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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람데오, 유다

금연 40일!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4.

하나님! 딱 40일 동안만 금연할께요!

 

40일 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담배를 끊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변변찮은 친구보다 훨씬 사랑스럽고 다정하며 나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바로 담배라고 공공연하게 외치고 다니던 내가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개신교 신자들은 ‘담배에 대하여’ 지독한 혐오감이 있다는 것을 나는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까? 나는 ‘담배에 대하여 지독한 혐오감이 있는 개신교 신자들에 대하여’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고? 물론 내색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 전 소설집을 발간하면서 작가의 말에 피력했기 때문에 일종의 커밍아웃이 되어버렸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늘 발버둥치는 내 영혼을 악착같이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 딥 키스를!

하나님은 내 존재의 중심에서 시퍼렇게 살아 계시다. 감사해요, 하나님!

하나님 다음으로 나를 위로해 준 것은 담배, 음악, 커피였다.

그것들은 애매한 수준의 우정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아참, 요 근래 지독하게 앓았던 갱년기 우울증을 치료해 준 술에게도 감사.

소설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기어들어가 습작의 고통을 쏟아 냈던 미니홈피나 블로그가 없었더라면 기도가 훨씬 길어졌거나, 음주량이 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 내가 금연 한 달째 일기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40일 동안만 담배를 끊어보기로 하고, 결심한 후, 착실하게 살아왔다. 착하기도 하지. 그렇게 해서 오늘로써 금연 한 달째가 되었다. 이제 열흘 후면 다시 자유다. 그런데... 그동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 처음 금연을 결심하면서, 앞으로 얼마나 힘들 것인가 하는 우려는 그냥 우려였을 뿐이었고 정작 (당분간이긴 하지만)끊고 보니 좋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가래가 없어졌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던 증상도 사라졌다.

목소리도 좋아졌다. 엊그제 남편과 찬송가 부르는데 매끈하고 깨끗하게 잘도 올라갔다. 예전 성가대 열라 하던 그때 그 시절의 솜씨를 되찾았다!!

기침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잠을 자면서도 한 두 번은 내 기침소리에 내가 깨곤 했다.

(휴가를 같이 떠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옆방에서 자는데 기침 소리가 장난 아니라고 걱정을 엄청 해주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여명이 밝아오는 거실 창에 바짝 붙어 앉아 담배부터 피우던 나쁜 습관이 사라지고 그 시간에 이제는 기도부터 하게 되었다. 참으로 많이 경건해진 느낌이...

가방속도 많이 헐거워졌다. 맨날 깜짝 놀라면서 챙겼던 담배, 라이터, 휴대용재떨이, 등이 들어갔던 공간에 손수건, 사탕, 초콜릿 같은, 아동적이면서도 여성적인 물품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음... 경제적인 이익도 상당하다. 하루 한 갑 정도를 한 달~~, 계산해보니 나에게는 천문학적인 액수!! 그 돈이면 요즘 눈독을 들이고 있는 데스크 탑 일년 할부로 그어도 되겠다. 아니면 몇 달 전부터 남편과 나의 공동관심사인 침대를 사든가!

술 마실 때 담배가 피우고 싶어 엄청 고통당할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는데 의외로 쿨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다행이야!!(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쓰고 싶지만 참고 있다^^)

좋은 점은 또 있다. 예전, 외출할 때는 어디 만만하게 담배 피울 장소가 없나, 하면서 두리번거리곤 했는데 그런 증상도 없어졌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던 것도 사라졌으니 지인들이 살판이 났을 것이다.

교회에서 나를 만나면 쌍심지를 켜곤 하는 몇 몇 자칭 경건파 인간들에게 가서 소리쳐 주고 싶을 정도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구요, 요즘 담배 끊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밸이 꼬인 칸나는 그 양반들에게 담배 끊었다는 소리 하기 싫어서 담배 끊기 싫으니 이를 어떡한단 말인가! 그분들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담배를 입에 물고 싶으니, 이거야, 원....

하지만.. 심심하기는 하다.

그냥 심심하다고 말하기에는 그 <심심>의 깊이가 장난 아니라는 것이 문제겠지...

나의 바람은 이렇다.

이왕 컨트롤이 되는 중이니 앞으로 담배를 피우게 되더라도 하루 서 너 개비 정도로 즐기고 싶다는 것. 근데 그게...잘 안될 것이다... 일단 손을 대면....

