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 기도회를 기다린다
5시. 기도의자에 앉았다. 머리가 맑지 못한 것을 느낀다. 기를 쓰고 이틀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오늘 저녁 교회에서의 겟세마네 기도회를 진심으로 기다린다. 아름다운 시간이다.
요한복음 18장. 예수님이 잡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일부러 잡히는 것처럼 보인다.
니들이 누구를 찾니?
예수요!
그래? 내가 예수다.
그럼 잡아야지!
이렇게 말이다.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는 예수님이 경비병에게 존대어를 사용한 것이 참 흥미롭다.
23절 한 부분의 예수님 말씀 :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대시오. 그러나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시오?
제자들과 모인 사람들에게는 반말로 일관했는데 일개 경비병에게는 존대어를 쓰는 모습이 좀 이상하기는 하다. 왜 그렇게 번역했을까?
요한복음 저자는 베드로에 대해 인색하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부분 이후에 다른 복음서처럼 심히 통곡하였더라, 혹은 울었더라, 하는 부분이 없이 매몰차게 곧 닭이 울었다, 라고 앗싸리(?)하게 끝나고 있다. 베드로가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요한복음은 많이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오히려 진중한 가운데 더욱 가슴을 울리게 하는 어떤 것들이 많이 내재되어 있다. 문장 자체가 위엄이 있고, 스토리 형식으로 이어가는 다른 복음서와 많이 구별된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38절: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하고 물었다. 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보기에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심으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은 것 같다. 일종의 빈정거리는 투가 느껴진다. 만약 비중 있는 물음이었으면 예수님의 신실한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이 대답을 거절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정도로 끝을 맺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쌩뚱맞게도 그냥 진리가 뭔데?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끝나버렸다. 빌라도가 진리를 알고 싶었으면 예수를 풀어놓고 진지하게 대화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내가 보기에 빌라도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 자체에 흥미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예수에 대하여도 귀찮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진리 언급 이전,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를 보면 서로 핀트가 안 맞아 동문서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서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굳이 자세하게(제자들에게처럼 부연 설명을) 알려줄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빌라도의 역할은 유다의 역할처럼 미리 정해진 것이었으므로.
예수를 판 자는 분명 유다인데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이천 년 넘게 굳이 사도신경에까지 비열한 이름으로 올라 온갖 욕을 먹는 빌라도는 또 무슨 죄인지 모르겠다.
알쏭달쏭 성경말씀은 그냥 마음에 품고 있으면 언제인가 성령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환히 알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회를 기다리는 오후, 마치 축제를 기다리듯 마음이 설레고 있다.
문득, 지난 잡지를 뒤적여 축제의 하나님이라는 꼭지를 찾아냈다.
도대체 예수라는 존재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이 바로 가나 결혼잔치에서 벌어진 사건을 주목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께서는 무엇보다도 '축제를 위하여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성공회대학교 교수님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란 외관상의 경건함과 종교적 포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애당초 내면의 생명력을 충만하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라고 했고 위기의 벼랑에 서 있는 인생살이에서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이 우리의 삶에서 완벽한 주도권을 갖도록 믿음을 세우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귀가 번쩍 뜨이는 구절도 있다.
"포도주 사건의 기쁨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있음을 깨우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축제가 되고, 그 축제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력 가득한 영이 우리 자신의 삶에 전적인 능력으로 주어지는 기쁨을 체험하는 것!”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를 숙였다. 아멘.
나는 지금 교회에 가기 위하여 축제를 기다리는 듯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준비를 하고 있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하게 된 남편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면 살짝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나는 지금 마음이 급하다. 축제가 기다리고 있고,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흥분한다.
이십 분쯤 일찍 교회에 도착. 예배당에는 몇 사람만 앉아있다. 찬양 인도를 맡은 분들이 리허설을 하고 있는 앞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순서를 정하고 노래를 불러보는 어수선한 분위기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시끄럽고 조용한 것이 나에게는 별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곳에 예배당 안이라면, 아니 교회 안이라면 나는 좋다.
마음을 집중하고 눈을 감았다. 소란하던 소리들이 점차 잦아들면서 내면에서 울림이 들려왔다. 주님.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어떤 애통함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힘들었고, 그리고 주님만이 나를 수렁에서 구해주실 분이라는 것을 꽉 붙들고 있는 나의 가슴에 뭉쳐있던 어떤 설움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또,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는 나와 주님만이 있다, 그렇게 느끼고 싶었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님. 나는 마음속으로 주님을 불렀다. 그것이 기도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흐느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처럼 울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삶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그곳에서 나를 그 어떤 곳으로(아마 좋은 곳이리라, 어떤 축제의 장소이리라)이끌어 주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렸고, 그 간절함은 눈물이 되어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슬프면서도 한 편 행복했고, 어떤 상실감에 사로잡히면서도 완전한 어떤 것을 느꼈다. 이 이분적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너무 외로웠으며 또 한편 꽉 찬 완전함을 느꼈고,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과 결핍감으로 내 심령이 부르짖는 것과 어떤 따사로운 손길이 나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주님. 나의 기도문은 단 한 마디였다. 주님...
두 시간동안의 집회는 감동적이었다. 나는 이 시간을 축제처럼 보내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행복했다. 금요 겟세마네 기도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다, 그렇게 나는 확신한다.
자정 가까이 집에 와서 아주 평안한 마음으로 커피 한 잔 마셨다. 축제의 끝에는 술이 있어야 하는데요, 하고 나는 하나님께 농담을 했던가...?
'하나님은 나의 스토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일 - 하나님과 음악, 그리고 詩 (0) | 2011.06.23 |
---|---|
12일 - 자기결정에 의한 (0) | 2011.06.23 |
10일 - cogito ergo sum (0) | 2011.06.23 |
9일 - 책을 말하다 (0) | 2011.06.23 |
8일 - 기형도와 술 (0) | 2011.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