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사야 53:1~3/새번역>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우리 아들 말에 의하면 유흥업소가 노는 날이 일 년에 딱 하루. 바로 오늘. 음주가무를 즐기기 힘든 상황이지요. 하지만 순국선열들은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어 낸 평화, 그리고 발전한 나라에서, 후손들인 우리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충일 10시가 되면 사이렌이 불지요. 저는 꼭 묵념을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배당 단상 위에 태극기가 걸려있는 것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할 정도로, 그다지 애국자는 아니지만 순국선열에 대하여는 또 다른 감정이 있습니다. 수백만 명을 감동시킨 영화, “태극기가 휘날리며”를 보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빡빡한 가슴으로 눈 똥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분석만 하고 앉아있는 나를 보고 같이 영화를 본 우리 아들이 엄마는 참 문제가 많다고 했지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도 쉽지 않고, 내 가족을 위해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자의거나, 타의거나 간에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것처럼 숭고한 일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순국선열에게 빚을 지고 있고, 신앙 안에서는 예수님께 평생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인 거 같습니다. 빚진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기도 하고 염치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오늘 제가 찾은 성경은 12월이 되면 즐겨 찾게 되는 성경구절인데 현충일에 하기에는 약간 좀 그렇지요...
예수님을 예시, 예언한 구절로 알려진 이사야 53장을 보겠습니다.
내 취미 중의 하나가 성경책에 밑줄 긋기입니다. 날짜, 적고 색색 형광펜으로 밑줄 그으면 얼마나 기분이 찢어지는지 모릅니다.
어차피 말씀 전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므로 저 역시 제가 느낀 생각을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네요.
그런데 이 구절은 참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온 구절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저는 첫 번째로 가장 가슴 아픈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언제인가 이 구절을 읽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느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나에게 멸시를 당했고, 나에게 버림을 받았고, 나 때문에 고통을 많이 겪었고, 나 때문에 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 예수가 싫어서 얼굴을 돌렸고, 그런 예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예수가 계시던 시절, 바로 그곳에 내가 살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분명, 나는 예수의 허술한 모습을 보고 절대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나 본성에도 예수를 잘 따르려 하지 않는 심리가 있다는 것.
나는 가끔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 이 말씀에서 느낀 것은 이웃을 느꼈습니다.
예전, 순자씨라고 있었어요. 갈릴리 성가대를 할 때인데 일찍 교회에 가면 지하 로비에서 만나는 사람이었지요. 약간 모자란 아주머니였는데 대개의 사람들이 무시하는 편이었고, 저 역시 관심 없이 지나쳤는데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사야서의 예수님과 너무도 닮아있는 것입니다. 그 분을 아시는 분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지요. 나는 가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칩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어요. 우리 속회에 그런 분이 한 분 계시거든요.
말하면 엉뚱하고, 다른 말씀 잘하시고, 너무너무 가난하시고, 볼품없고, 버림받았고, 지금도 고통을 많이 당하고 계시고, 그리고 병이 있지요.
속회 때 가끔 하는 이야기지만 지금 이 곳에 있는 분들이 서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내가 이 중에서 제일 못났다. 제일 낮은 자라는 자각이나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예수님이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체크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게도 예수님이 한 분 계신데요. 바로 우리 남편인 이 권사님입니다. 근데 그 예수님이 어찌나 심통도 잘 부리고, 꼬장도 잘 피우고, 삐지기도 잘하고, 아닌 말로 시험에도 어찌나 잘 드는지, 마치 시험 들기 위하여 교회 오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말합니다. 예수님, 오늘은 왜 그렇게 삐지셨나요? 그러면 놀린다고 더 화를 냅니다만.
한 가지 매우 이상한 사실은 우리 이 권사님은 참으로 눈이 좋다는 것이지요. 누가 졸았다거나, 누가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누가 싸가지가 없다거나, 하는 것은 주일 설교 말씀보다 훨씬 은혜롭게 접수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나를 앉혀놓고 따지는 겁니다. 대체 그 사람은 왜 그 모양이냐, 저 모양이냐. 그러면 저는 예수님, 당신은 왜 그 모양이냐, 하고 되묻고 싶지만 속 좁은 예수님이 화낼까봐 설설 기고 마는 것이지요. 저는 같이 사는 저 예수님 때문에 속이 타서 못 살겠습니다.
소설가에게는 작가적 관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내게는 늘 두 가지가 있죠.