이럴 때 해결책은...음...

...기도할까...? ^^;;

하는 수없는 일이었고, 자초한 일이었고, 바라던 일이었다. 도대체 흡연이 건강을 해친다는 것, 마주 앉은 사람의 건강에도 위협을 준다는 것 말고 무슨 죄가 있는데? 그렇게 속으로나마 반항하며 지내던 시절이 꽤 길었다.

 

얼마 전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를 덧붙여 드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뉴저지 힐튼에서 여행의 첫 밤을 보냈을 때 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호텔 수칙을 가르쳐 주던 가이더로부터 물을 사가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나는 그 중요한 멘트를 흘려보냈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그 정보가 중요하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방은 넓고 쾌적했고 아늑했고 기분 좋은 분위기였지만 그것뿐이었다. 나는 제법 커다란 커피메이커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물 이외의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일테면 액상 프리마, 티백으로 만들어진 원두(그것도 여러 종류로), 립튼 티, 슈가, 가늘고 긴 스트로우까지! 욕실 문 안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헤어드라이어, 그리고 내 몸 만한 다리미판과 증기가 폭폭 나올 것 같은 스팀다리미도 보였지만 나에게는 별 무소용이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자유!

멀쩡하게 생긴 가이더 자식은 스모킹 룸에 대한 정보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자식은 아마도 한국의 금연정책에 대하여 절대 지지자이거나 스모커에 대한 생래적인 혐오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럴듯하고 마음에 드는 룸이라 해도, 그곳에 재떨이가 구비되어 있지 않다면 이제껏 높게 책정된 룸에 대한 평점은 모조리 제로로 환원되고, 그곳은 한국 소도시 변두리 여인숙만도 못한 장소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고통에 잠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고 럭셔리하기 짝이 없는 이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 와중에도 룸에 있는 모든 스탠드 불을 켜놓는 것은 잊지 않았으므로 (더블 침대 머리맡의, 두 개의 앗싸리하게 생긴 스탠드와 고품격으로 생겨먹은 널찍한 책상의 듬직한 스탠드, 그리고 소파 옆에 길게 서있는 꽤 호화로운 디자인의 스탠드까지 모두!) 그러므로 어떤 놈팽이라도 끌어들여 밤새도록 신음을 내지르기에는 그만인, 끝내주는 무드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남자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담배였다.

사이드 테이블 위의 디지털시계가 요염하게 반짝거렸다. A.M. 1:30, 1:55, 2:18... 한동안 분마다 변하는 시계의 숫자변화를 지켜보던 나는 결국 힘들게 벗었던 겨울 옷가지들을 역순으로 다시 입어야했다.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온 털슬리퍼가 아니었다면 목부츠까지 낑낑거리며 신어야했을 것이다.

새벽 2시 반, 4시, 이렇게 두 번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까지 내려와 프런트에서 근엄하게 서 있는 제복의 남자 눈길을 피해 로비 가장자리로 돌아가 회전문을 열어야했다. 문밖은 당연히 추웠다. 1월이었고, 연일 최하의 온도를 갱신하던 때였으니. 순간, 초속으로 달려드는 강풍을 피해 숨을 멈췄다. 콧속으로 얼음장 같은 공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잽을 피하는 복서의 모습으로 나는 호텔 벽 코너에 웅크리고 서서(허리가 살짝 굽어져 있었다. 그곳이 8000미터 고도의 히말라야가 아닌지 순간 의심하기도 했다)한국에서부터 공수해 온 모모 룸싸롱 로고가 새겨진 일회용 라이터를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개고생을 했다.

케이스 채 보관되어 있는 지포라이터를 대체 왜 안 챙겨 왔을까! 뉴욕에 오면 길거리에 온통 지포라이터가 있을 텐데 구태여 수입품을 다시 수출할 필요가 있겠는가, 했던 순간적 착오는 여행 내내 자신에 대해 불신 섞인 욕지거리를 퍼붓게 했다. 욕지거리는 퀘벡에 이르러서 절정에 달하게 되지만.

아무리 조신하게 있으려고 해도 온몸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혹은 아편중독 말기 환자처럼, 혹은 분노 절망 고통이 트레몰로로 다가오는 암환자처럼 리드미컬하게 떨렸다. 이빨까지, 턱까지, 손끝은 물론, 등뼈가 흔들리는 소리도 분명히 들었다고 나는 자신한다.

