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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가로되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6. 5. 20.

이 아침이 벅차서 또 다시 나의 하나님을 불러보네.

하나님,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나요?

지금 들려오는  Handel / Col Partir la Bella Clori // Gt : Steve Erquiaga, Vc : Joan Jeanrenaud [5:12] 이 음악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낸 선물이로구나.

다글다글 커피포트 물 끓는 소리는 어찌 그리 다정한지.

식탁위에 놓인, 누구의 선물인지 모를 티백을 하나 집어들었네.

무슨 차일까,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아, 이것이 바로 카모밀(camomile)!

나에게 카모밀 차를 알게 해준 사랑하는 시인,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떠올랐네.

수십 번 되풀이 읽으면서 몇 번을 옮겨 적으면서 그 詩에 빠져들었던 그 시절의 나의 슬픔도 떠올랐네. 아, 가슴이 저릿저릿.

내가 외출한 사이에 남편이 혼자 집앞의 슈퍼마켓에 가서 사와(남편으로서는 정말 대단한 모험) 나의 책상에 다소곳이 놓아준, 내가 좋아하는 '크리넥스' 티슈통에서 천사의 날개처럼 하얗고 가벼운 티슈 한 장을 꺼냈네.

마음 어딘가에 있는 슬픔 한 덩이 쏟아내고, 아련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잔잔한 희열이 나의 몸을 사로잡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네. 마치 남의 몸처럼. 내가 어떡하다 이렇게 되었나? 

새벽 4시 반에 하나님이 깨워주셔서 눈을 떴네. 5시 15분이면 집앞 교회가기 딱 좋을 시간.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나의 발길은 산책로로 접어들었고, 하염없는 말씀의 세례에 젖으며 떠오르는 햇님을 맞았네. 아, 하나님, 멋진 아침이어요.

집으로 돌아와 쌀을 씻고 음식을 만들고, 느지막히(글쎄 7시가 늦은 것인지) 신용목의 시 두 편을 필사하며 이렇게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네.

대체 누가 선물한 카모밀 차일까요? 하나님? 그분에게 가서 사랑한다고 좀 전해주세요.

그리고 그분에게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15초를 좀 읊어주세요. 제가 시를 알려드릴께요^^

 

2011년 1월 1일 그 시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다른 블로그에 적혀있군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하나님. 이 슬픔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지금 나의 전신을 휩싸는 아리아리한 슬픔은 또 얼마나 나를 아름답게 하는지 하나님은 알고 계시지요?

이토록 슬픈 시를 예전에는 슬프게만 읽었는데 지금은 환희와 슬픔이 아름답게 직조되어 나의 아침을 두드리는군요. 이아침, 천국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나의 하나님. 나의 모습을 보여드릴께요^^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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