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썼던 글인데, 읽을수록 기가 막힌 말씀이어서 다시 올린다. 읽고 또 읽으면서
참 자유를 누릴 결심이다^^ 아, 물론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에는 제목이 없다. 그냥 빌립보서 몇 강 이렇게만 되어 있다. "나는 나를 포기했으나"라는 저 멋진 제목은 목사님의 설교에서 내가 따온 것이다. 숱한 문장에서 뽑아낸 내 솜씨도 장난 아니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정말 멋진 제목이지 않은가 말이다!!! 내, 언젠가는 꼭 저 제목의 글을 쓰고야말리~~)
나는 나를 포기했으나 <박영선 목사님 2011년 11월 18일 빌립보서 3장 설교>
오늘 아침까지 세번째 들었다. 설교문을 성실하게 들으면서 옮겨적었다. 잘 못들었으면 다시 되돌려 보고 쓰고..하느라 노력 많이 했네^^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다.
구원의 조건에 예수를 믿는 것과 함께 할례를 포함시킨 율법주의자들이다.
초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고 바울이 격렬하게 말하고 있다.
행악자. 도덕적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는 자꾸 확인하고 싶은 본성이 있다.
예수 이외의 무엇인가를 더한 것에 대한 경고이다. 그것에 대하여 성경은 언제나 심각하게 경고를 이야기한다.
세상의 종교란 어떻게 말하면 도덕의 극단까지 가는 것이다.
도덕의 극단이라는 것은
은혜위에 서는 것에 반대해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의를 말한다.
그 의의 극단까지 가는 것이다. 즉 뿌리와 근거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근거가 되느냐 인간이 근거가 되는냐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하는데서 언제나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모든 종교의 비판은 도덕성이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왜 그래, 하는 말에서는
왜 일반인보다도 도덕성이 없느냐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원래 기독교는 죄인들을 위한 종교니까 당연하다.
죄 중에는 꼭 영적인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상식에서도 걸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세상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만은 받아주신 것이다.
그것이 교회이다.
온갖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 나는 예수 믿노라 하고 기쁘게 자랑할 수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너무나 은혜가 넘쳐서 그랬을 수도 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근거로서 말하는 것인지 은혜가 만들어내는 책임을 말하는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근거인가 은혜인가 분별해 보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은 우리의 자기 의의 확인, 자기 가능성의 확인을 위하여 준 것이 아니다.
출 19장 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꺼낸다.
그것을 해방시켰다 구원해 주었다는 측면에서만 이해하지 말라.
바로에 의해서 힘으로 굴복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이 꺼내셨다.
자유로운 시민으로 불러 하나님과 언약을 맺자고 하신다.
애굽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종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던 처지로부터
자기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압제와 강요가 아닌, 자유로운 자리에 불러 대등한 합의(언약)를 보자고 말한다.
내가 너를 구해주었으니 보답을 하라, 가 아니다.
너희가 내 백성이 되기를 원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명예로운 약속, 명예로운 내용을, 조건을 제시하는 장면이다.
그것이 요약하면 율법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인데, 너희는 신실하게 나를 섬겨라.
대신 나는 너희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신실한 주인이 될 것이다.
너희가 율법을 지켜야 되는 것은 내가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거룩함은 너희 스스로에게 명예로운 것이다. 자신의 확인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서 내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할례에 담긴 뜻은 하나님과 나의 언약의 징표로서 요구된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그 부르신 분이 나에게 어떤 약속을 했는가에 대한 신실함과 진실함에 대한 징표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그 내용이 되려고 한다.
내용은 아닌데 내용이 되곤 한다.
빌 3:3 말씀에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육체라고 한다.
육체의 목적은 우리가 전부인, 내가 전부인 근거와 확인 능력 그것을 육체라고 한다.
원래 할례 율법의 목적은
내가 나라는 존재로부터 충분한 조건과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유일한 목적과 존재가 되었다를 확인하는 것이 율법이다.
요 15:9 이하의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계명. 강요가 아니다. 계명이란 상대방의 기쁜 뜻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 계명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 속에는 약속이 가지는 약속하는 쌍방간의 대등한 존중과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기꺼이 동의하는 책임이다. 사랑하는 사이처럼.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상대방에게 기꺼이 종이 되기로 한다. 기꺼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그것이 율법정신이다.
그 책임이 그 자랑이 자신을 위한 것이 없고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 책임이 상대를 향한 자원하는 마음, 기쁜 마음, 신실함, 진정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을 행하는 자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율법주의자들은 거기에서 넘어졌다.
넘어지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도 늘 틀리는 부분이다 그냥 넘어가는 하는 부분이므로 민감하게 반응해야한다.
일반사회에서도 교회의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옮은 것이 예수로 말미암은 옳음이 아니라 이런 율법주의적 옳음인 경우에는 뜱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빈틈이 없다.