이 아무개 권사의 눈으로 보는 것과 작가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좀 차이가 나지요. 교회 안에서의 나와 교회를 밖에서 보는 내가 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한국의 개신교는 보편타당한 종교가 아니고, 우리나라의 기독교 양태가 자기 교회 지도자의 신앙 칼라에 교인들이 좌지우지되는 원인도 한 몫 작용하는 것이지요. 즉, 자신이 속한 그 교회 지도자가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전부 다 인 줄 알고 있기에, 당연히 교회 지도자의 선입견이나 무지 또한 고스란히 그대로 따라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목회자가 바뀜으로 해서 많은 영역의 패러다임도 바뀌게 되고 담임목사님도 말씀하시지만 리더 쉽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체제가 변화되는 실정이지요. 보수 측인 신학대학과 진보 측의 신학대학에서 배우는 내용들이 놀랍게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감신, 목원대는 진보 측에 있는 신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 역시 목회자에 따라 바뀌는 것이죠.
이미 한국의 개신교는 <어느 누구나 오는> 보편 타당성을 많이 잃어가고 있지요. 주일에는 쉴 수 있는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나,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헌금 내시기 힘든 분이라거나, 너무 배운 것이 없어서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기를 꺼려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친정 엄마가 그러합니다. 교회에 다니기 싫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 읽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사십 년 가까이 다니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대단히 엘리트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울 시내에 자리 잡고 있는 100년 된 교회, 천명이 넘는 교인 수, 삼사 대를 이어가는 신앙의 전통들이 결국 그렇게 고상한 교회를 이루어내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보편타당성을 잃으면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교인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상과 마찬가지로 있는 사람은 많이 추앙받고, 많이 배우거나 권력이 있는 분들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지닌 권력지향적인 본능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정 반대를 지향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마음속으로 약간 미워한 어느 장로님이 계신데 그분은 어느 집사님을 꼭 박사, 박사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에 박사님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박사는 커녕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지요.
속회에서도 종종 그런 말이 오갑니다. 배운 사람은 틀려. 집안이 참 좋구만. 예의 바른 것을 보니 교육을 잘 받은 것이 틀림없어.
또는 예전에 어디 학교를 나왔느니, 예전에 뭐가 있었느니, 장관을 했느니, 그런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으시지요. 그럴 때 저는 마음이 참 움추러듭니다. 그곳에는 그런 좋은 곳에는 평생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분도 계시니까요.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은 연관이 없지요. 그 분이 예전에 교양 있는 집안에서 행세를 했는지 안했는지도 연관이 없지요.
사람의 기억력은 비상해서 어느 사람의 숨기고 싶은 약점은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억합니다. 아니, 제가 키노르를 해서 좀 아는데 그 사람이 죽고 나서도 사람들간에 이야기거리가 됩니다. 저 사람 옛날에 주먹 좀 썼대, 또는 저 사람 옛날 다방 마담이었다네, 아니면 저 사람 첩이었대.
예수님의 보혈로 그 사람의 상처를 깨끗하게 하시고 눈처럼 하얗게 만들어 준적이 옛날 고리짝인데 예수님도 다 잊어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그 사람의 죄성 있는 과거를, 사람들은 그것을 끈질기게도 기억하고,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전파하기까지 합니다.
거기다가 보태기까지 하지요. 누군가에 대하여 좋은 인식을 말하려고 하면, 체, 뭘 모르시네. 저 사람 예전에 어땠는지 알아? 하면서 전혀 알고 싶지도 않은 편협된 비리를 잘 부풀려 이야기해주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멸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서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자랑하려면 부득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했던 바울의 말씀도 있지만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도 했고, 그리고 자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연약하여 늘 자랑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이 용두동 교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지요.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 라는 뜻이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비단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도 필요하다는 저의 생각입니다.
없는 자, 가지지 못한 자, 배우지 못한 자,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자에 대한 배려 없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믿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분복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살기도 하고 어느 사람은 평생 괴롭고 힘들게 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평생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고 고상하게 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병에 시달리거나, 갖가지 힘든 문제를 끌어안고 거센 풍랑 속에서 일생을 살기도 하는 것이지요.
싸이코 패스가 범죄를 저질러 떠들썩하고, 어린이 성추행을 하고, 인면수심의 많은 문제적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 밤길도 함부로 가지 못하는 세상에서 교회의 역할이나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새삼 다시 되집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원하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살아갈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신앙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교회는 일정한 수준이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우리 소망 찬양대를 한 번 볼까요. 우리들 역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수준 있는 성가대입니다. 악보를 볼 줄 알고, 발성도 어느 정도는 되는 분들이고, 게다가 최우선적으로 하나님 찬양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주일에 쉴 수 있는 여건이 있고, 가끔은 클래식 콘서트에도 가는 것이 그다지 낯 선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문화적인 생활을 누린다고 해야 할까요.
