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나에게 늘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신다.
나의 소설집에 평론을 써준 평론가와의 만남도 그러하다.
천상병백일장 심사할 때 처음 인사를 나누었던 평론가는 나의 미천한 소설을 평해주기에는 너무도 과분한 분이었다. 막상 소설책이 나오게 되자 나는 나의 소설을 가장 정확하게 평해 줄 분을 구했다. 요즘에 난무하는 주례사 비평 말고 정확하게 소설만 보고 평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하지만 문학계에 아는 사람이 없었던 나는 한참 고민하다 문득 같이 심사를 보았던 그 평론가 분을 떠올리게 되어 무작정 전화를 하게 되었다.
무척 바쁜 와중에도 흔쾌히(솔직하게 말한다면 흔쾌히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분이 평론을 맡기에는 좀 질이 떨어지는 무명소설가였으니까) 평을 써주었다.
소설책이 나온 후, 감사의 인사를 하러 만났다. 물론 술집이었다^^;;
닭발에 쏘주를 나누면서 문학과 나의 소설에 대하여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다.
지금 그 평론가는 명성이 더욱 높아져서 상한가를 치고 있다. 그분의 평론이나 인터뷰 등은 유명한 계간지에서 지면으로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 활발하게 최선을 다해 <문화 평론가>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분의 카톡의 머리글이 바로 이 말이었다.
<게으름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몇 달 째 그 머리글이 변하지 않고 떠있다.
가장 치열하게 열심히 (얼마전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일요일에도 강의가 있어 쉴 시간이 없다고 한다) 살아가는 분이 어째서 그런 문구를 대문에 써놓았을까, 하고 궁금했다. 그 속을 어찌 알겠는가마는...
사람들은 열심히, 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저 사람 참 열심히 살고 있어. 게으르지 않아서 좋아.
열심이라는 단어와 게으름이라는 단어는 얼핏 보기에 반대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아직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생각해왔다.
열심, 좋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무엇에 열심인지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인 중에 살아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낮잠을 한 번도 자지 않았다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정말 부지런하다.
늘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고 무엇인가 하고 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은 죽은 시간, 쓸데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집안은 늘 반짝거리고, 학습에의 욕구가 뛰어나 무엇인가를 늘 배우고 있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정말 하루를 알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나는 옆에서 몇 십년 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친구에게는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추진하고 목표 달성을 위하여 죽도록 달려가기는 하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뛰어다니는지는 깊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늘 바쁜 지인도 있다. 그 사람과 만나면 휴대폰이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어디선가 전화가 오고, 어디론가 전화를 받는다. 이 일 저 일에 파묻혀지내고 있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약속장소에서 대면할 때 그는 거의 백 퍼센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또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해야 하는 그의 활기 넘치는 일상이 나에게는 좀 의아하게 느껴졌다. 저토록 많은 일들을 어떻게 소화해 내는 것일까. 저토록 많은 일들은 과연 그 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 들일까?
열심히 사는 것도 좋고, 바쁜 것도 좋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열심이며 무엇 때문에 바쁜가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우리의 인생은 바로 시간이다. 오늘의 시간이 나의 목숨이기도 하다. 내가 하루를 살면 나의 인생은 그만큼 살아져버린 것이고, 죽음을 향해 한발짝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사람이 직업을 갖는다는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직장이나 어떤 할 일에 나의 시간을 바치고 그 결과물로 월급을 받거나 수당을 받는 것이다. 시간을 바친 댓가인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댓가를 받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귀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생명을 바친 댓가이므로^^;;
월급을 받는다는 것은 또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투자해서, 혹은 바쳐서 그 희생의 댓가를 받는다는 의미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월급도 소중한 것이다. 나를, 나의 인생을 한 조각 뜯어먹고 받은 것이니까. 직장이나 일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하고 자아성취의 방편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의 가치를 높이는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한 달에 백만원을 받으면 백만원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내가 한 다라에 천만원을 받으면 그만큼 가치가 높은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 가장 좋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댓가를 받는 것 같다. 그러면 참 재미있는 인생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삶이 어디 그리 만만한가... 대개의 경우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당위가 있어서 하기 싫어도 가기 싫어도 일을 하고 직장에 다니는 것이다.
