런데 어떻게 작년 수입 전부를 하나님께 헌금할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혹은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기에!

가만히 눈치를 보니 온 교인이 충격 먹은 것 같았다. 나도 뒤통수가 띵, 할 정도로 감격했다.

그렇게 헌금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반대하지 않았을까? 수입 전부를 헌금하면 대체 뭘 먹고 산단 말인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한 말이 있다.

“너의 돈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방향으로 유추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어느 정도는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는 마음이지 않던가.

예배 후에 몇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헌금 시간에 모두 가슴이 쩌르르 해졌다고 한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사건이었지만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렙돈 두 닢을 모두 헌금함에 넣은 과부처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말이다.

 

헌금 시간 후, 스리랑카 선교를 떠나는 청년부의 워십이 있었다. 스무 명이 더 되는 젊은 청년들이 드리는 몸 찬양, 자기 스스로 여비를 준비하여 그들의 헌신은 놀라웠다.

해외선교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들과 많이 다르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도 존중한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크기에 그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 주어 같은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일 것이다.

새해 들어 나에게 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회는 싱싱하다.

나는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우리 아들을 생각했다. 나는 내 아들이 저 청년들처럼 해외선교를 떠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빚에 빚을 내서라도 경비를 조달해 줄 텐데.

아들은 청년부의 예배 형태를 싫어했다. 드럼치고, 몸찬양하고, 시끄러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배의 형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참석하지 않는 아들도 문제지만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신나고, 떠들고, 시끄러운 예배 형태를 좋아하지는 않는구나 하고 느꼈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소원은 나의 아들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교회 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교회가기를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나에게 ‘왜 매일 교회에서 사느냐’고 물어보면, 일단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교회 가는 재미도 퍽 쏠쏠하답니다.”

 

그런데 올해는 변했다. 나는 주중에 교회에 가야하는 거의 모든 사역을 그만 두었다. 성가대를 그만두었으므로 성가 연습하러 가는 하루가 줄어들었고, 속회 인도자를 그만두었으므로 속회 공부를 위하여 교회 가야하는 하루가 또 줄어들었다.

영성의 발전을 위하여 금요 철야 기도회는 무척 가고 싶지만, 가족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잠시 주춤하고 있는 중이므로 경조사에 가야할 경우와 회의 때문에 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과 도서관에서 조신하게 일 년을 보낼 생각이다.

대신 가정예배와 신앙서적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으려고 마음먹었다.

 

오후 예배 후, 출판물 편집회의가 소집되었다. 어쨌든 나는 편집장이 되었으므로(아무리 지랄해도 주어진 일은 해야 했고, 일이 주어진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 아니런가)약 두 시간 동안 심도 있게 편집회의를 주관했다.

새로 모인 편집위원들의 경력도 화려하고 일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 조짐이 좋았다.

일단 편집 방향, 편집 회수, 당장 발간해야 할 출판물의 크기가 정해졌다.

내가 기획해 온 기획안이 그대로 통과되면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프로의식이 있어서인지 군말이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일할 맛이 난다고나 할까.

각자 역할을 분담시키고, 그리고 다음 회의 날까지 다 잡고, 의견 수렴하는데 걸린 시간은 딱 두 시간!

쓸데없이 회의만 자꾸 하지 말고 효율성 있게 하자는데 동의한 고로, 모든 의사수렴은 교회 홈 페이지에 있는 출판물 섹션을 이용하기로 했다.

편집회의를 주재하면서 모인 편집위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보고 있으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심과 교회 일에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가 역력했다. 정말 보물 같은 존재들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도 계셨지만 모두 순종하는 분위기였다.

사회에서였으면 월급 많이 주어야 할 텐데, 하나님이 대신 복 많이 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