헤비 스모커처럼 연달아 두 대의 담배를 피우고도 미련이 남아, 이미 추위에 마비된 손가락을 주무르면서 잠깐 고민했다. 로비에 앉아 십 분쯤 있다가 다시 나와 화끈하게 한 대 더 피우고, 얼얼한 채 기어들어가 잘 것인가, 아니면 얼마 후 니코틴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옷을 주워 입고 나올 것인가... 조금 더 생각이 깊게 갔더라면 가이더가 엄포를 준 몇 백 불의 벌금도 마다하지 않고 룸에서 꾸역꾸역 담배연기를 날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이었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맛이 가지 않았으니까...

푹신하고도 기분 좋은 느낌의 필로우(왜 호텔에는 한 침대마다 베개를 4개씩이나 포개 놓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언제인가 한 호텔에서는 한동안 필로우 4개의 용도에 대해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동원하다가 혼자 뒤집어지기도 했다^^)에 칼바람에 꽝꽝 언 뺨을 대고 니코틴 만땅인 혈액이 몸속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서서히 그렇게 잠이 들면서도 생각했다. 스모커의 비애랄까, 뭐 그런 슬픈, 애잔한, 가슴 아픈, 눈물 나는 고행이 앞으로 계속 될 것이라는...

 

40일 동안 금연 대장정을 벌이게 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친구 남편을 위한 나의 사랑의 표현이다.

믿음의 동역자이기도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내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소울 메이트이다. 그 친구의 남편은 공식적인 나의 남자친구이기도 하다. 그 친구의 서른 살 된 아들도 나의 남자친구로 등록(?)되어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런데 친구 남편이 간암 말기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몇 십 년 동안 끈질기게도 만나, 그토록 다정하게 술자리를 같이 했고, 여름휴가에 같이 여행을 가기도 했던 친구 남편의 청청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친구 남편을 위하여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의 결단을 더 촉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들을 사랑의 표현으로, 간구의 표현으로 내려놓자, 는 기특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요즘 중독기미를 보이고 있는 담배를 당분간 멀리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꼭 부연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도들은 담배 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지 못한다. 은혜 받으면 저절로 끊어지는 거야,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금연이 그렇게 쉬우면 왜 금연학교까지 운영되고 있고, 왜 그렇게도 수많은 금연 보조물이 있으며, 매해 연초마다 금연을 결심하다가 몇 달, 몇 주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파기해버리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으며, 오죽하면 금연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사람에게 포상까지 하는 회사가 생기겠는가!

나에게는 특히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귀하고,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은 친구 이상의 기호품이 바로 담배였다. 하지만 친구 남편을 위한 기도의 표시로 -적어도 40일 동안만이라도 나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나의 순종의 표현이기도 했다.

석 달 가까운 기간 동안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신앙의 멘토인 어느 목사님의 지나간 주일 설교 방송을 백 몇 십 개나 집중해서 들으면서 저절로 깨달은 생각이기도 했다.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나의 욕망과 소원, 그 모든 결핍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내가 많이도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간절한 나의 순종의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거기에는, 나 스스로는 절대 금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는 40일을 가뿐하게 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내가 이제부터 적어도 40일 동안은 금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를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새벽부터 잠이 들 때까지 흡연의 욕구로 인한 고통으로 힘들어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저의 금단현상을 확 잡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철썩 같이 믿어버렸다. 과연 하나님은 조금도 나를 힘들게 하지 않으셨다.

 

세 번째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40일 동안의 금연은 조금이라도 더 이성적인 삶을 살고 싶은 나의 절제의 표현이었다. 올해 들어 나는 심각한 중독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무절제하게 담배를 피워댄 나머지 잠을 자면서도 기침을 끊이지 않고 칫솔질을 할 때마다 헛구역질과 함께 가래까지 동반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온종일 거의 언제나 목이 아팠다. 이른바 건강의 적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흡연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탐식이나 쇼핑중독, 비만처럼 절제해야 할 대상인 것은 틀림없다. 정말 담배는 건강에 치명적이다. 그것을 직시하고 있음에도 줄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핑계거리가 있다.

예전에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면서 하나님께 약속드린 것이 있었다. 중독 증세를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흡연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거의 일 년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협박하고 아양 떨고, 회유하고, 애원했다. 하나님, 중독되지 않고, 함몰되지 않고, 내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을 만큼만 피우겠으니 눈 좀 감아 주십시오.

