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달을 예정으로 머물고 있는 이곳의 내 방에는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사람이 없다.
온종일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으면 방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된다. 사람이 없으므로 당연히 말이 없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간, 공간 속에서 참 많이 행복했다. 사람에 포함되는 가족이 없다는 것도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독신이 아닌 이상,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고 거실에서 대화하고 때로는 싸우고 그렇게 소통하고 한 지붕아래 잠을 잔다는 것에서 벗어났다. 혼자 누워 잠을 자는데 가슴이 떨릴 정도로 벅차올랐다. 그만큼 신비로웠다.
둘째 시계가 없다.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오면 아침이고 비단결처럼 화사한 햇빛이 나무들의 잎사귀를 덮으면 한낮이고 어두워지면 저녁나절, 별이 뜨면 한밤중이었다. 잠을 잘 때조차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치 시간의 노예처럼 매 순간마다 시간을 체크하고 약속을 정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잔다는 것, 그러한 일상을 벗어던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셋째 거울이 없다.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얼굴이 부었는지, 해쓱해졌는지, 우울한 표정인지, 살이 퉁퉁해졌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의 외모를 의식하던 굴레에서 벗어나니 그것 또한 새로운 자유였다. 외모지상주의를 넘어 내안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화장을 하지 않을 자유. 마주칠 타인이 없으므로, 하물며 내 자신에게조차 위안을 삼을 필요가 없으므로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넷째 저울도 없다.
집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 아침 저울위로 올라섰다. 온 국민의 로망이 되어버린 다이어트에 대한 욕망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몸무게의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얄팍한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섯째 휴대폰도 없다.
잠시의 틈이라도 생기면 여지없이 휴대폰을 들고 쓸데없이 이곳저곳을 들락거리고 확인하면서 소통과 정보에 매달리지 않으려고 벽장 속에 처박아 두었다. 웬만한 전화는 받지 않고, 끔찍하게 급한 일이 아니면 타인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여섯째 인터넷도 없다.
책상 앞에 앉아서 세상을 검색하고 타인의 삶을 검색하면서 보낸 시간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선은 물론 연결되어 있지만 내 블로그조차 들어가지 않으니 마음이 훨씬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일곱째 TV도 없다.
단 하루만이라도 TV소리를 듣지 않고 살고 싶었으므로, 방에는 TV가 구비되어 있지 않으므로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여덟째 뉴스가 없다.
나는 집에 있을 때 하루에도 몇 타임씩 뉴스를 시청했다. 아침 아홉시 반 뉴스, 오후 다섯 시 뉴스, 일곱 시 뉴스, 밤 아홉시 뉴스, 어느 때는 나이트 라인 뉴스까지 똑같은 내용의 뉴스를 지치지도 않고 보았다. 대체 이 세상에 새로운 소식이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꼭 알아야할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하루의 뉴스에 소비해버린다면 너무도 소모적인 삶이 아닌가.
아홉째 스케줄이 없다.
하루의 시간, 일주일의 시간, 한 달의 시간이 온전히 나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내가 그 어떤 것을 해야 할 것도 없고, 꼭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도 없고,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어떤 일도 없었다.
내가 어디론가 가고 싶으면 가면 되고,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잔뜩 먹거리를 쟁여놓고 낮이나 밤이나 먹으면 되고, 책을 읽고 싶으면 읽고, 산책을 가고 싶으면 가고, 빈둥거리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나의 시간의 소비 방식을 방해하거나 질타할 권리가 없었다. 내 마음대로, 바로 그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기도조차 없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도 철저하게, 어찌 보면 강박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되는 감사의 기도. 눈을 비비면서 내방으로 가, 제일 먼저 노트북을 열고 즐겨찾기로 들어가 남자친구가 추천한 설교를 클릭했다. 새벽예배 동영상을 보면서 함께 예배드리고, 아멘 했다.
