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교회
지하철 1호선 제기 역 1번 출구로 나오면 함흥냉면 집이 있다. 가게 입구에 있는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는 교회 올 때마다 뽑아 마시지만 그곳에서 식사하는 일은 드물다. 음식 값이 좀 비싸기 때문이다. 저녁 집회가 있던 날, 모처럼 우리 부부는 냉면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중국집에 와서 자장면과 짬뽕을 두고 망설이는 것처럼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냉면과 갈비탕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기로 했다. 한참 맛나게 먹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 어르신들을 모시고 화끈하게 쏘던 누군가가 뒤늦게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 계산까지 해주려는 거였다. (조금만 더 늦게 주문할 것을!! 도대체 왜 그 식당은 선불인지 모르겠다!) 비록 우리 음식 값을 지불하지는 않았지만 그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진 것이 많다고 누구나 그렇게 쏘지는(?) 않을 거라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때의 광경을 말해주었더니 돌아오는 말이 좀 의외였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험담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 뭘 모르시네 하는 투로 들려준 몇 가지 일화는 대단히 비호감적인 이야기들이어서,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거짓을 꾸며댈 만한 인격을 가진 분은 아니므로 그 말은 사실일 테지만 들으면서도 마음이 찝찝했다.
가뜩이나 세상은 인터넷의 홍수로 정작 필요한 정보는 등한히 하고 쓸데없는 스팸 메일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교회에는 꼭 알아야 할 일도 있지만 잘 몰라도 상관없는 일 또한 적지 않다. 뿐인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한 이십여 년 전 일이다. 속회예배를 드리러 젊은 속도의 집을 방문했다. 무척 후덥지근한 날, 산꼭대기에 있는 집을 연로한 속도들과 함께 힘들게 올라갔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한 삼십 여분 동안 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우리 아들은 짜증내고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대략난감(^^)해진 속도들은 하는 수 없이 닫힌 문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속회 헌금(나는 정말 하기 싫었지만 한 권사님의 권유로 하는 수 없이)을 했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땡볕 속에 다시 산을 내려오면서 둘로 나뉘었다. 연로한 속도들은 “무슨 일이 있겠지.”하면서 이해하는 편이었지만, 나는 평소 죽이 잘 맞았던 속도와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 “속회를 받기 싫으면 처음부터 싫다고 할 것이지! 외출 약속이 있으면 미리 말을 할 것이지!!” 나중에는 속도의 깨끗하고 곱상한 미모까지 도마에 올랐다. “얼굴만 예쁘면 뭐해, 심보가 글렀어!”
하지만 정작 심보가 그른 사람은 우리였다. 젊은 속도의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경황없이 병원으로 달려 간 사실을 며칠 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웃에게는 더없이 관대하고, 내 자신에 대해서만 철저했으면 그렇게 입방아를 찧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특히 교회생활을 하는 데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사람의 면면도 매우 다양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나로서도 헷갈리는 면이 적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나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신다, 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에 우리는 잘 승복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하나님도 아시고, 우리도 확실히 알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산뜻하고 명확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누군가 식당에서 새치기하는 것은 빡빡한 회의 막간을 이용하여 40일 아침 금식의 허기를 메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누군가 예배 중간, 살짝 빠져나가는 것은 공군에 입대하는 아들과 함께 진해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누군가 성인학교에 상습적으로 늦게 오는 것은, 오랫동안 병중에 있는 시어머님 수발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정말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집회나 모임에 꼭 늦게 오시는 누군가는 해외선교나 전도에 탁월한 달란트가 있기도 하고, 자신이 입었던 찬양대 가운을 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누군가는 의외로 구제와 봉사에 누구보다 먼저 발 벗고 나서는 열심이 있으며, 식당에 줄을 설 때 앞자리로 파고들어 별로 예쁘지 않게 새치기를 하시는 누군가는 실은 몸이 불편한 분을 위하여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식사를 타다주는 것일 수도 있다.
찬양 연습 시간에 잡담으로 일관한다고 눈총 받는 누군가는 상대방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치료중인지도 모른다. 큰소리로 남 야단치는 게 취미인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는 깜짝 놀랄 정도의 헌금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고, 뺀질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는 까다로운 불신자 남편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초치기로 시간을 나누어 쓰는 중인지도 모른다.
흉이 많은 사람의 이면에 뜻밖에도 보석처럼 아름다운 사랑과 봉사가 몰래 반짝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어디 분위기 좋은 곳에 모여,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남 흉 볼 때가 제일 신난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소설가 박완서다.
소설가 박완서를 위시해서 세상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할지 몰라도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하나님이 감히 의인이라고 불러주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제자이고 일꾼이고 청지기이므로. 게다가 우리는 100주년을 맞이하는 용두동 교회의 성숙한 크리스천이므로.
우리 중에는 유난히 재를 뿌리는데 능통하여 달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있고, 별 것 아닌 일화도 꽃가루를 뿌려서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제발 나의 메가톤급 허물에도 누군가 꽃가루 좀 뿌려주었으면 좋겠다.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고 하지 않던가!
허물이 많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끌어안기, 그 사람의 언행을 이해하기 어려워도 무조건 사랑하기, 미운 털이 박혔어도 그저 사랑하기.
나는 그런 멋진 사랑을 <낭만적 사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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