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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람데오, 유다

소설이 싫어지다니!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4.

소설이 싫어지다니!

 

하나님은 분명 짓궂은 면이 있다. 아니, 나에게 하나님은 매우 짓궂은 편이다. 언제나 나를 골탕 먹이는 것 같고, 엿맥이는 것 같고(죄송합니다~), 내가 놀라거나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킬킬거리시는 것 같다. 늘 나의 예상과는 딴판으로 이끄시고, 기상천외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아이큐에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지난 3월 도서관에서 뭔가 잘 써보려고 애간장을 녹이던 어느 날이었다. 도대체, 왜, 마음대로 소설이 진행되지 않는가에 대하여, 아무래도 하나님께 아부가 부족한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한 나는 늘 하듯이 도서관에 오자마자 성경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성경필사는 나의 취미 중의 하나로 성경 필사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평안해지고, 느긋해지고, 어쩐지 하나님이 나를 매우 기뻐하시는 것 같고, 하여튼 좋은 시간이므로 절대, 아깝다거나 힘든 시간은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 고백하자면, 한 바닥 성경을 쓰고 난 후, 이제는 그만 써야지, 하면서 또 다시 한 바닥만 더 쓰고 그만 쓰자, 아니, 정말 마지막으로 한 바닥만 더 쓰자, 이런 식으로 오전의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을 족히 성경쓰기에 바쳐버리는 것이다. 성경을 다 써 가면 이런 생각도 했다. 아, 차라리 매일 이렇게 도서관에 와서 성경필사만 하다 갔으면 좀 좋을까... 소설 쓰지 말고 성경필사만 하면 행복할 것 같은데...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는 성경필사를 마치고, 소설 쓰는 시간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작업노트를 펼치면서부터 고통이 자근자근 다가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우면 소설을 쓰지 않으면 될 것 같은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소설을 쓰지 말아야겠다, 라고는 십여 년 소설작업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소설은 찐빵의 앙꼬였다. 나를 만나는 그 누구도 나에게서 소설을 쓰는 것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진심으로 오직 소설만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그 3월의 어느 날은 좀 이상했다. 그 날은 마침 창세기를 필사하는 중이었는데 그 유명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나왔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 너무도 잘 알기에 그렇게 커다란 감동을 받기 힘든 그 장면을 열심히 필사하던 나는 어느 순간, 망치로 정수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일종의 쇼크였다.

그 쇼크를 적어놓은 그 날의 일기가 있다.

 

아니, 하나님, 왜 갑자기!

 

참 이상도 하다. 아무리 날짜를 확인해도 오늘은 분명 911이 아닌 311인데, 어찌하여 뉴욕 쌍둥이 빌딩도 아닌 내 육신 어디쯤에 자살특공대가 운전하는 비행기라도 박힌 듯 떨려오는 것인지. 이러다가 저녁나절에는 영혼을 포함한 육신이 거푸집 쓰러지듯 허망하게 폭삭 주저앉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새벽에도 하나님께 바람같이 달려가 납작 꿇어앉아 아부도 할 만큼 했는데 대체 하나님, 왜 이러신다요?

도서관에 와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질기도록 앉아있는데, 아, 저, 창밖의 눈처럼 새하얗게 표백된 정신머리하며,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경련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손떨림 증상이 좀 사라질까 싶어 언니한테 약탈해온 불가리 로션도 손등에 발라보았고, 짬 날 때마다 손마디도 딸깍딸깍 분질러 보았고, 담배 피우러 눈밭에 들릴 때마다 눈 속에 푹 밀어 넣어 눈 찜질도 해보았고, 어쩐지 어깃장부리는 심정이 되어 라이터 불을 손마디 가까이 대보는 짓거리까지 하다가 지금은, 억수로 지쳐버려 지금 현재 칸나, 살 맛, 밥 맛, 담배 맛까지 딱 떨어져 버렸다.

그렇게 한숨 푹푹 쉬면서 여전히 뻑뻑한 눈을 비비다가 그렇다면? 하면서 들어간 성경필사 사이트. 삼 만 명이 넘는 신심 돈독한 인간 중에서 그래도 1722등을 자랑하는 칸나, 창세기를 이어쓰기 시작했다. 그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나오는 그 대목을, 또 그 소리로구나 하면서 심상한 표정으로, 여전히 경련을 멈추지 않는 손을 살살 달래가면서 받아쓰기를 하던 중, 갑자기 때 아닌 전깃불이 반짝반짝.

이것이 그것인가, 아닌가, 하면서 무지하게 헷갈리는 지금, 이곳에 들어왔다.

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아들 이삭을 얻게 된 경위야 말할 필요도 없겠고, 오늘 힘들게 써내려간 대목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바쳐라'하는 그 구절이었다.