처음 몇 달은 컨트롤이 아주 잘 되었지만 흡연의 특성상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어느 순간 무너져버렸다. 그 때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질질 끌려가는 불쌍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상한 무의식이 있는 것을 아시는지?

무엇엔가 중독되는 것을 그토록 꺼려하는 반면, 내면의 어딘가에서는 그런 중독에 대하여 매혹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절제의 삶, 반듯한 삶을 원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어디선가 읽은 구절.

나쁜 것은 매력적이고 진지하고 치열하고 강하다. 그래서 나쁜 것은 권태와 일상을 견디게 하거나 씻어내는 힘을 지니게 된다. 그 힘 때문에 나쁜 것은 위험스러운 만큼 아름답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사람에게는 데카당스 적인 내면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타락, 퇴폐를 추구하는, 혹은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나로 말한다면, 지난 반 년 동안,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일 년, 아니 더더욱 파고들자면 이성체계가 확립되기 전이 유년의 시절부터 파멸의 매혹에 시달려 왔다. 반듯한 것, 조용한 것, 예의 바른 것, 도덕적인 것, 범주 안에 드는 것, 상식적인 것, 관습적이고 윤리적이며 전통적인 것, 규율에 얽매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따위에서 참 많이 벗어나 있었다. 나는 고통, 죽음, 자해, 자폭, 함몰, 상처, 폭발, 처절, 치열, 피, 고독, 눈물, 열정, 자살, 욕망, 타부, 에고이스트, 파괴, 광기, 같은 극단적인 단어들에 빠져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타고난 성정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했고, 사람들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늘 퀘스천을 달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행복한 삶보다는 충만한 삶을 더 원했다고 하면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행복하다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상태를 보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진주문이 있고 눈이 부시도록 휘황찬란하고 무시무시하도록 번쩍거리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천국이라는 곳에 대하여 그다지 호감을 갖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오드리 헵번을 그토록 울게 만들었던 티파니 같은 보석가게가 아니라, 꽃향기가 진동하는 아침고요수목원 같은 멋진 야외 정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웃으며 상대방의 입에 진수성찬을 떠먹여주는 롯데호텔 라 세느 뷔페 식당이 아니라, 두어 평 되는 작은 방에 앉아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맑은 커피 홀짝거리면서, 책장을 한 장씩 넘기거나, 무엇인가 집필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천국이므로.

 

행복하다는 것이 평화로워 보이는 거실에 온 가족이 모여 웃음꽃을 피우면서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고 미소 짓는 것이라면, 마치 격조 높은 강남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몇 시간동안 연구하고 연습한 후, 연출된 장면을 찍은 대문짝만한 가족사진 같은 것이라면 나는 별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직장과 집만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성실근면하고 절대로 딴 짓거리 하지 않는 범생 아빠와 남편 봉양과 자식 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현모양처 엄마가, 말썽 안 부리고 성실하고 공부도 잘하고 효도도 잘하는 자식들과 노을 지는 호숫가에서 체크무늬 담요를 깔고 앉아 샌드위치와 맥주 한 잔 마시면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이 바로 행복의 순간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나에게는 별로 호감을 갖게 하지는 못한다.

 

(이건 다른 말인데 마침 말이 나왔으니 부언해야겠다. 나의 유언장에도 써 놓았지만 내가 바라는 행복의 순간이 있기는 하다. 남편과 아들과 셋이 함께 교회에 가고 예배당에 나란히 앉아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 댓츠 올! 그 이상은 없다.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지난 일 년여의 시간동안 나는 정신적 피폐함의 극치를 경험했다. 나는 슬펐고, 우울했고, 지루했고, 나에게 처해있는 모든 상황이 견딜 수 없었다. 그 모든 감정의 흐름은 어쩌면 갱년기 우울증의 발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주량은 두 배로 늘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흡연양도 두 배로 늘었다. 거의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가 음주가무를 즐겼다. 아니, 즐겼다기보다 그곳에 빠져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아니, 빠져들고 싶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감사의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면서도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의 의미는 내 뜻이라는 것이 주님의 뜻과 상충되지 않기 때문에 자꾸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내 뜻은 접어두고 주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봐야 할 것 아니겠느냐, 같은 지당하신 결론을 앞에 두고도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이제껏 끌어안고 온 것들은 나에게 너무 소중했던 것이다.

