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 기형도와 술
기특하게도 5시에 눈을 뜨면 정신이 반짝 난다는 것,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
어쩐지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 같아서.
숭고한 기도 묵상.
오늘 날짜의 묵상에 정말 놀라운 구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염려를 아뢰는데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물론 그것도 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귀담아 들으십니다.
그러나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당신이 아뢰는 내용 모두가 하나님께 새로운 뉴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온전히 주관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가운데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0.1 퍼센트도 없습니다.
기도할 때는 그러한 자각을 가지고 큰 확신으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렇구나. 내가 아뢰는 내용 모두는 하나님께 새로운 뉴스가 아니로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인데 나는 미처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맨날 이르는 기도는 빼먹지 않고 중얼대었던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나 명약관화한 사실을 그냥 넘어가고 다른 것에 매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파란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좌악 그었다.
요한복음 15장 어제에 이어 존대어 버전으로 묵상하면서 또 깜짝 놀람. 요즘은 왜 이렇게 새롭게 느껴지는 구절이 많은지 모르겠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십니다.
여기에서 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에 대하여 계속 독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다.
손질하신다,는 의미는 그 다음 구절의 깨끗하게 하다 와 그리스어 어원이 같다고 주를 달아놓았다.
일단 나의 상황이 열매를 맺는 가지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계속 깨끗하게 손질하신다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이것은 완전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닌가!
요즘 술독에 빠져 사는 나에게 일침을 주시는 말씀이라 생각하니 새벽부터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진다....
온종일 기형도 전집을 붙들고 늘어졌다.
이 세상에 없기에 늙지 않는 얼굴이 책 표지에 있었다. 만일, 요절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으면, 주위에 -지금은 많이 알려진 -문우들이 없었다면, 과연 그렇게 빛이 났을까, 나는 회의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형도는 매우 매력적이었고, 시니컬했고 그리고 빛나는 언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시인이었다.
이전에 대강 한 번 훑고 내일 독서회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연구차원에서 읽는데 힘들었다.
그것은 노동의 수준이어서 그러할 것이다.
옆에 두고 천천히 기억날 때마다 한 구절씩 음미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에 남는 시가 많다. 사람들의 취향은 똑같은지 나도 '빈집'에 마음이 많이 간다.
평론을 찾아 읽고 프린트했다.
이것으로 내일 독서회를 위한 준비, 숙제는 끝났다. 속이 시원하다. 문학은 즐기는 것이지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책을 읽다가 문득 어제 미국에서 친구가 준 남자친구 찾기 미션이 생각났다.
다시 여러 군데 검색하여 그 사람의 인적사항을 좀 더 수집한 후, 장으로 있는 기관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거기 어디어디죠."
"네, 그렇습니다."
"누구누구씨가 장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통화, 가능합니까?"
"어디신가요?"
"아, 예 여기 모모 대학 모모학과 몇 기 동문회입니다."
"기다리세요."
졸지에 동문회라고 거짓말을 한 나는 가슴이 뛰어서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나서 편안하고 부드러운 음성의 남자와 십 여분을 통화.
친구의 옛날 남자친구가 맞았다. 친구가 찾아 달래서요. 친구의 이름을 들은 남자는 흥분했다. 그 남자도 나름대로 내 친구를 찾느라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자의 휴대폰 번호를 받아 적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째 평생 향단이 노릇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사실이 그러했다. 누군가 사귀면 꼭 중간에 나를 넣어서 이리저리 싸움은 화해시키고 당사자들이 말 못하는 사연은 전달해주고, 이쪽저쪽의 오해 풀어주고, 그렇게 성실하게 향단이 노릇을 했는데 아직까지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다 좋은 일이거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전화질이나 죽도록 하겠지, 별 수 있겠나.
