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을 토론하라!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각, 오래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믿음의 동역자이기도 한 친구는 좀 흥분된 상태인 듯, 한 밤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가 톡톡 튀었다.
“100분 토론 봤어?”
나는 작업 중이었고, 마감이 코앞이라 정신없이 바쁜 상태였다. 나는 바쁘다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는 막무가내였다. 그녀가 나에게 내 준 숙제는 <뉴스 후> 3일치 방영분과 <100분 토론>을 인터넷 다시보기로 꼭 보라는 것이었다.
일단 친구의 말을 존중하여 그 바쁜 시간을 쪼개 이틀에 걸쳐 숙제를 마쳤다. 나는 내가 그렇게도 비관적인 한숨을 잘 쉬는 인간인 줄 그 때 처음 알았다.
방송을 보신 분이나 방송에 대하여 들으신 분들도 그렇게 느끼셨겠지만 방송 내용은 종교, 특히 한국의 개신교에 대하여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거의 한 달 동안 방송사에서 집중적으로 때린(?) 교회 측의 반론도 만만치 않아, 신문 광고를 통하여 대대적인 반론을 전개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라 느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이제는 공영방송에서조차 개신교를 3회 연속 시리즈(한 번으로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것인가?)로 몰매를 때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주위에 있는 교인들 몇 분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대체적인 느낌은 ‘창피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창피했다. 무엇이, 왜 그렇게 창피했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대답하지 않을 작정이다. 말이라는 것은 해야 할 말도 있지만 마음속에 숨겨놓은 말도 있으니까.
방송 내용은 대단히 험악(?)했다. 그 방송을 시청한 미래의 교인들이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우수수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보면서도 얼굴이 뜨듯해지는 내용만 잔뜩 늘어놓고 맨 나중에 ‘바람직한 교회도 있습디다“ 하면서 양념처럼 겨우 몇 개 교회를 보여주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좋은 교회, 좋은 목회자, 좋은 교인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이럴 때 우리 교회를 좀 취재하여 위상을 높여야 하는 건데^^)
하지만 제일 창피를 당한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예수님 얼굴에 먹칠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다음 글은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삼십 몇 년 교회 생활(믿음 생활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을 하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사회에서 떠들썩하게 이슈가 되는 문제들을, 그것이 교회와 관련 된 것이든, 아니든 내용에 관계없이 교회 안에서는 별로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삶의 현장과 신앙의 현장을 이분하는 결과를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 혹은 예수님 말씀을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적용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100분 토론에 대하여 토론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토론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쉬쉬하면서 음성적으로 더욱 활발하게 토론(원색적으로 말하면 씹는 것)하면서 좌충우돌하고,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는 바람에 어느 쪽으로 푯대를 세워야 할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럴 때 윗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기도하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신다!
방송에서 거의 다섯 시간에 걸쳐 거론된 수많은 문제에 대하여는 수 십 년 교회에 다닌 나로서도 알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렵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손석희도 못 말리는 그들의 주장을 내가 말리기 힘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어차피 자신의 위치가 어느 쪽이든 속해 있는 분들인데 그것에 대해 중도적 입장에서, 명확하게 말한다면 성경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각이라고 짐작되는 결론으로 유추해 내어 말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의심한다.
어느 단체나 사회조직에서도 보수와 진보는 공존하므로, 나름대로 역할 분담도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짐으로 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게 될 터. 문제는 이미 매우 보수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교회, 혹은 교단 측의 주장들에 대하여 교인이나 비교인이거나 간에 -그것의 진실 여부를 떠나- 그다지 설득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열린 교회는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을까?
거대담론을 말한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나는 참으로 소박한 생각 하나를 말해본다.
비교인이나 교인을 막론하고, 속속들이 파헤쳐진 오류 지적과 질타에 대하여 눈을 열고 귀를 열고 있는 교회라면, 작은 목자라는 속장 앞에서 큰 목자들이 사실에 입각한 입장 표명이나, 하다못해 다소 이기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뭔가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대화가 오가야 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통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고, 서로 소통됨으로 해서 교회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속회를 이끌고 있는 작은 목자라는 속장들에게만이라도 100분 토론을 토론할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선량하고 순수한 속도들이 눈을 반짝이며 방송 내용에 대하여 물어올 때, 잘 설명해 주고, 더 이상 예수님이 상처받지 않는 교회나 교인들이 되기 위하여 서로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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