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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의 스토커

6일 - 비전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3.

6일 - 비전

 

 

5시 반 기상. 꽃단장하고 6시 10분 카풀로 교회에 갔다.

7시 반 1부 예배 찬양대를 하고 있으므로 주일은 더욱 부지런해야 한다.

지금은 여름이어서 날이 훤하게 밝았지만 겨울에는 교회에 도착해도 한 밤중처럼 깜깜하다.

 

입례 송을 부르는데 또 울컥한다.

거룩거룩거룩...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4장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길가와 돌짝 밭과 가시떨기와 옥토 중 나는 감히 가시떨기에서 옥토를 향하여 가는 중이라고 나를 점검한다.

그것은 자만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길가에 돌짝밭에서 헤맨 경험이 있기에 오늘 날 가시떨기와 옥토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일 밀리라도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은 마가복음을 순서대로 설교하고 계시는데 참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새해 들어 나도 시편을 한 번 읽은 것을 제외하고는 4복음서에 매달리고 있다.

정말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바울 신학과 예수 신학이 있다면 현재 기독교는 오히려 바울 신학에 치우쳐 있는 편이라고 성인학교를 인도했던 전도사님이 말해주었다.

나는 특히 4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와 있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고 있다.

목사님께서 마가복음을 가지고 설교하겠다고 하셔서 그 후 마가복음을 두 번 정도 정성껏 읽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누가, 그리고 지금은 요한복음을 아주 천천히 -예전에는 하루 석장 이상, 하고 진도에 열을 올렸을 테지만 지금은 느긋하고 차분하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씹어 넘기고 있다. 오래된 국밥처럼 구수하다 - 읽고 있는데 그 맛이 장난 아니다.

 

오늘의 예배도 역시 감격스러웠다.

찬송가를 부를 때부터 마음에 울림이 오는데 말씀을 열심히 귀담아들으면서 자신을 점검해 보았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말했다.

그래도, 제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시지요? 좀 면목이 없기는 하지만...

 

예배 후 임원회가 있었다.

감리교회는 임원회가 있는데 분기별로 집사 이상의 직분을 가진 교인들이 모여 회의 한다. 담임 목사님이 회의를 진행하고 각부 부장들이 나와 분기별 보고를 한다. 내 생각에 임원회는 직분자들의 20% 정도만 참석하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참석이 저조한지 나는 모르지만 일단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나누어 준 제법 두툼한 자료집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밑줄도 긋고 덧글도 쓰면서 집중했다.

4월에 부임한 목사님은 이제 겨우 3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무척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고 하셨다. 아멘.

목회자가 바뀌면 리더십도 바뀌기 때문에 모든 체제가 크게 작게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전, 28년 목회하시던 목사님의 스타일은 교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자율적인 시스템이었다. 이른바 방목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로 오신 목사님은 확실한 울타리를 세우고 확실하게 양육시키는 스타일이다. 지시사항도 많고 요구사항, 주문도 꽤 많다. 비전을 가슴 가득 품고 계시는 것 같다.

 

엊그제 수요 예배 때 나는 목회자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을 보았다. 일당 천, 일당 이천으로 교인들과 맞서야 하는, 그것이 대적은 아닐지라도 하여튼, 그의 모습에서 철저한 외로움을 느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밀고 나가야 하는 그 비전에 나만은 발목잡지 말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4월 취임하자마자 특별 새벽기도회, 이어 5월에는 전교인 영적 회복을 위한 부흥회, 그리고 6월에는 다니엘 새벽기도회를 열어 많은 교인들이 동참하여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잠자고 게을렀던 영혼을 깨우려면 목회자의 리더십이 더욱 파워풀해야 하고 주변의 여러 소리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담대함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목사님을 신뢰한다.

목사님이 처음 예배를 인도했을 때부터 나는 예배의 감격을 경험했다. 이전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예배 시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사실, 그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완악하고 이기적인 나의 마음에 말씀이 촉촉하게 스며들면서 나는 은혜의 시간을 체험했다.

이전, 나에게 있어서 예배는 그냥 드리는 것이었다. 예배 속에서 감격을 찾거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몇 달 사이 나는 예배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생겼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목사님이 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 어떤 권사님이 하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려들은 적이 있다.

"참 이상해. 이번에 예배를 드리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줄줄 흐르지 뭐야?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오늘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러니까 불현듯 내가 인도하는 속도 중에서 엊그제 새로 참석하는 새 신자 속도가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분당에서 용두동까지 버스를 타고 새 신자 속도를 심방 갔지. 그냥 너무도 가고 싶어서 말이야. 그랬더니 새 신자가 깜짝 놀라는 거야. 아니, 권사님. 오늘은 속회도 아닌데 어떻게 오셨어요? 그냥 성도님 보고 싶어서 심방 온 거예요, 그렇게 말했더니 새신자 속도가 어찌나 감동하던지..."

 

하지만 임원회의 끝은 그다지 멋지지는 않았다. 다 끝나가는 무렵 폐회 동의를 하려는 순간, 어느 장로님이 손을 들고 발언했다.

