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Let's agree to disagree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7. 11. 28.

(목요일 수필 모임에 가져갈 글을 주루룩 써보았다. 미진하지만 고칠 기분이 나지 않는다)





 

Let's agree to disagree

 

 

 

나는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누군가 이런 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 거의 언제나 나는 되묻는다. 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면 대부분 다들 그렇게 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그들의 대답에 놀란다. 아니, 다들 그렇게 한다는 것이 어떻게 이유가 될 수 있지? 그래서 나는 다시 그들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다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당신의 진정한 이유를 알고 싶어. 그렇게 (집요하게)되묻는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표정이 편안하지 않다.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 다들 그렇게 하는데? 하는 듯한 눈빛.

 

어릴 때부터 대부분다들그렇게 하는 것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으로 인해 사람들과(사람들의 생각과) 종종 부딪쳤다.

사람들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불필요한 허식처럼 느껴질 때,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도무지 당연하지 않을 때.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생각할 때 자신이 생각하여 결정하기 보다는 다수의 의견에 별무리 없이 따르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나는 그것이 의아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특권이기도 한 분별력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졌다.

 

어느 책에서인가 삶의 분별력은 상당한 교육과 학습의 대가로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책에서는 그러므로 분별력은 우수한 교육 및 학습에 장기간 투자할 여유가 있는 부르주아 계층만 향유할 수 있다는 독단을 펼쳤다. 어찌 보면 상당히 비위가 거슬리는 내용이지만 일면 수긍한다. 내가 이렇게 분별력 운운하면 너는 대체 뭐가 잘나서, 하는 반응이 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쏘왓(So what)? 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비위를 맞출 생각도 없다.

 

어차피 사람들은 다 각자의 가치관, 각자의 생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선택을 한 것도 그 사람의 결정인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그런 기류를 깨달았다. 대개의 경우 소수자의 입장에 선 나의 취향 내지는 가치관을 주장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대다수의 생각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움직이고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한, 더 나아가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나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과 상반되게 작동할 때 어느 쪽을 양보해야 할지도 결국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법을 어기면 벌금을 물거나 그에 준하는 벌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벌금이나 벌을 각오하고서라도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각자의 양심에 따라 판단할 자유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지만, 대개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나에게 별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은 좀 달랐던 것이다. 그들이 흥미 있어 하는 부분과 내가 흥미 있어 하는 부분도 좀 달랐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인터뷰 때문에 수십 년 만에 만난 선배는 나를 '굉장히 시리어스했던 소녀'라고 기억했다. 나는 표면적인 삶의 부분에 대하여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내가 마주보고 있는 그 사람의 내면이 궁금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너는 어느 때 슬펐니, 하고 묻고 싶었으나 그런 물음을 던질 기회는 매우 적었다. 그 슬픔의 상황을 같이 들여다보고 그 슬픔의 정령을 신부처럼 맞이하여 그의 슬픔 속에 같이 빠져들거나 슬픔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래서 더욱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갔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의 책읽기는 동화 속 주인공과의 대화로 시작하여 대화로 끝났다. 나는 알리바바에게 물었다. 너는 왜 40명의 도둑이 숨어있는 독에 뜨거운 기름을 들이부어 모두 죽게 했느냐고. 그렇게 한꺼번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너무 나쁜 짓 아니냐고. 나는 알리바바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행이 못마땅해서 견딜 수 없었다.

대개의 동화는 나를 상상을 풍요롭게 하고 환상이나 꿈속으로 인도했지만 또한 많은 동화가 나에게 수많은 의문부호를 선사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쉽게 설득당하지 않는 기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그 대상은 같이 살던, 가장 어르신이었던 할머니로부터 부모 가족에 이르기까지 가차 없이 적용되었다. 그렇게 체험된 시간은 객관적 시간 속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했다. 그 자유는 나로 하여금 '신나는 글쓰기'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무작정 책이 좋았다. 나의 모든 궁금증은 책에서 해결되었다. 책의 효용성을 따지기 전에 책은 이미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현실 속 타인들과의 교류에서보다 책의 세계에서 나의 감정과 감성과 이성의 활약상이 더 황홀하게 펼쳐졌다고 믿는다. 그리고. 비누처럼 향기롭고 부드러웠던 상상력. 거품을 낼수록 퍼져나갔던 글자의 향연들. 스무 살 이전까지 현실적으로는 대단히 모범적인 생활을 했지만, 그리고 한 번도 그 범위를 벗어나려고 한 적도 없었지만 영혼은 너무도 분주하게 생의 이면을 뒤쫓고 있었다. 그 질펀한 카오스! 그렇게 해서 나는 조금은 독설적이고 주관적인 자아를 확립하게 된 것 같다.


"퇴폐적이며감상적이며비도덕적이며비이성적이며비논리적이며충동적이며무모하며파괴적이며열정적이었던" 나 자신에 대한 이런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금도 겉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내면의 어느 곳에서는 과열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나는 종종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불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러한 나를 존중한다.

두려움은 무엇일까. 두려움의 일차적 원인은 상실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친구를 잃을까봐 신용을 잃을까봐 명예를 잃을까봐 재산을 잃을까봐 사랑을 잃을까봐.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타인들보다는 두려움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좋다. 어떤 면에서 나는 두려움도 취향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남편을 손을 꼭 잡고 근처 영화관에 가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교회 문화부 행사로 단체 관람한 또래 회원들의 너무 감동적이었다. 눈물 펑펑 쏟았다.’ 이런 한결같은 관람 평을 믿었기 때문이다. 전혀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 ‘I can speak'는 그렇게 해서 보게 되었다. 극장에 가니 늘 한산하던 로비가 연세 제법 있는 분들로 인산인해였다. 나는 정말 놀랐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는 영화라니 대체 어떤 영화일까.

영화가 시작된 지 십 분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나는 알았다.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남편은 이미 코를 골고 있고 나는 다소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달리 어떡하겠는가. 주위의 훌쩍임을 들으며 나는 혹시 냉혈인간이 아닐까를 의심하면서 팝콘 먹는 재미로 그냥 앉아 있었다. 우리의 일상은 역시 신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어제 저녁 TV에서 손석희 앵커의 앵커 브리핑 제목을 보고 놀랐다.

 

Let's agree to disagree.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나문희가 수상 소감(저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네!)을 피력하던 말을 하면서 앵커가 내놓은 화두 같은 말이다. 그래. 인간은 억압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안한 기쁨, 보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라며!

보편적인 자유가 또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아침이다. 그래. 어느 영화에 누구는 울고 누구는 감동받고 어디서는 상도 주지만 누구는 팝콘 먹는 재미로 그냥 앉아있었다는 것도 인정해주기를.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무라는 말까지 더불어 떠올리는 아침이다.

 

(원고지 2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