사심이 없고 대의를 위할때 사람들은 예수가 있는 자리를 외면한다.
그럴 때는 그 사람과 밀고 땅기기가 되지 않는다.
율법과 구별되는 것은 밀고 땅기는 것이 있다.
"제가 지금 이렇지만 주님. 제가 이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지금은 이럴수밖에 없으니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가 있다.
불쌍히 여겨 달라라는 기도가 옳은 자의 입에서 왜 나오겠는가.
기독교 신앙에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당연히 도덕성을 능가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도덕성을 능가한다는 것은 도덕의 극한에 가는 한 점의 점도 흠도 없는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옳을 뿐만 아니라 불의한 자를 끌어안는 품이 있을 때 그것을 옳다고 한다. 여기에서 진다.
한국 교회 역사상 교회가 겪었던 가장 힘든, 그리고 늘 교묘하고 떨쳐내지 못했던 문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에 와서는 진심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잘난 사람과 죄인밖에 없었기 때문에. 잘난 사람은 할 얘기가 없고 죄인은 죄인이므로 할 말이 없고, 그렇게 되었다.
교회안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을 논하려면 흠이 없어야 하는데, 사랑은 흠없는 사람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사랑은 희한한 것이다. 사랑은 못난 자에게도 허락되는 하나님의 부요한 선물이다.
기독교가 사랑을 논하면서 어째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랑은 용서와 겸손과 희생과 이해의 적극적인 실천을 사랑이라고 한다.
참 놀라운 일이다. 이상한 일이다. 예수 믿는 것에 성공한 것이 대체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 왜 그것이 늘 꼬리표처럼 쫗아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내일 교회 문을 닫는한이 었더라도 이것은 복음이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위에서 모욕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부인한다.
종교의 율법주의는 언제 우리를 흠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데 훨씬 많이 집중하게 해서 빈 사람을 못만나게 한다. 그가 비어 있어야 '저 사람이 저렇게조각난 몸뚱이로 어떻게 다니는가 보았더니 그 속에 그것을 묶고 있는 예수가 있더라' 해야 하는데 너무 빈틈이 없어서 그 자신이 본체가 되고마는 그런 신자만 보인다.
나의 목소리가 격렬해지는 이유는 나의 본성안에서도 그것을 붙잡고 이말을 못하게 하기 때문에. 뒷감당을 못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도 있는 본성이다.
예수믿는 자의 자랑이 무엇이냐.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의가 되고 말았다.
유교적 정신으로 말하면 군자의 도라고 한다. 제일 잘난척 하는 표현은, 오해를 받고 잘못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본인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오해를 받았다는 것은 부덕한 소치이다. 뭔가에 걸렸다는 것이다. 부끄러워서 석달 동안 안나왔다. 이런 신화가 우리에게는 오래전 천성으로 물려진 정서이다. 그것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
예수를 믿는 다는 어떤 약속보다 그것이 더 우세한 것이 되었다.
우리가 시시콜콜 자기의 못난 것을 사람들 앞에 말하지는 않지만.
하지만. 아무에게도 잘난 척을 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신앙고백이 아닌가.
그 양보한 얼굴이 있어야 한다. 왜 턱 쳐들고 쳐다보느냐 이것이다.
양보한 얼굴, 부끄러운 얼굴, 그것이 예수의 얼굴이다.
지금 내가 성질 부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성질 부리는 것이다.
골 2. 18. 325페이지.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머리를 붙들라. 예수를 붙들라.
왜 우리가 교회에 나오느냐. 왜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고도 이렇게 엉터리로 살아도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느냐.
우리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예수가 우리를 붙들고 있어서. 내가 굳게 선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붙들고 있어서.내가. 나는 나를 포기했으나 하나님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아서 이렇게 살아 있다, 이렇게 교회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얼굴을 하자. 괜찮다. 그것이 기독교다. 복음이다.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 누가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지지 말라.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걱정하지 마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아무도 겁낼 것 없다. 그리고 자랑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용서했는데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사 내내 저절러온 반복되는 교회의 실수, 반복된 실수이다.'
여러분을 곱씹어 보라. 교회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어떤 자랑인가. 그것을 기억하시는 경고이고 새삼스럽게 확인해보는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박영선 목사님의 마무리 기도)
죄는 참으로 무서운것입니다. 언제나 아무때나 반복해서 우리를 예수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우리 홀로 서서 자랑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곳에 분쟁과 시기와 정죄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우리 부족한 것들이 모여사는데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마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감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해결한답시고 정죄하고 잘라내는 실수는 하지 않도록 주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를 지킬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복음의 능력을 위하여 책임있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을 눈물로 기도하여 견디어내고 유지하고 지속하고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게 하여주십시오.....
(박영선 목사님을 나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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