만약 여건이 허락되어서 먹고 사는 것에 목매달지 않아도 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루하루 즐겁게 살면 좋겠지만 매일 노는 사람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일만 죽도록 하는 사람도 옆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매일 바빠서 정신없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정신이 없다는 말은 참 무서운 말이다. 사람이 정신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나...? 시체 아닌가?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니...
바쁜 것을 무어라고 하는 게 아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가 하고 묻는 것이다.
일에 빠져 있는 것을 무어라고 하는 게 아니다. 대체 왜 무엇을 위하여 일에 빠져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이런 말이 있다.
젊을 때에는 시간은 많으나 돈이 없어 여행을 못가고
한창 때에는 애들 키우느라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서 여행을 못가고
중년 쯤 되면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여행을 못가고
늙어서는 돈도 많고 시간도 많은데 건강하지 못해서 여행을 못간다는...
그런 비슷한 말이 있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을 평생 못해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이다...내가 언제인가 '진심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눈만 깜빡거린 인간이 꽤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바쁘다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뛰어다니는 사람들 대개는(내가 만난 사람에 국한한다고 꼭 말해야겠다^^;;) 내 생각으로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때문에 자신의 금쪽같은 인생을 잘라먹고 있었다.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있지만 시간은 금보다 더 귀한 나의 목숨이다, 그 목숨을 사소한 것에 그야말로 목숨걸고 뛰어다닐 일인가 말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일 실컷 못했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돈 많이 벌을 것을 하고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주위의 사람을 더욱 많이 사랑해주지 않는 것이란다.
사랑하려면 돈만 가져다 준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돈이 주는 유용성은, 그 가치는 정말 대단하지만 마음의 평화를 돈이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돈이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자족하는 마음은 돈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일단 돈을 벌려고 한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살고 큰소리도 치고 여유롭게 누리면서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결핍에 시달리기도 하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짐으로 목에 힘주면서 살고 싶어한다. 행복은 절대로 상대적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과의 차이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참 아쉬운 부분이다....
절대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들의 소유에 대하여 부러워하지 않는다. 십계명에도 있다. 네 이웃이 가진 것들을 부러워하지 말아라....
자신의 가치관을 확고하게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건 일단 나는 고개를 숙인다. 자신의 깜냥대로 사는 것을 어쩌겠나. 다양한 가치관으로 다양한 삶의 방법으로 다양한 것을 추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것 아닌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함께 모여 살게 하는 것은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라는 하나님의 꼼수인 것 같다...
나는 돈을 벌겠어, 최선을 다해 부자가 되겠어! 하고 선언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사람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명예를 가질거야, 최선을 다해 명성을 드높일거야, 하고 선언하고 열심히 스펙을 쌓고 자신의 입지를 높이는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살짝 빗나간 이야기지만 찬송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하면서
이 세상 부귀와, 이 세상 명예와, 결국에는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부귀와 예수를 바꿀 수 없다고 찬양하는 것도 이해하겠고, 명예와 예수를 바꿀 수 없다고 찬양하는 것도 수긍이 되는데(수긍이 되는 것과 내가 그렇게 살겠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을 꼭 말해야겠다...) 행복과 예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에는...쉽게 아멘이 나오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최종적인 것이 결국 행복 아니던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 그런데 행복과 예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무슨 시추에이션?
(예전부터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몇 주전 토요바이블 스터디에서 이 찬송가를 부른 후, 나의 시름은 점점 깊어지고 잇다. 그래서 계속 생각하고 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하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자신의 하루 목숨을 바치고 한 달 목숨을 바치고 그렇게 인생 살아온 사람이 어느덧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나 정말 열심히 살았어'라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자랑하면서 만족했으면 좋으련만...
