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집 속에 있던 보석같은 詩)
근심을 주신 하나님께
/김승희
근심을 주신 하느님께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하늘은 넓고 갈 길은 막막한데
이토록 자잘한 근심들이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아침을 시작하며
무엇으로 밤을 마감할 수 있을까요
근심이야말로 분명한 행선지
삶의 공허 앞에 비석처럼 세워진
확실하고도 고마운 하나씩의 이정표
세상은 광막하고 시대는 혼란스러운데
나에겐 자잘한 근심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취직 걱정 건강 걱정 자식 걱정에 반찬 걱정
주택부금 상호부금 월부 책 값에 세금 걱정
연탄 가스 주의보와 동파된 하수구 걱정,
시어머님 생활비와 친정 아버지 병원비와
이 조그만 근심들이 있어서
난 우주가 막막하게 텅 빈 낯선 것이 아니고
쌀독처럼 친숙한 것이며,
밑도끝도없는 적막 강산이 아니라
한없이 체온으로 정든
내 헌옷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근심이야말로 정다운 여인숙
그것조차 없다면 삶은 정말 매달릴
것이 없는 백골산의 단애와 같아요
작고 미소한 근심들이여
너는 위대합니다,
너야말로 나를 삶에 꽉 매달리게 하는
지푸라기이며,
허무의 양손이 우리 상처의 아가리를
끔찍하고도 냉혹하게
옆으로 찢어 벌려
그 속으로 죽음 같은 극약을 부어 넣으려고 할 때
넌 작지만 완강한 손끝으로
상처의 벌어진 틈을 재빨리 오무려 주는
전천후의 자동 단추와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린 잽싸게 그 깊은 허무 속의
막막한 무서움을 잊어버리고
일심으로 근심에만 집착하면서
다시 살 길을 재촉합니다.
25시도 지난 지금
우리는 갈 곳도 없는데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그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을 잊어버리도록
더 많고 자잘한 근심들을 주소서,
길 없는 길을 가기 위하여
문 없는 물을 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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