소설이 그러했다. 만일,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대체 왜 나를 소설가로 만들어 놓았겠는가. 소설가로 만들어 주셨으면 글을 잘 쓰게 해주셔야지 몇 년 째 이토록 답보상태에 머물게 한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하나님은 대체 왜 나를 어디서 주워온 자식 취급하시는가! 나는 늘 하나님께 대들었다. 책임져주셔야죠, 저의 인생을요! 아무리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개겨도(?)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주님의 뜻인 줄 알았으므로,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사람은 자기 눈에 있는 꺼풀은 절대 스스로 못 벗는 것 같다.

 

몇 달 전, 나의 거의 모든 에너지는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글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온종일 나는 퇴폐적이며 자학적인, 아주 가혹한 글만 썼다. 아무리 다른 글을 쓰려고 해도 손이 저절로 그렇게 움직였다.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나는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하여 자폭의 길로 깊게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거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고,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으리만큼 싫어졌다.

그때, 나는 이런 글을 썼다. 날마다 한 토막 한 토막씩 뱉어낸 글들. 이것은 분명 일기다. 일기를 쓰면서 나 자신을 ‘그녀’로 표현해 타자화(他者化) 시키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었다.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듯한 위태로운 자신의 내면을 발견할 때마다 그녀는 창가로 달려갔다. 늦은 밤 홀로 깨어 있는 시간이면 그녀는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맨발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편의점으로 달려가 술을 사고, 공원 벤치의 어둑한 구석에 앉아 병나발을 불고, 야산으로 뛰어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어두운 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네가 평범한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 편안히 노후를 보내고, 가족에게 둘러싸여 만족한 미소를 띠우며 눈을 감는 것, 그런 것을 행복한 죽음이라고 하겠지만. 그래, 너는 파멸의 막바지에 다다른 불행한 죽음을 맛보고 싶은 거지? 아니, 죽기 전이라도 황폐한, 지독하게 망가진 삶의 끝을 가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위험해서 아무도 근접하려 하지 않는 무모한 곳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미친 듯이 뛰어가면서,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벽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버리는 것. 그렇게 죽는다면 쌈박하겠지만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나? 피투성이인 채 가녀린 나뭇가지에 달려 자신의 알몸을 세상 사람들에게 오래 동안 보여주어야 하는 비참한 결말을 너는 꿈꾸고 있었지? 핑크빛으로 도배된 사랑이 아닌, 악취와 얼룩과 비열한 거짓말로 가득 차 모든 사람들이 더 할 나위 없이 혐오감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비루한, 비참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네 운명의 끈을 확 놓아버리고 싶은 욕망을 너는 가지고 있지? 어째서 너는 그토록 <파멸>을 원하는 거지? 너의 각막, 인생의 뷰파인더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존재에게 격렬한 사랑의 방법을 가르쳐주고, 이내 산산이 부서뜨리기를 원하는 것이지? 네가 외면을 원한다면, 날마다 불길한 꿈을 꾸고,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죽음은 훨씬 가까이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몰라. 죽고 싶으리만큼 고통스러운 눈물 골짜기에서 온몸이 찢겨나갈 것처럼 날카로운 욕망 위에 너의 전신을 불사르고 싶어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지. 아, 숨이 멎을 정도로 치열하게 다가오는, 파멸의 매력을 너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지? 환멸의 또 다른 환상의 끝, <아름다운> 파멸. 네가 아름답다고 명명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는 아름다움과 정반대라는 것도 알겠다, 그래 이쯤이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아, 하지만. 끝을 아는 인생처럼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그 명약관화한 예언을 앞에 두고 네가 헤매고 있는 눈물 골짜기에서 너의 구원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창의 안쪽과 바깥의 풍경이 그토록 처절하게 구별된다는 것과, 보이는 모습과 실제는 그토록 갭이 깊다는 것과, 통용되는 아름다움의 의미와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의 괴리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녀는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럴 때 눈물을 흘릴 수만 있었어도 매정한 눈매가 조금은 누그러졌을지도 몰랐다. 그렇데. 그때는 그 어떤 카타르시스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눈물조차도.

 

그렇게 헤매던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왔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 나를 내려놓게 되었다. 항복이었다.

하나님, 저, 항복합니다.

백기를 든 무조건적인 항복이었지만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그런 것을 혹시 아름다운 패배라고 말하지는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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