요즘 촛불집회에 우리 교단이 지지 성명을 냈는데 그것이 문제이다, 촛불집회에 좌파들이 선동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교단측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감리교단을 좌파라고 매도하고 있다. 이럴 때 우리 교회에서 뭔가 입장 표명을 해야 할 것이다... 뭐 그런 취지의 발언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엊그제 칠순이 넘으신 노 권사님 두 분과 함께 차를 타고 갈 일이 있었는데 그분도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모인 사람들 다 빨갱이들이잖아. 뻔하지. 그런데 빨갱이들이 하도 많아 요즘 나는 노인정에 가도 절대 말 안해요. 그렇게 말하면 옛날처럼 잡아갈지 모르잖아. 어찌나 빨갱이들이 많은지, 나라가 아주 망하겠어. 완전히 미친 거 같다니까."

 

그러자 어느 장로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교회에도 젊은 사람들은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것은 자율에 맡겨야지 교회 차원에서 이쪽 저쪽을 지지하면 분열이 일어나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기도하는 수 밖에 없지요."

먼저 발언했던 장로님.

"아니, 그렇게 명약관화한 일을 어떻게 그냥 가만히 있는다는 말씀이요. 지금 좌파가 이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데 올바른 길을 알려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옛날 예수님도 아니면 아니요 기면 기요, 라고 분명히 하라고 본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장로님 서너 분이 왈가왈부 서로 마이크를 잡고 여러 말씀을 하시는데 목사님이 매우 난처한 기색이다.

 

교회나 교단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미 보수, 그것도 보수 꼴통의 노선 안에 있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터라 나는 순한 양처럼 눈만 꿈벅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언하시는 장로님들은 이미 보수 중에서도 보수라는 자신의 위치가 매우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럴 때는 예수님 생각이 간절해진다.

기존의 율법적인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킨 예수님의 말씀들은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당시 기득권이고 보수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들에 대하여 호되게 질책하신 그 많은 말씀들이 설마 2000년 전의 중동지방에서만 통용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좌파도 아니고 빨갱이도 물론 아니지만 촛불집회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느 명분도 나라를 분열시키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분열된 것들에게 화합, 이해, 용서의 카드를 내밀었다.

서로 사랑하라. 종교는 이데올로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좌파도 우파도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그것을 초월한 지점에 예수님은 서 계신다.

임원회의 끝은 매우 살벌했다. 이제 그만합시다, 하고 누군가 소리쳤고, 이에 폐회동의를 해서 서둘러 끝마쳤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더니 오늘 임원회가 그러했다. 나는 마음이 씁쓸해졌다.

한국 교회는 보수에서 벗어나야 더욱 많은 사람에게 어필 할 텐데 그것을 모르는 것일까?

교회 문턱은 그래서 더욱 높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만일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서 이러한 말들이 오갔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진저리를 칠 것인가.

설령 촛불집회에 좌파가 참석했다고 할지라도, 빨갱이가 참석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할 예비 신자들이다. 욕하고 비난하고 싸울 대상이 아니라 보듬고 끌어안아 예수님의 품으로 인도해야 할 미래의 신자들이 아니던가. 어쨌든 배가 고팠으므로 식당으로 달려가 뒤늦은 점심을 먹었다.

지하 홀에는 수많은 집사, 권사님들이 임원회와 관계없이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후 예배에 비전 선포식, 그리고 성찬식.

그 핵심비전이 바로 "성령님이 이끄시는 교회"라는 것에 나는 매우 만족한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라는 항목도 아멘이었다.

성찬식을 하는데 또 다시 마음이 뜨뜻해졌다. 서로 사랑하라...

나는 주변의 교인들을 둘러보았다. 헷갈리는 말씀으로 일관된 주장을 하신 장로님 얼굴도 보인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는다. 모든 이를 사랑해야한다. 이것은 명령이다. 서로 사랑하라.

그래 그것은 새로운 계명이다....

작년 가을 갑자기 난소암 말기로 판명되어 투병중인 친구가 모처럼 교회에 왔다. 해서, 몇 몇 친구들과 저녁 번개 때렸다. 맛난 닭갈비가 나에게는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 좋은 안주를!

하지만 어제 병원에서 혈압 사건이 아직도 생생한지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픈 친구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 이렇게 여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아. 너무도 감사해."

친구는 하나님의 은혜에 푹 빠져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모습은 아프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생기있고 이쁘고, 명랑하다. 하나님은 병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문협 문우의 전화.

"오늘 주말 농장에서 감자를 캤어요. 집에 안 계시지만 그냥 갖다 드릴께요."

이렇게 감사할 수가! 내가 감자를 좋아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포삭포삭한 하지 감자를, 그것도 택배(?)로 보내주고 있다.

친구들과 헤어질 때 이상한 선물 교환이 있었다.

나는 아픈 친구에게 커피 한 잔을 사주었는데 아픈 친구는 나에게 백화점 상품권을 하나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것을 현재 상황이 나보다 어려운 다른 친구에게 양보했고, 또 한 친구는 나에게 도너츠를 사주었고, 또 다른 친구는 우리들을 위하여 맛난 닭갈비를 아낌없이 쏘았다. 각자 자신의 것만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풍성하지는 않으리. 모였던 친구들 모두 기분 좋고 즐거운 웃음 속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집에 오니 남편이 거실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감자를 오종종 늘어놓고 있다. 꽤 양이 많다. 아니, 이것을 어떻게 들고 왔지? 나는 놀라 남편에게 물었다.

몸이 불편한 남편을 위하여 문우의 남편이 집까지 낑낑 이고 왔단다.

나는 얼른 문우에게 문자를 날렸다.

-힘드신데 집까지 배달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

즉시 문우의 답 문자가 왔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받아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렇게 좋은 선물 덩어리를 주었으면서!!

정말 감동적인 답 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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