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자의 헌금
우리 집은 가난하다.
굳이 가난의 정도를 따지자면, 나라에서도 우리 집의 가난을 인정해줄 만큼 가난하다. 남편이 병원에 가면 진료비가 공짜이고, 내가 병원에 가면 진료비를 천원만 받는다. 약값은 사흘 치나, 일주일 치나, 한 달 치나 기간에 관계없이 단돈 오백 원으로 땡처리(?) 된다.
물론 성경적으로는 복 있는 자임에는 분명하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네게 복이라,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으므로.
복 있는 자와 가난한 자와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셨으므로 나는 그 말씀을 든든하게 붙잡고 산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아무튼 이렇듯 가난한 자의 헌금은 매우 빈약할 수밖에 없다. 가끔 감사헌금으로 미미한 액수를 드리면서 헌금봉투 겉면에는 이름도 액수도 기입하지 않았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시므로 아무 상관없는데 문제는 재무부 임원들이었다. 분명 그분들은 그럴 리가 없는데도 이름을 쓰면 “아니, 이 권사는 겨우 요만큼을 감사헌금이라고 했네?”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 망상 때문이었다. (원래 소설가는 쓸데없는 생각이 많다^^)
그렇게 오래 동안 무명 감사헌금을 드리다가 변화가 찾아왔다.
작년, 담임 목사님이 강사로 활약하신 자체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은 남편이 아껴두었던 비자금을 턴 것이다.
“나, 감사헌금 하고 싶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과한 액수를 보며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만한 액수라면 이름과 액수를 헌금봉투에 써 넣어도 부끄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남편도 거들었다.
“우리, 이름 쓸까?”
“그러자!”
그래서 헌금봉투에 이름, 액수를 적어 넣었다. 좀 자랑스럽게^^;;
하지만 그 자랑스러움은 이내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이제까지 무명으로 감사헌금 한 것은 단지 액수가 적어서였을 뿐이었다는 결론이 아니던가!
뼈아픈 반성 이후, 우리는 변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액수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후, 아무리 적은 액수의 헌금이라도 이름, 액수를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언제인가 우리가 좀 형편이 나이져서 마음에 흡족한 헌금을 드리게 될 때, 씩씩하게 이름, 액수를 저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행위는 (재무위원이 아닌)하나님께 자랑하고 싶은 소망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몇 년 저, 교회 미담집을 만들기 위하여 어느 장로님을 인터뷰 하면서 충격적인 은혜를 받았다. 그 장로님은 매 주일마다 감사헌금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나는 생일감사 헌금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감사헌금은 수십 년 신앙생활을 통 털어도 두 자리 숫자 안에 머물러 있었다. 장로님은 이렇게 덧붙이셨다.
“물론, 여유가 없을 때도 많았지만 감사헌금을 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감사헌금 할 수 있도록 채워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저 장로님처럼 앞으로는 매 주마다 감사헌금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 몇 달간은 열과 성을 다하여 감사헌금을 드렸지만 서너 달이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감사헌금을 하고 싶은 간절함’보다는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하나님은 본말이 전도된 헌금이 견딜 수 없으셨을 것이다.
지금은 섣불리 매주 감사헌금을 드려야지, 하는 생각은 버렸다. 하지만 앞으로 언제인가는 꼭 그렇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혹시 아나? 이번 ‘목적 40일 새벽기도’에서 은혜 만땅 받으면 그 기회가 좀 더 빨리 올지도...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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