뻔하고도 뻔한, 나더러 그 대목을 가지고 한 바탕 썰을 풀라고 해도 한 시간은 너끈히 주해, 강해 넣어가며 잘 버무릴 그 대목에서 멈칫하였다.

적용의 문제를 푸는 법은 대입을 얼마나 잘하느냐, 에 달렸던 바, 기특하게도 '이삭'을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으로, 일테면, 오늘 같은 날이면, 소설 정도로 바꿔치기하면서 읽으니까...이것이...그렇다면 그 말씀인가, 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부터 손 떨림은 격한 심장의 떨림으로 확장되어 버렸고, 여기에서 확실하게 언급 드리는데 그것은 감동의 떨림이 아니라, 두려움의 떨림,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기는 <그 때, 네 머릿속에서 번쩍, 하던, 그 전깃불은 잘못 켜진 것이었느니라> 하시면서 하나님이 번복하시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그 시험의 끝이 여호와 이레, 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 과정을 감당할 힘이 없는 것도 하나님이 숙지하고 계시지 않나? 그런데 갑자기 웬, 사시보다 더 어려운 시험을 주셨을까! 시험 문제도 능력껏 주셔야 하는데 지금 하나님, 뭔가 계산이 잘못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레벨이 몇 단계 더 올라간 것이 틀림없는데 하나님, 재빨리 제 수준에 맞게 조정해주셔야죠!!

(그런데...어쩌면 그렇게도 운명, 내지는, 인생의 진행표가 뚜렷이 보이는 것일까... 하나님, 전깃불 좀 빨리 꺼주세요!)

 

그때, 소설을 이삭처럼 온전히 바쳐라, 버려라, 내려놓아라, 하는 싸인을 받긴 받았지만 결코 수긍할 수 없었다. 우선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소설을 빼면 대체 뭐가 남는다고 하나님도 너무 무리한 명령이시다! 그렇게 애써 외면하면서 다시 몇 달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부터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렇게 소설을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원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라. 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다 세시는 하나님이신데 내가 어떻게 벗어날 재간이 없잖아! 그리고, 아무리 튀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아니 하나님 손바닥인데 만약 하나님이 정말 내가 소설 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만두어야 하겠지, 그만두어야 하겠지, 그만두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나에게 단 하나 남아있는 보물인 소설을 하나님이 빼앗아가려하다니 참 지독하게도 이기적이고, 못돼먹은(하나님 죄송합니다. 너무 열 받으면 그런 격한 말도 내뱉습니다) 하나님이 아닌가! 아무리 나를 만드셨기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나의 기쁨을 앗아가실 수 있나, 이것은 절대권자 내지는 독점사의 횡포이며 공정거래법에 위반되는 담합행위이다! 뭐 그렇게까지 생각했다.

 

그렇게 하나님께 반항하면서 다시 5월까지 굳세게 그 무서운 가방 매고 노트북 끌어안고 도서관을 오리락내리락거렸지만 소설은 지지부진할 뿐이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소설에 대하여 실망, 염증, 혐오감, 그런 것들이 소설에 대한 사랑, 열정보다 앞서는 상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소설에 대한 실망 뿐 아니라, 한국의 소설가들에 대한 실망, 작가들에 대한 실망, 잘 팔리는 소설에 대한 실망, 그 소설에 대하여 멋진 평을 해주는 평론가에 대해서도 실망, 그런 소설을 만들어 주는 유명한 잡지사에 대해서도 실망, 내노라하는 문창과 교수들에게도 실망, 동료 소설가에 대해서도 실망... 온통 문학판에 대한 실망이 가속도가 붙어 점점 커졌다.

 

가장 큰 실망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소설에 대한 얄팍한 지식, 얄팍한 실력, 얄팍한 노력, 얄팍한 애정... 나는 소설에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척하는, 무늬만 소설가임에 틀림없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텅 빈 머릿속에서 단 몇 줄의 글도 뽑아내지 못하고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자학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이렇게 헤매는 동안에도 문우들은 쉴 새 없이 글들을 뽑아냈고, 날마다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면 끝없는 질투심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참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몇 달이었다.

엎친데덮친 격으로 내가 평소 좋아하던 어느 선배 소설가가 쓴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환멸의 극치를 맛보아야 했다. 한마디로 쓰레기였던 것이다. 초기의 불꽃같던 작가정신은 간곳없이 그렇고 그런, 통속도 아니고 순수문학도 아닌, 이류소설을 출간했을 때, 그럼에도 멋지게 평론을 해주고, 출판사에서 선전을 해주고, 출간소식이 대문짝만하게 각종 신문에 개재된 것을 보고는 절망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5월 28일.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소설을 그만두겠다.”

