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맨날 저쪽에 글을 쓰면 이쪽 류의 글이 흘러나오는지....쯧)
내 삶 속의 당신
들꽃이 담긴 유리병을 바라본다. 들꽃을 따온 사람은 나이고 들꽃을 유리병에 잘 꽂아놓은 사람은 남편이다.
대체 어쩌다가 길가의 들꽃을 꺾어들고 산책을 했더란 말인가. 어쩌자고 저것들의 줄기를 잡아채고 손아귀에 묻어나는 푸른 잎들의 자국과 풋풋한 내음까지 함께 낚아채었더란 말인가.
하얗고 작고 여린 들꽃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다. 산책길가에 피어있던 때보다 더 빨리 시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솔로몬의 영광이 들꽃만도 못하다는 말씀이 나를 사로잡는다.
나의 삶 속에 길가의 들꽃이 스며들어왔다. 나의 삶 속에 들꽃이 존재하게 되었다. 들꽃의 은은한 향내가, 풀냄새가, 푸릇푸릇한 삶의 한순간이 프레임 속으로 들어왔다.
‘나의 삶이 나요,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은 내 삶 속의 당신’이라는 말에 힘입는다면 들꽃이 내 삶 속의 당신이 되어버린 나머지 들꽃과 나는 자타불이(自他不二)가 되어 버린 것을 알겠다. 삶의 순간에 만나는 이것은 나에게 기적과 다름없이 경이롭다.
이렇게 해서 나의 삶 속에 꽃이 피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꽃이 피었다. 그리고 나는 꽃이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일생은 그것의 탐구로 점철되어 왔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수많은 철학자들의 시도가 무위에 그친 것처럼 나 역시 답을 얻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의미를 지니고 나 자신만으로 답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평생을 허비하며 찾았던 그것이야말로 ‘생각 없음’이라고 (모질게)매도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자신에게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고, ‘나’를 벗어나는 거리의 역설을 말한 카프카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생각 없이 살아왔다. 어떤 목적의식도 없이 소망이나 지향점도 없이 그 흔한 비전 하나 없이.
그것을 일깨워준 사람에게 감사한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조금씩 알아가며 사는 것 같다. 옆에서 보면 너무도 명확한 것들이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아 평생 고생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자로 재듯 칼로 자르듯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신기했다. 도덕, 윤리 규범과 더불어 사회법에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착하고 순종적인 그들의 생각이 정말 신비했다.
나의 머릿속에 잔뜩 들어있는 물음표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많아지고 무거워지는 물음들을 해결해 준 것은 정작 사람들이 아니고 인문학이었다.
책 좀 읽으면 될 것을 몇 십 년 동안 얼마나 제자리에서 맴을 돌았는지 모르겠다. 광야 40년은 나의 인생의 햇수와 거의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고생은 좀 했지만 충만한 시간이었다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환란을 즐거워했다. 그 즐거운 환란은 가시와 고통과 화상자국 같은 흉터와 괴로움과 불면이 함께 하는 바람에 풍성해지긴 했으나... 궁극적으로는 슬펐다.
환란이라는 것이 물질적이거나 가시적인 것에 그친다면 상처가 깊지는 않았을 텐데 그곳에는 꼭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구애하고 나에게 몰입하는 나르시시즘 같은. 어느 땐 그것들이 나를 살게 하기도 했지.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궁극적인 슬픔 뒤에 찾아오는 부서짐, 깨짐은 정말 무섭고 힘든 시간이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나의 나됨을 (자랑하고 싶은, 난척하고 싶은)철저하게 부수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었다. 이렇게 나를 처절하게 깨부술 바에야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나를 만드셨나요.
만들 때 제대로 만드시지 하자 투성이로 세상에 내보내놓고서는...
개념 없이 산 세월이 만들어 준 흠집투성이 생은 즉흥적이었던, 만행에 가까운 실수들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그럼으로 나는 나의 나됨을, 어리석음을 나약함을 비겁함을 수치를 비로소 대면할 수 있었다. 아, 내 꼬라지가 이렇군요. 하나님 없이는 죽은 목숨이군요. 그것을 하나님은 은혜라고 하신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에 의한 것인가?"
이성을 초월하는 심정의 독자성을 말한 파스칼은 이런 질문을 던져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또한 미셀 앙리는 자아의 존재 의미가 연구의 주제라고 말했다.
그의 현상학은 지향성이란 사색의 길을 밟지 않고, 사물의 기본적인 나타남은 순수한 의식이며, "자기 자신으로 자기를 느끼는 일"이라는 입장에서 독자적인 생의 현상학을 펼친다.
나의 생에서 가장 사랑한 존재인 나. 자기 자신으로 자기를 느끼는 일에 평생을 다 바친 나. 저 들꽃처럼 향기를 내뿜으며 나의 중심에 있던 나의 나는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하지만 서서히 시들어가는 들꽃처럼 날마다 조금씩 기꺼이 죽어갈 것이며 존재의 중심에 하나님이 온전히 스며들기까지 더 열심히 죽어갈 것이며, 그 자리에 나의 감각을 복권시켜 있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아름다움과 슬픔을 초월한 지점이면서 아름다움과 슬픔이 겹치는 지점, 그 지점에서 내 자신이 언어가 되고, 그 지점이 쓰기의 지점이라니 더욱.
예술의 운동은 지각을 떠나 감각을 복권시키는 것이라니 더욱.
이것이 또 다른, 내 삶 속의 당신으로 탄생될 것이므로 더욱.
(원고지 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