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시편을 펼쳤다.
마음이 곤고할 때는 시편이 제격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만나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시편을 읽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은, 실은 눈물 골짜기를 헤매는 중이라는 말의 다름 아니다. 물론 그 누구라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나의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리고 그 어려운 일들이 끝없이 나의 앞날에 펼쳐져 있는 느낌을 받을 때, 그것이 절망이라는 단어로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시편을 펼치고 내 몸과 영혼에 시편의 시구를 집어넣었다. 나의 어리석은 절망을 위로의 말씀으로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나는 울면서 시편을 읽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 새벽에도 흐느끼면서 시편을 읽었다.
나의 무력함과 나의 악함과 나의 비열함과 나의 어리석음과 나의 끝없는 죄성을 날마다 각인시키려고 하는 하나님이 밉기도 했다. 내 스스로는 결코 의인의 반열에 설 수 없고 내 스스로는 오십 몇 킬로의 몸뚱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새벽에 눈을 뜨면서부터 자각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기도 했다. 21그램이라고 하는 영혼은 또 어떻고! 몸도 마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떻게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30장 11절 말씀에 덜컥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미늘처럼 나의 몸과 영혼에 박혀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과연 하나님은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실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실 수 있으실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언제? 언제?
내 존재의 중심에 계시다고 믿고 있는 하나님은 아직도 잠잠히 나의 행태를 굽어보고 계실 뿐이다. 내가 소망하는 모든 비전을 완전히 포기하기를 바라고 계신 것이다. 내 손목을 꺾으시고 내 마음을 황폐케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를 내몰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일까.
슬픔이 춤춘다, 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시처럼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슬픔에 겨워 그 슬픔에 완전히 빠져들어 마치 즐기듯 격정적으로 춤을 춘다는 의미도 될 수 있고 슬픔을 넘어서 춤으로 승화되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근래의 2, 3년 동안의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겨 살았던 것 같다.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가슴 어딘가의 통증에 시달렸고, 실제로 자주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졌고, 일주일의 닷새는 술을 마셔야했다.
절제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아니, 절제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해야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상의 삶을 겉돌았고 나는 매 순간을 그저 슬픔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 때 나는 슬픔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쾌락도 기쁨의 쾌락만큼이나 진하고 깊었다. 아니, 더 매력적이었다. 그랬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슬픔이 춤추는 삶을 살았는데 그것은 자학이었고 그 끝없는 자학은 결국 자기 파멸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편에서의 하나님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다.
슬픔을 딛고 넘어서 춤을 출 수 있을 만큼의 평화를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슬픔을 딛고 넘어서는 것은 너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 같다. 내 존재의 중심에서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 것 같은, 나에게 무관심하신 것 같은, 나를 모르는 척 외면하고 계시는 것 같은 하나님이 실은 나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다 보고 계셨으며, 다 알고 계셨으며, 악하고 어리석은 나를 완전히 파악하고 계셨으므로 이제는 서서히 나를 움직이실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이었다.
많이 아프냐고 하나님이 나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너의 한계를 알겠느냐고 하나님이 나에게 다짐받는 소리도 들렸다.
미제레레.
-하나님, 자비를 원합니다.
나도 모르게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내 스스로는 나의 슬픔을 춤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나는 슬픔 속에 완전히 빠져 허우적거리고 아우성치고 울부짖는 일밖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슬픔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고 술에 취하듯 슬픔에 취하여 흐느끼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짓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이제 시편의 약속처럼 나로 하여금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나는 두꺼운 커튼을 젖혔다. 그곳에는 새벽의 자연이 있었다. 인위적인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풀, 나무, 하늘, 덤불, 그리고 새 소리. 커튼을 더욱 활짝 젖혔다. 하늘빛이 점점 엷어지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놀랍도록 짙은 풀 냄새가 나의 온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새로운 하루를 주신 하나님, 그리고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넓은 책상위로 올라가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정결한 목소리를 가진 몽골 여인 우르나의 요람곡을 들으면서 담배를 피웠다.
오늘 밤 하나님은, 나의 춤추는 모습을 보게 되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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