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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하루

말보로 네 갑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12. 30.

말보로 네 갑이 남았다.

내 생각에 마지막 담배일 것 같다.

히히. 더 이상 담배 살 돈이 없는 것이다.

참나...하나님은 꼭 그런 방법으로 나에게 금연을 실천시켜야 합니까!!

 

몇 년 전, 담배를 끊었을 때, 천변을 걸으면서 하나님께 애원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제가요...담배를 입에 달고 살겠다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그냥

글쓰다가 너무 막힌다거나 하면,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핑 돌거나 하면, 어쩐지 외로워져서 누구라도 부르고 싶은 밤이 되면, 그럴 때마다 아주 가끔씩, 그러니까 하루에 두 세 개비정도 담배 연기를 날리면 안되겠슴까?

고 정도는 하나님의 넓으신 아량으로 충분히 카바하실 수 있잖슴까!

그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반성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하나님 말씀 듣고 기도하고 디저트처럼 담배를 꼬나물었던 것.

술 마시면서 흥에 겨워 열라 담배를 피워댔던 것.

문우들과 친목을 도모하면서 손끝에서 담배를 절대 놓지 않았던 것.

황혼의 거리에서 버스 정류장 옆 쓰레기통에 붙어 서서 타인의 시선에 관계없이 라이터를 켜 댔던 것.

천변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공원의 단골 벤치에 앉아 상념에 젖어 담배갑을 꺼냈던 것.

늦은 밤 거실창에 바짝 붙어 앉아 아무 생각없이 밖을 내다보며 담배 연기를 날렸던 것.

아아아... 그동안 만났던 그 누구보다 젤로 많이 담배를 사랑했던 엄연한 사실을 어찌할 것인가.

 

술은 더하다.

중간에 몸이 약해져서 주량이 반으로 확 줄어드는 바람에 주춤한 적은 있지만

술만 있으면 정신 못차리고 일편단심으로 달려들어 작살냈던 기억이, 머릿속에 충만하다...

약간의 중독기가 있어서 술만 있으면 마음이 누그러지고, 편안해지고, 기분 좋아지고, 슬픔을 안주삼아 마시고 또 마시던 일이 무릇 기하이뇨!

집에서도 혼자 술 따라 마시던 날이 무릇 기하이뇨!

남편이 잠들면 몰래 진열장을 뒤져 미니어처를 원샷하던 날은 무릇 기하이뇨!

(그 증거물로 속이 빈 산사춘 미니어처가 내 콘솔 박스 음습한 곳에 숨겨져 있다. 대체 언제 남편 몰래 갖다버릴지 고민하면서)

빈 술병을 숨기면서 허걱, 하면서 소스라치기도 했다. 이거...혹시 내가 알코홀릭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면서.

 

고백컨대 담배와 술이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또 다시 엄밀하게 고백컨대 담배와 술은 나에게 이미 경고를 하고 있다. 너무 열심히 탐닉했던 것이다.

적당한 흡연과 적당한 음주를 하나님이 뭐라고 딴지 거실 일은 없을 테지만, 그러리라 확실하게 믿고는 있지만 지금 상황은 많이 다르다. 중독된 것이다.

 

작년, 친구의 남편이 갑작스레 말기암 선고를 받았을 때 무려 40일동안 담배를 끊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친구 남편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이년 전, 교회의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석할 때는 술이며 담배는 물론, 좋아하는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표현이었다.

 

지금...과유불급의 사자성어가 나를 깨우치고 있다.

몇 년 전, 하나님께 아양을 떨었던 것처럼, 하루에 두 세 대의 담배와 혈액순환을 위하여 권장할만한 정도의 주량이 아니라면, 이제는 과감하게 그것들에게 절교를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아...헤어지기 싫은데...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제 더 이상은 곤란하다는 자각.

 

남편이 갖다 준 말보로 네 갑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저것을 다 피우려면 내년까지 갈텐데...어쩔까나...남편에게 기증할까...?

 

유별난 취미생활 때문에 연말정산하기 바쁜 이 시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담배 한 대 피면서 더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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