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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하루

만원의 행복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2. 2. 28.

힘들었던 시절(그러고보니 늘 힘들었고나....) 쥐꼬리만한 월급을 타면 한 달에 한 번 책방으로 가서, 좋아하는 음악 테이프를 하나 사고, 그리고 책을 한 권 샀다. 만원 안짝의 금액으로 호사를 누렸네.

이번에도 생일을 맞이하여 선물을 하기로 했다. 내가 나에게.

엊그제 토요일. 창덕궁에서 무려 네 시간이 넘는 빡센 성경공부를 마치고 문협 월례회를 가는데 시간이 삼십 여분 남았다. 전철 역에서 내린 나는 간만에 지하상가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두리번거리는 순간, 기가 막히게 저렴한 가격 균일의 옷 판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상점에는 이렇게 써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옷은 몽땅 9900원! 히야~

봄도 되고 했으니 풍성한 티셔츠(반드시 엉덩이까지 내려와야 한다) 하나 갖고 싶었던 나는 냉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 이뻤다! 그런데 점원이 구깃구깃한 티셔츠 하나를 다림질 하고 있었다. 앗!

내 몸뚱이가 둘은 들어갈 것 같은 풍성한 티셔츠였다! 짙은 회색의 후드티!

잘 다려주세요!!

그래서 샀다. 비닐봉지 값으로 100원을 더 하니 딱 만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입었다. 아아아아아. 퍼펙트하게 내 마음에 들었다.

너무너무너무 기뻤다. 세상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옷이 있다니, 어떻게 내 눈에 띄었단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점지해 주신 것이 틀림없어. 나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상점이 눈에 띄게 한 거야!

하필 그 때 점원이 옷을 다림질 하지 않았으면 이 옷을 만날 수 없었겠지!

ㅋㅋ

나는, 만원짜리 후드티 하나에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만땅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아아 정말 멋진 생일선물이었다. 그 어느 선물이 이보다 더 즐거움을 줄까보냐!

그 날 이후, 그 옷은 나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거울 앞만 지나가면 좋아 죽는다. 아예 입고 자기도 한다.

반팔이어서 지금 입고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만, 5월만 되어라. 맨날맨날 입고 다닐테니!

그렇게 웃기는 결심도 하면서 지금 나흘 째 나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 후드티!

물론 지금도 입고 있다. 쫌 추워서 속에 검은 티를 받쳐 입긴 했지만 욕실에 들어갈 때마다 내 모습을 매혹적인 눈초리로 그윽하게 바라보게 되는 저 만원짜리 후드티!

모르긴 해도 앞으로 몇 달 동안, 아니 올해가 다 갈 때까지 이 칙칙한 후드티는 나에게 기쁨을 줄 것 같다...

 

만원은 아니지만 이천원의 행복도 있다.

바로 오늘 일어난 일^^

특별새벽기도에 여의도 성모병원까지 문상을 갖다 오는 바람에 힘들어 캑캑거리는 나에게

남편이 투정을 부린다. 오늘 아파트에 장 서는데 봄똥 없었어?

난 없었다고 둘러댔다. 김장 김치는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고 너무 시어버리는 바람에 남편은 먹기 힘들어한다.

봄똥나물이 먹고 싶다고 노래하는 남편에 못이겨서 피같은 배춧잎을 한 장 쥐어주었다.

반드시 거슬러 와야 해. 나 써야할 돈이니까!

나는 마치 신사임당 하나 주는 것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딱 봄똥 한 가지만 사와야 해!, 그렇게 못도 박았다.

과연 남편은 봄똥 한 가지만 사왔다. 2천원어치란다. 겨우 한 덩어리의 봄똥을 보니 너무 웃겼다.

그래도 너무 했다. 한 덩어리만 사다니.

남편은 착하게도 팔천원 거스름돈을 몽땅 나에게 다시 준다. 그것은...내일 특새 갈 때 택시비도 해야하고,

어쩌구 하면서 변명을 했다.

어쨌거나 신이 난 남편은 열심히 봄똥을 손질했다.

그런데....무치려고 보니 아뿔싸! 멸치액젓이 다 떨어졌네!!

이를 어쩌나, 하는데 혹시 봄똥나물을 먹지 못할까 걱정이 된 남편이 거들었다.

재작년 가을 강화도에서 사온 밴댕이젓갈이라도 대신 넣으라는 것이다.

맛이 너무 진해서 냉장고 구석에서 고요히 잊혀져가고 있던 젓갈이었다.

너무 진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개운한 멸치액젓을 넣지는 못하고 걸죽하고 텁텁한 밴댕이젓갈로 버무렸다.

그리고설랑 남편에게 맛을 보라고 했더니 엄지 손가락을 힘껏 쳐든다. 환타스틱!!

그 맛이 정말 환타스틱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맛을 보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담았다.

난, 안 먹으면 되니까.

이천원어치 봄똥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맛나게 보인다. 하지만 난 결코 먹지 않을 결심이다.

봄똥나물을 무치는 김에 계란 삶고 마카로니 삶아서 마요네즈로 버무렸다. 그것은 내 간식이자 내 반찬이다.

니글거리는 맛을 좋아하는 나는 매우 만족했다. 지금 식탁 위에 놔두고 오며가며 한 수저씩 떠먹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돈 내놓으라고 협박만 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사는 것도 참 괜찮은데...

그것이....

 

지금 KBS FM 클래식 <세상의 모든 음악> 들으면서 거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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