돈버는 일에, 명성을 얻기 위해 하루 목숨을 바치고 한 달 목숨을 바치고 그렇게 인생 살아온 사람이 어느덧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 나의 이 많은 돈을 보아라. 정말 나는 아주 잘살지 않았느냐, 나를 본받아라. 나의 이 멋진 스펙을 보아라. 이 명예가 얼마나 귀한 것이냐. 정말 나는 아주 아주 잘 살았고 여한이 없다, 나처럼 인생을 살아라...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다.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나처럼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라, 게으른 것은 죄다....'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면... 좀 좋겠는가...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김추자도 아니면서 모두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렇게 먼 곳에 두고 가버린다고 한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내 눈에는 돈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돈은 나의 일상을 살아가는데 최소한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프리카 오지에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하는 사람에게는 사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이니까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주기도문에서 나는 많은 은혜를 받았고, 일용할 양식이 대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계속 심도있게 생각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방금 무엇인가 고백했는데 일단 지웠다. 다음에 좀더 내 마음이 견실해지면 말할 생각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내일 일은 알 수 없으므로, 그러니까 내일 죽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하루하루 내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누리며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이런 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나는 교회를 좋아했다. 예수님도 너무 좋았다. 예배드리는 시간은 행복했다. 말씀 들을 때는 무슨 마약을 맞은 것처럼 황홀하기도 했다. 성가대를 할 때, 속회를 인도할 때, 하다못해 교회에서 임원회를 할 때도 좋았다. 이른바 교회중독이었던 것일까?
어찌나 찬송가를 좋아했던지 오로지 찬송가를 잘 치기 위하여 피아노학원에 다닌 적도 있었다. 정말 좋았다. 정말 하나님께 올인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뒤늦게 다시 글을 쓰게 되었을 때, 나는 감격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꿈을 이루어갔다. 글을 쓰면서도 행복했고, 문우와 만나서도 행복했고, 글공부를 하면서도 죽도록 행복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소설을 잘 쓰지 못한다. 실력이 없는 것이다. 아마 하나님은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그럼 한 번 해봐야, 그렇게 봐주신 것 같다^^;; 내가 소설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은 등단한 후에야 깨달았고 몇 년 마음고생 한 수, 소설책이 나오게 되었을 때 완벽하게 알게 되었다. 아, 나는 소설을 잘 못쓰는구나... 몇 년 전부터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나에게 소설을 쓰게 하셨을까? 그토록 열심히 글공부를 시켜놓고도 왜 지금은 두 손목을 꽉 틀어쥐고 한 줄도 못쓰게 나를 묶어놓은 것일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미치게 하는구나!!!
다른 예술가도 그렇겠지만 작가의 경우, 많은 게으름을 필요로 한다.
느긋하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여유로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볼 게으름. 책에 빠져 있다가 어느 한 구절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끝없이 생각을 끌어내는 시간은 육체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집중을 할 수 있다. 사소한 의문을 놓고 파고 또 파는 일은 몸의 게으름에서 비로소 획득된다. 남들처럼 바쁘면...절대 할 수 없다...
천성적인 예술가 기질은 게으름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남들은 이미 확 지나가버린 어떤 상황을 계속 곱씹으면서 소설의 테마를 삼기도 하고, 모두 겉면만 보고 자지러지는 일들을 확 뒤집어 뒷면의 음습한 의문들을 글로 표현해내기도 한다. 시대와의 불화는 작가적 관점의 시작이기도 하다. 강의 할 때 잘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이 있다. 과연 그런가?
과연 그런가, 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에 대하여 성실함에 대하여, 노력과 치열함에 대하여, 윤리도덕에 대하여, 관습에 대하여, 천민자본주의에 대하여, 악한과 선함에 대하여, 슬픔과 고통과 아픔과 희열에 대하여 그 속살을 파내는 작업의 베이스이기도 하다.
그곳에 나의 게으름이 숨을 쉬고 있었다.
나의 게으름은... (정신적)노동의 댓가가 금전으로 환원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생각에 대해 치열하게 반론할 의미를 갖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평론가의 카톡 대문들을 서두에 도입했는지도 모르겠다.
게으름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고...
(열심히 쓰고 있는데 남편님이 시장하시다넹? 글을 쓰는데 집중하는 바람에 시간이 이렇게 간 것도 모르고 있었다...이것은 게으름은 아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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