뿐입니까. 아침 일찍 교회에 오려면 여러 가지 집안에서 도와주고 이해해주는 측면이 있어야 하는데 그 문제들도 대개 해결되는 모양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른 아침 교회에 뛰어가 성가대를 할 정도의 신앙과 여건이 어느 정도는 허락되어 있는, 축복된 위치에 있다는 것이지요.
대개 성가대원을 보니 교사를 하거나, 여러 곳의 성가대를 하는 등 교회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봉사하시는 분이 거의 다 인 것 같습니다. 제가 살짝 연배를 살펴보니 이미 우리 교회에서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중심적 위치의 연배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소망 찬양대 대원 모두는 우리 교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분들이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신앙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이미 가지고 있는 기존의 배움, 지식, 물질, 권력의 울타리를 넘어서 먼저 신앙을 가진 자로서의 역할을 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마음속으로 살짝 멸시할 때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일지도 모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고, 흠모할 아름다운 모습이 없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일지도 모릅니다. 잘나지도 않았고, 배운 것도 없고, 말하는 것도 어눌하여 도무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사람이 바로 예수님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찬양을 사랑합니다. 찬양하는 것을 너무도 좋아합니다. 거의 매일 그렇지만 어제 밤에도 꿈속에서 주일 찬양 연습곡을 신나게 불렀습니다. 제가 뭐 노래방을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 년에 한 두 번 겨우 가거든요. 하지만 찬양곡은 다릅니다. 전혀 달라요.
저의 마음에 분란이 올 때 찬양곡의 가사들이 얼마나 나에게 평화를 위로를 또 다른 힘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저 역시 중고등부 시절부터 찬양대를 고수해온 이래 그야말로 찬양하는 맛에 들려 이미 중독되어 있는 상태이지요. 피스를 가지고 가서 연습하거나, 집에서 가끔 키보드나 피아노를 두들기면서 찬양하기를 즐겨한다거나, 수십 년 동안 찬양대에서 훔쳐온 악보들이 책장 맨 아래 칸에 꽉 차 있을 정도로 열심히 기도 합니다. 아깝지만 얼마 전 다 처리해버렸지만.
생각해보니 저의 교회에서의 일 년은 부활절 칸타타에서 추수감사 특별찬양, 그리고 크리스마스칸타타로 눈 깜빡할 새 지나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축복된 삶을 살아온 것이 틀림없고, 그 시간 모두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귀한 시간이었지요.
제가 계란을 참 좋아하거든요. 며칠 전인가 계란 프라이를 먹으면서 우리 권사님에게 그랬어요. 여보, 나 죽을 때 계란 좀 넣어주세용. 그랬더니 그렇게 좋아하는 감자와 김도 넣어주겠다고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이 권사님에게도 말했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한 것이 있는데요. 저는 죽으면 성가대 가운을 입혀달라고 했습니다.
언제인가 성가대 가운을 입는데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거든요. 어떻게 나 같은 존재가 이런 은혜의 가운을 입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그 감사가 사무쳤습니다. 가끔 성가대석에 앉아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있을까.
언제인가 안명세 목사님... 금란교회... 짓는 중인데 대단하다. 정말 기적이다. 그런데 제가 말했어요. 저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더 대단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그것이 더 기적입니다.
세 번째, 성경말씀에서 나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어느 순간, 성경속의 초라한 사람이 바로 나, 이전 예수님을 몰랐던 때의 나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가끔 넘어질 때면 저런 가엾은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지요.
성경말씀에서 그를 나로 대입하여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나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내가 멸시를 받으니,
아무도 덩달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한 나의 모습을 찬양대원의 자리까지 올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대개 오래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감격에 대해 무디어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찬양대의 자리는 항상 그 은혜가 살아 움직여야 하고 그런 심정으로 부르는 감사의 찬양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교인들에게도 더욱 은혜가 될 거 같습니다.
우리 소망 찬양대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이때도 필요합니다.
먼저 은혜 받은 자, 그것은 세상에서 가진 자보다 더욱 귀한 보물을 가진 분들이지요. 이런 분들의 교회안에서의 도덕적 의무는, 삶의 굴곡과 고통 여정에서도 찬양드릴 수 있는 우리 소망 찬양대가 짊어져야 할 아름다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먼저 가진 우리 소망 찬양대 여러분이 우리 교회 곳곳에서 빛을 발하셔서 귀한 사랑의 손길과 아름다운 마음으로 우리 교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참, 잊은 것이 있습니다.
특히 집안의 삐짐 잘하는 예수님들께 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남모르게 멸시받고 천대받고 인정받지 못하고 구석에서 소외되어있는 분들을 끌어안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갈 수 있도록 우리 소망 찬양대가 그 역할을 힘써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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