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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간의 기원

사라진 것들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5. 12. 23.

어제 독서회 책 발간을 위한 작은 모임이 있었다.

독서회가 어느새 40여 회를 넘어섰고 자료집과 발표자 리포트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마련한 장이었다.

채식 부페에서 동지 팥죽을 두 그릇이나 먹고 옆의 럭셔리한 카페로 옮겼다. 커피 한 잔 마시려고 했는데 화덕피자가 유명하다는 말에

고르곤졸라 피자와 맥주를 선택했다. 그러니까 점심을 연이어 두 번 먹은 셈이다. 영혼의 양식을 그렇게 배불리 먹었으면 좋으련만 식탐이 많은 나는 결국 또 과식을 하고 말았다.

최다 발표자의 반열에 선 나는 이제껏 발표한 리포트를 요약하라는 미션을 받았다.

순간, 살짝 당황이 되었다. 분명 어딘가 파일이 있어야 하는데 노트북을 개비하면서 어느 구석에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미미한 의혹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그속에 잘 있겠지?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불안은 무엇일까.

 

뒤숭숭한 꿈속을 헤매이다 너무 일찍 눈이 떠졌다. 4시 몇 분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노트북을 뒤지기 시작했다. 드립커피가 다 식어빠지도록 찾았다. 없었다.

잡스러운 글들은 여기저기 깨진 유리조각처럼 흉물스럽게 산재해 있는 것이 정말 눈에 거슬렀다. 오, 하나님.

리포트 좀 찾아주세요.

거의 두 시간을 찾았다. 그만큼 글들이 두서없이 있었다. 어느 구석에 박혀있을 것 같아 정말 열심히 찾았는데 없다.

메롱 하시는 하나님.

문득 USB에 저장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USB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알량한 USB 역시 없었다.

 

마지막으로 독서회 자료를 대강 쌓아둔 박스를 베란다까지 진출했다. 그곳에서 인쇄물로 남아있는 다섯 개의 리포트를 찾아냈다. 하지만 가장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조지 오웰의 '1984'와 '박수근 평전' 리포트는 창고 속 서류 더미 어느 구석에 박혔는지 안 보인다. 책을 발간한다면 두 개의 리포트를 어떡하든 찾아내야 하고(파일로 저장되어있는 것을 찾는 것은 포기했다) 모든 인쇄물을 내가 다시 파일화해야 한다는 미션이 다시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정리'에 취약한 나의 잘못이므로 할말은 없지만 새벽부터 정말 내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새해에는 부디 내가 나를 미워할 일은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내친김에 책상 위에 있는 쓰레기같은 서류, 자료, 다 읽어치운 책(그 속에 정호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로써 필사를 끝낸 정호승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인지 '기쁨이 슬픔에게'인지 하여튼 제목도 헷갈리는 삼류 시집-그런데 그게 어떻게 창비에서 나왔지?-를 저 멀리 눈에 안보이는 곳으로 던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아침 불행에 휩싸인 나에게 조금은 위안을 주었지)을 책꽂이 틈새로 밀어넣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반 정도는 정리가 된 것 같다.

 

다시 노트북을 들여다 보았다.

원래 새것으로 개비하면서 이전의 파일은 거의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절이 지나친 컴닥터 기사님이 알뜰살뜰 모두 옮겨주는 바람에 다시 쓰레기처럼 변해버린 새 노트북이 가여울 정도이다.

이제는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다. 식은 커피를 마시면서 한숨 쉬면서 가슴을 치고 있는 시간이다.

사라져야 할 것들은 쓰레기처럼 쌓여있고 필요한 것들은 사라진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올해가 가기 전에 모든 문서 파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다.

 

노트북 문서 정리

서랍 정리

그리고 이참에

인간 정리도

 

누군가의 기억에서 나도 사라지고 싶은데 그것은 어떻게 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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