그리고 온종일 울었다.

그리고 존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첫째, 어느 목사님의 주일 예배 설교를 듣겠다. 그리고 소설을 쓰거나 소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겠다. 소설책을 보지 않겠다. 내 몸속에 있는 소설에 대한 모든 것을 빼내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어느 목사님의 영상 설교를 들었는데 정말 티슈통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면서 들었다. ‘시기가 가득하여’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비로소 나의 포커스를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전인들 그런 결심을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의 약함을 주님께 간구했고, 나의 약함 그대로 주님 앞으로 가지고 왔고, 나의 무질서함, 나의 어리석음, 나 혼자서는 절대 서지 못하는 나약함을 인정했고,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다.

 

그 후부터 거의 석 달 동안 목사님의 설교 듣는 것에 올인했다. 그 시간은 나를 온전히 비우는 연습을 하는 시간이었고, 어느 면에서는 충만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 석달 여의 시간동안 하루에 너덧 개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거의 날마다 울고 또 울었다.

말씀을 들으면서 울었다.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이 글을 읽는 분은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요즘 들어 말씀 듣고 울어본 적이 대체 언제인가? 질책과 위로와 은혜와 사랑이, 죄성 가득한 마음으로 파고 들어와 회개의 눈물을 쏟게 만드는 목사님의 말씀을 언제 들어보았는가? 그래서 얼마나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는가?

 

나에게는 온라인으로 만나 나의 영적 세계에 빛을 주셨던 세 분의 목사님이 계셨다. 성함을 밝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90년대에 십여 년 이상 매주 테이프를 들으면서 끔찍하도록 좋아했던 김진홍 목사님, 그리고 작년 겨울 100여 개의 설교를 다시 들으면서 절망에 빠진 나를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려주신 박영선 목사님, 그리고 이번 여름, 나를 다시 살게 해 준 이재철 목사님이 계시다.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나를 일깨우시곤 하신다.

참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한 것은, 지금 심경의 변화이다. 나는 정말 이런 마음이 들지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므로 하는 수 없이 소설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억울했고, 가끔씩 하나님을 원망했다. 마치 좋아하는 추파춥스를 마악 입에 넣으려는 순간, 그 맛있는 추파춥스를 빼앗아 가는 듯한 하나님의 독선이 싫기도 했다. 나는 많은 시간 하나님께 대들었다. 하나님, 저에게 십년이나 소설을 쓰게 하셨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손목을 꽉 붙잡고 계시면 어떡하라구요! 제가 어릴 때부터의 꿈이 소설가인 것을 누구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는 소설에 대하여 거의 내려놓지 않았나, 하는 매우 안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한, 몇 주일 전이었다. 소설가가 된 후로는 처음으로 원고 청탁이 왔다. 그것도 다음 호에 신예작가로 소개하고 집중 조명하는 코너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소설을 그만두겠다고 하나님께 항복했는데 그러고 몇 주일 지나지 않아서 청탁이 오다니!

더구나 전화를 해 준 분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편집위원이었다. 그렇게 해서 열흘 정도의 말미를 가지고 단편소설을 하나 정리해야 했다. 쓴 것 중에서 단편집에 수록되지 않는 작품 몇 개를 놓고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 한 편을 골랐고, 그 소설을 세밀하게 읽어보니 영 말씀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퇴고가 시작되었다. 밀퇴, 두드릴 고. 며칠을 원고 앞에 코를 박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밀고 두드렸지만 영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렇게 오래 동안 소설을 써왔건만 원고지 100매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을 가지고 그렇게 고민해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심도 깊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내가 원하는 만큼 멋지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면서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가 소설 그만두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제야 청탁을 받게 하셔서 이렇게 날밤을 새우며 고민하게 만드십니까! 출판사 측에서 요구한 마감일을 사흘 앞두고 나는 모든 것이 지겨워지고 말았다. 더 이상 고치는 것도, 여기저기 들여다보면서 한숨 쉬는 것도.

“아, 정말 지긋지긋하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렇게 내뱉은 나를 발견하고는 또 내 자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이제까지 소설을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끔찍하도록 싫어졌다. 아! 나는 그제야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알았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은 나에게서 억지로 소설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어던지게 만드셨던 것이다. 마감날 아침 소설을 송부하면서 나는 더할 나위없는 자유함을 만끽했다. 이제 나는 자유다! 소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앞일은 모른다. 하나님이 또 어느 순간, 완전히 내려놓은 소설을 다시 내 손에 쥐어 주실지...

그 이후 보름이 더 지난 지금 이 시각까지 소설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솔직하게 고백컨대 어느 한 날, 적어도 십여 년의 습작기간 동안에는, 소설이 나의 우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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