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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라 60

눈길을 밟으며 수요예배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7. 12. 21.

2014년 파산 선고를 받은 나는 카드가 없다.

내가 손해를 입히지 않은 은행(대단히 미안하기는 하지만 고리대금업자처럼 끔찍한 이자를 물리게 한 것에 대해서는 괘씸한...덕분에 게우 이삼천 원금에 한달에 이자만 백오십만원 넘게 물었으니 이게 은행이냐!)에서 체크카드를 발급받아서 통장에 돈이 있는만큼만 쓴다.

제일 불편한 것은 교통카드이다.

편의점에서 현금을 내고(꼭 현금이어야만 한다) 만원어치, 돈 없을 때는 이천원어치 이렇게 충전을 해서 버스나 지하철을 탄다. 요즘은 택시도 교통카드로 해결되어서 좋다.

 

얼마 전 대만 여행 갈 때 친구들이랑 대화를 나누는 중에

체크카드에 교통카드 기능을 넣을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어제 오후 내가 남편에게 선물한 평창 기념 지폐 (몇 달 전 만오천원이나 지불하고 예약했던)를 찾으러 은행에 가는 김에 물어보았다.

"신용조회가 필요해요"

직원의 말에 살짝 옴츠러졌다. 하지만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왔길래 신용이 좀 올랐을라나 하면서 기다렸더니...

"아, 안되네요."

한다.

 

네~ 하고 씩씩하게 일어섰지만 기분은 별로였다. 그래도 계단 내려오면서 급속도로 기분전환.

뭐 맨날맨날 충전하면서 살면 되지, 모...

바라기는 새해에는 좀 풍족해져서 오천원어치요 만원어치요 하지 말고 한 번에 오만원어치요! 이렇게 충전하게 되기를 ㅋㅋ

(요즘 교통비가 너무 올라서 오만원으로 한달 부족하다. 연금 들어오기 일주일 전쯤에

교통카드 잔액이 달랑거리면 오금이 다 저린다. 요즘이 그렇다 에잇 서울까지 걸어갈까보다 이런 오기도 ㅋㅋ)

 

그렇게 살짝 마음고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이 수선스럽다.

오늘 수요일이니까 동네 교회 가야한다는 것이다.

지난 주일 우리 부부 외에는 단 한명의 교인도 없던 그 교회말이다.

매일 이상스런 사건 다큐나 세계 여행 프로만 보고 앉아있는 것보다는 얼마나 좋은가 싶어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 목사님 설교 참 안들어온다.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너무도 지루하다.)

그래도 남편이 모처럼 활기차 보여서 좋았다. 그러지 뭐.

 

시간이 다급하여 저녁도 먹지 못하고(우리 남편 당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펑펑 눈이 내리는 낭만적인 길을 손 꼭 잡고 걸어갔는데 10분전 7시.

그런데 예배당 앞에 이렇게 메모지가 붙어있다.

 

(폭설로 7시 예배가 7시 반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대략난감.

눈이 너무 와서 집으로 다시 가려니 남편이 준비한 게 꽤 많았다.

남편은 단 한 권 남은 <하나님의 트렁크>를 기어이 책장에서 찾아내고

다소곳하게 반주하는 목사님 딸(올해 수능을 보았다고 한다)에게 주려고 소장한지 이십년이 되어오는 파카 만년필과 내가 대만에서 사온 싸구려 향수와 (얼마전 문우에게서 선물받은, 내껀데!)페레레로쉐 초콜릿 상자까지 싹 도리를 해서 가방에 넣어왔던 것이다. 아이고....

 

가만히 서 있다가 그 건물 꼭대기에 있는 오꾸꼬(신개념 치킨집이다 ㅋ)에 올라갔다.

배도 출출하겠다, 메뉴판을 뒤적여 가장 저렴한 9900원짜리 모듬 감자만 시켜 먹는데 맘씨 좋은 주인은 아메리카노 두 잔 서비스까지 해주신다. 헤헤 우리의 헐렁한 호주머니를 어찌 눈치채시고는....

 

그리하여, 감신 대학원에 다닌다는 목사님 아드님까지 합세하여 (따님보다 키보드를 더 잘친다능!!) 찬송가 신나게 부르고 예배드리고(아이고....천근만근같은 눈꺼풀 걷어올리느라 개고생하는데 우리 남편은 아주 성실한 자세로 잘 앉아 있다. 그러니까 예배에 같이 하신 분은 사모님, 따님, 아드님, 그리고 우리 부부이다) 책 드리고 뜨거운 차 앞에 놓고 티타임 삼십 분.

 

그 삼십 분 동안 서너 명 건너가면 다 아는 사람이라는 말에 걸맞게 수많은 사람들을 공유했다. 알고 보니 이렇게 저렇게 된다는...

무척 반가운 표정은 지었지만 대체 그게 무슨 이야기꺼리가 되는지...

감리교는 가족적인가보다. 그 목사님은 매주 토요일 성경모임을 인도하시는 우리 목사님 성함까지, 우리 목사님이 계시던 분당의 어느 교회 이름까지 다 알고 계셨다능...

누구 누구하면서 계속 족보를 파고 있던 시간이었다...

근데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권사님(나)이 오신다고 생각하니까 설교문구를 다시 고치고 있더라고요. 작가님이라니 계속 신경이 써지는 거 있죠."

(우리 남편이 혼자 교회간날 이미 우리 마누라가 소설가라고 신나게 떠벌린 탓이었다 흑흑)

목사님은 연대 이공대 출신이어서 문학과 거리가 좀 멀다고 하신다.

하기는... 그것도 설교를 하는데 좀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눈길을 걸어 집으로 오면서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목사님과 그렇게 친해지는 것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데...."

남편은 내 말에 또 불같이 화가 났으나 좀 참는 눈치.

 

목사님께서 우리 부부가 와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하시니

그 말에 힘입어 수요예배는 열심히 나갈 생각이다.

제일 큰 좋은 점은 우리 남편이 수요일 저녁에 하나님 생각 좀 하게 되었다는 것!

나도 별의미없이 저녁을 보내는 것보다 너무 좋다.

어찌보면 우리 남편의 순수한 생각이 더 하나님 마음에 드시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나야말로 남편 때문에, 혹은 교인 하나 없는 개척교회에 나라도 '나가준다'라는 생각이 안생기도록 조심하면서...

 

하나님. 수요예배에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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