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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하루

푸른초장에 누워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3. 5. 12.

점심 겸 저녁으로 짜장면 먹었다.

이사하는 날 맛나게 먹었던 기억으로 배달 시켰는데 그 때만 못하다. 그래도 싹싹 그릇을 비웠다. 미련한 포만감 때문에 잠깐 정신이 얼얼했지만 그 무딘 식욕의 충만함을 견디기로 했다.

노트북을 들고 거실인지 안방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장소로 옮겼다. 남편 혼자 TV를 보는 것이 좀 미안스러워서, 자리를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헤드폰으로 올드팝을 들으면서 가끔 화면에서 흘러가는 장면을 힐끗거리면서 두 시간짜리 동영상 강의를 듣다가 자꾸 영상이 끊어지는 바람에 집어치웠다. 그리고 이렇게 모처럼, 일기장을 펼쳤다. 그동안 참 소원했구나, 하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블로그에^^;;

 

평화로운 주일 저녁이 가고 있다.

늘 그렇듯 새벽(요즘은 날이 하도 일찍 밝아져서 새벽이라고 말하기 좀 그렇지만)에 일어나 꽃단장하고, 늘 약속시간보다 십분쯤 늦게 대기하는 아들의 차를 얻어타고, 일주일에 한 번 양복을 입어 모처럼 때깔나는 남편을 뒷좌석에 모시고, 그렇게 교회를 갔다.

차안에서 주전부리할 먹거리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더니 오늘따라 남편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뭔가 먹고 싶다고 보챈다.

가방을 뒤져 '자유시간' 두 개 손에 쥐어주었다. 얌얌. 남편이 아주 맛있게 먹는 소리가 재밌게 들렸다.

7시 반에 시작하는 1부 예배를 잘 드리고 집에 오면 9시가 겨우 넘은 시각이다.

부지런히 노트북을 켜고 100주년 교회의 9시 실황예배를 찾아 들어갔다.

참 좋은 시간.

스타벅스 프레스로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엊그제 이상한 일이 있었다. 신기한 일이라고 해야할까 모르지만. 십년 전 지인에게 선물해준 스타벅스 커피 프레스-나의 재산상태로는 정말 거금을 주고 샀다-가 십년만에 나에게 되돌아 온 사건이 있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커피 프레스를 갖고 싶어했다. 원두커피를 손쉽게 내려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커다란 커피메이커를 좁은 집안에 떡하니 펼쳐놓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비상금 봉투를 몇 번이나 열어보면서 요즘은 얼마나 할까, 너무 비싸지 않을까 통박을 재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저께 그 지인의 집을 방문하여 맛있는 드럽 커피를 마시던 중 지인에게 커피프레스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인은, 내가 선물한 커피프레스를 딱 한 번 사용하고 그대로 가지고만 있다고 하면서 찬장을 뒤지는 것이었다. 지인은 선물이기 때문에 쓰지도 않지만 버리지 않고 십년 째 보관만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면서 얌전히 포장을 해서 다시 나에게 선물(^^)했다. 와, 하나님은 대단하시다. 지인에게는 쓸모없게 된 것을 가장 적절한 때 나에게 돌려주시다니!)

이미 중독이 된, 땅콩 캐러멜 사탕 한알에 볶은 땅콩 다섯 알을 잘 세어 우물거리는 반복행위를 열 두번(양으로 따져도, 칼로리로 따져도 어마어마하다....)하면서 불경스러운 폼으로 예배도 드리고, 그리고 똑똑한 여성학자의 두 시간 꽉 채우는 인문학 강의를(커피 프레스를 선물한 지인이 정보를 주어서^^) 매우 흥미있게 들었다. 참, 좋았다. 삐딱선 타는 나의 여러 성향은 실은, 참으로 바람직한 행위와 생각이었다는 기쁜 결론에 이르게 하여준 학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독서.

 

나의 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 중 하나는 연필을 들고 밑줄을 짝짝 긋는 것이다. 페이지를 접는 일은 삼가하는 편이지만 책갈피가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독 이어(dog ear)' 짓꺼리를 한다. 요즘 화양연화의 시절을 만끽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예전에는 정말 집중을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다. 책을 한 권 집으면 이틀을 넘기는 법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이야말로 배부른 돼지의 형상으로 살다보니 독서의 시간도 서너 배는 느려진 것 같다. 집중도는 예전의 반도 되지 않는 것 같고, 안광이 책을 뚫기는커녕 활자의 의미 언저리를 티미하게 맴도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뭐...

지난 성경공부시간에 함께 했던 분들의 조언(그동안 힘들었으니 어깨에 힘빼고 즐기시라)에 힘입어 느려터진 독서도 그냥 누리기로 했다.

그닥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어서 그것 또한 조언을 구했더니만 '더욱 즐겨도 괜찮다'는 즐거운 조언을 해주시는 바람에 요즘 화양연화의 시절이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책과 놀다가 작심하고 낮잠을 자러 이불을 들추는 나의 모습은(루저의 삶은 과연 이러한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주일을 푸른초장에서 즐기는 모습으로 비춰질까, 아니면, 백수의 대책없는 킬링타임 작태로 비춰질까, 아주 잠깐 머리를 굴리다가 한 시간을 푹 주무셨다.

그리고 나서....앞에서 거론한 짜장면을 드신 것이다. ㅋㅋ

 

지금은 다시 커피타임.

커피프레스로 두 잔의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즐거운 밤을 맞이하고 있다.

가장 바람직한 다음 일과는 운동화 끈 조이고 밤산책을 나서는 것이겠지만 이사한 이후 한번도 밤산책을 나간적이 없어설랑....

 

그냥

오늘은

꽤 두껍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페로몬을 몇 방울씩 뿌려놓은 것 같은

끔찍하게도 매혹적인 책을 끌어안고 영혼의 쾌락을 만끽할까....

아니면

포이에마 주일 예배를 틀어놓고 영혼의 충만함을 만끽할까....

 

과연 화양연화긴 하넹, 아깝다, 봄날,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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