저녁에 문협 임원과 만남이 있다. 공식적인 술자리다. 소수의 인원이 모이므로 문학 이야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술과 문학은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나는 마치 늦은 저녁 외출하는 술집 여자처럼 온종일 뒹굴던 몸을 닦고 정성껏 화장을 했다. 기분이 묘했다. 가방 속 작은 파우치 속에는 피다 남은 에쎄 두 갑과 라이터, 그리고 가그린이 있다. 나는 그것을 보물처럼 보고 좋아한다. 날씨가 장난 아니게 덥기 때문에 온종일 에어컨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고 있다. 밖은 오후 2시처럼 따가운 햇볕이 제왕처럼 군림하여 모든 사람의 무릎을 꿇게 하고 있다. 그렇게 덥지만 않으면 천변을 천천히 걸어갈 텐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 선글래스를 챙기고 지금 앉아있는 중이다.
5시 뉴스를 귓전으로 듣는다. 폭염특보가 내려진 오늘의 뉴스는 온통 더위 이야기뿐이다.
독서가 좋은 피서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기형도 때문에 오늘의 폭염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다.
시인과 수필가와 소설가가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시인이 여행이야기를 하다 문득 여행 산문집 하나를 주문했노라고 했다. 알고 보니 우리 싸부님 산문집이다.
소설가는 여행의 기록을 어떻게 남겼는가 보고 싶었다고 한다. 나는 그 책 속의 사진이 모두 싸부님이 직접 찍은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제법 두툼하고 제법 읽을거리가 있다고도 - 은근히 - 홍보했다.
국내산 한우라고 원산지가 명기된 제법 좋은 식당에서 모듬 구이를 시키고 소주와 백세주를 취향대로 마셨다.
술을 제법 마셨는데도 밖은 쉽사리 어두워지지 않는다. 문학과 술과 밤, 이렇게 셋이 만나야 삼합처럼 기가 막힌 맛을 내는데... 나는 자주 블라인드를 걷어보면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소설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나의 하소연을 들은 시인이
"그렇다면 시를 한 번 써보시지요." 한다.
나는 물론, 펄쩍 뛰었다.
"시 쓰다가 잘 안되면 수필도 쓰고 소설도 쓸 수 있지만 그렇게는 절대 안 되지요. 레벨이 틀려요."
나는 소설이란 잡문이고 소설 쓰는 인간은 결국 잡놈(년)이라 불리울 만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세상의 여러 즐거움에 빠져 수필에 집중하지 못했던 지난 몇 년의 세월을 후회하는 수필가는 몰입에 대하여 말했다. 아, 글은, 문학은 얼마나 많은 대화거리를 제공하는지! 서로의 눈은 더욱 더 빛나고 있고, 목소리는 열에 들뜬 것처럼 자꾸 자꾸 높아지고, 할 말이 많은 가슴은 뜨거워지는 것을 보았다.
제법 술기가 오른 일행은 다시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서로에게 좀 더 과감한 주문을 한다.
"그 슬픔의 정조를 좀 빼시고 이제부터는 유쾌 상쾌 통쾌한 소설 좀 써보시지요."
흥. 나는 시인의 조언에 코웃음쳤다. 취했으므로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마음은 달아올랐다. 요즘 시에 대해 완전히 몰입상태, 더 나아가 엑스터시 상태에 이른 듯 신들리게 시를 써대는 시인이 부러워 시새움으로 가슴이 탔다. 시인이 말했다. "이런 시간 정말 행복해요." 시인은 몇 번이나 되풀이 말했다. 행복해요, 행복해요.
자정 너머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많이 취했고 더 이상 같이 있다가는 펑펑 울지도 모르기 때문에 서둘렀다. 나는 몰랐는데 술을 많이(아주 많이)마시면 내가 운다, 고 소설 쓰는 문우가 나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운 적이 두 번 정도 있었다. 울더라도 집에 가서 울어야지, 하면서 얼른 헤어졌다. 요 근래 들어 최고의 음주량을 기록했다. 더구나 나중에 짬뽕을 했기 때문에 머리까지 아팠다.
깨질 것 같은 머리와 울렁거리는 가슴을 겨우겨우 달래 자리에 누웠다. 오늘처럼 취하면 하나님께 면목이 없다. 취하지 말랬는데... 하지만 하나님, 술은 취하라고 마시는 건데요...? 나는 하나님께 살짝 주정을 부렸다.
모든 것이 별처럼 아득하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참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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