마흔 몇 명의 명단으로 이루어진 중보기도와 성경 읽기, 인터넷 성경 필사.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으면 다시 좋아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클릭하여 보곤 했다. 일 년에 하루 이틀 정도 경건한 새벽을 건너뛸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온종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책감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번 한 달 동안은 그 거룩한 속박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고 성경 읽고 싶을 때 들춰보고(하루에 몇 장 읽어야지, 하루에 한 시간은 성경 읽어야지 하는 결심 없이)조용히 묵상하고 싶으면 묵상하고, 신앙 서적이나 신학 에세이 읽고 싶을 때는 찾아 읽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마음이 맑게 비워졌을 때, 시간과 공간 속에 그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나를 찾아오실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한 달은 마치 이생에서 저 생으로 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과 극이었다. 인류를 죄악에 빠뜨렸던 에덴에서의 유혹,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그 어느 것도 없는 곳이 이생에서 과연 존재할까. 그런 곳이 없다면 이곳을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유혹은 없는 곳으로 만들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텅 비어있는, 無를 누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제껏 살아온 삶의 어떤 규칙을 완전히 뭉개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눈을 뜨면 옆자리에 남편이 누워있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계를 보면서 하루 일과를 정하고, 거울을 보면서 늙어가는, 좋게 표현하면 한없이 성숙해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숨짓거나 고민하고, 아침마다 저울 위로 올라서서 몸무게의 바늘 위치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수많은 약속과 명령과 할 일이 전해지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종종걸음을 치고, 즐겨찾기의 모든 사이트를 들락거리면서 글을 남기고, 글을 읽고, 누군가의 소식을 접하고, TV를 보면서 분노하고 회의하고 때로는 작은 감동을 받거나 실망하는 일상이 존재하지 않은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새로운 소식이랄 것도 없고 놀라운 일도 없는 뉴스에, 다른 채널의 다른 뉴스코너에서도 한결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뉴스를 보고 또 보고, 테이블다이어리를 책상 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고 내일의 할 일과 일주일 후의 할 일과 한 달 후의 기념일을 체크하고, 마치 바리새인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그렇게 마치 쳇바퀴 돌아가는 듯 똑같은 일상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체험, 삶의 현장’처럼 힘들었던 쉰 몇 해의 삶을 살았으니 이생 같지 않은 곳에서도 한 달 쯤은 살 권리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런 하루를 어떻게 살까?
주위에 아무도 없고, 시계도 없고 거울도 없고 저울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TV도, 뉴스도 스케줄도 기도도 없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일상을 유지했던 많은 것들을 다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할지,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니면 갑자기 들이닥친 자유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공황상태에 빠진 것처럼 허둥대면서 어리둥절하게 시간을 흘려보낼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은 휴가를 갖고 싶어 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며 지루하고도 진부한 일상의 모든 만남을 끊어버리고 절간 같은 곳에 숨어들어가 쉬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쉽게 이룰 수 없는 현실이 그들 앞에 있으므로 어쩌면 죽을 때까지 ‘싶다’라는 말만 반복하다 말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급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늘 같은 일과를 번복하게 마련이고 그것은 지루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이 되어 사람의 숨통을 조인다.
게다가 최고의 선이며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며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인 ‘사랑’마저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할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저 사람이 없으면 못살 것 같아.
그러다가 그 연인과 결혼하고 한 집에서 가족으로 지내고, 그렇게 그리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다시 이렇게 말을 번복한다고 한다.
저 사람 때문에 못살 것 같아.
‘저 사람’이 보고 싶어 아무리 먼 거리라도 마다하지 않고 단숨에 뛰어오던 사람이 ‘저 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고 홀로 산을 오르거나,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새벽의 낚시터에서 초록으로 빛나는 케미라이트 불빛을 연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듯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변덕스러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토록 뜨겁던 열정이 새벽녘의 유담뽀처럼 식어버리는 것을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매일 바라보는 ‘사랑했던’ 그 사람이 붙박이장처럼 느껴질 때 사람들은 다시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쉼, 혹은 휴지기, 혹은 일단 멈춤.
나에게도 그런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떠났다. 일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도망쳤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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