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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었다

서영훈 목사님/ 성도의 감사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5. 2. 22.

하나님의 은혜로 한 달 전 서영훈 목사님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고 그후부터 날마다 조금씩(많이 진도나갈 수 없었다. 너무 귀해서)

꿀처럼 달콤하며 포르노(으윽)처럼 강렬한 말씀을 읽고 보고 들었다. 아, 감사하여라 나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여!

새벽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미진한 부분은 다시 되돌려 읽고 보았다. 그 깊고 아름다운 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내내 목사님과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리하여 기초신앙강좌와 올해 말씀학교 고린도후서를 다 보게 되었다. 앞으로도 공부할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마치 보물같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사님이 오늘 올리신 단상을 조심조심 퍼왔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주시는 생수가 아닌가말이다!

나의 마음에 깊게 새겨야 할 말씀! 영원히 되새기면서 살아야 할 말씀!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생각같아서는 많이 복사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사도바울은 롬7장 말미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바울은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의롭고 거룩한 것이 없음은 물론이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악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자기 속에는 죄만 있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는 죄로 점철된 자이며 죄 자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선에 이를 아무런 가능성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선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선을 좋아하지도 않고 선을 추구할 마음도 없습니다. 자기는 죄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바라거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께 관심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늘 죄를 좋아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이 죄를 짓게 한다는 말은 자기가 죄이기에 죄가 죄를 낳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철저한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내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성에 대해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종교적 행사를 많이 하면서 자꾸만 자기 가치를 챙기고 자기 가치에 의해 보람을 느끼려고 하지 바울과 같이 자기 가치의 철저한 무가치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복음을 진짜 깨닫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무가치성과 죄성과 참으로 밥 알 한 톨만큼의 가능성도 없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말은 그 악이 대세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 악이 나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는 그냥 죄입니다. 죄덩어리이며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도무지 나의 힘으로는 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나는 죄를 좋아하고 죄만 추구하고 죄의 자식입니다. 

23절도 이렇습니다.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나는 늘 죄의 법 아래에 사로잡혀 갑니다. 늘 죄가 나를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도무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죄를 더 사랑하고 더 기뻐하는데 무슨 선을 행합니까? 나라는 죄인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기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놔두십니다. 죄인 된 상태 그대로 두십니다. 죄에 팔려가도록 놔두십니다. 도와주지 않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막아주시면 됐습니다. 5분만 밧세바가 일찍 방에 들어가도록 했으면 다윗이 범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윗이 10분만 늦게 지붕에 올라갔으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아주지 않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고 간음을 하도록 놔두십니다. 그렇게 다윗이라는 존재가 철저히 썩어버린 죄인이 불과함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나는 모태에서부터 악한 죄인이다, 이것이 시51편에서 다윗의 고백으로 터져나옵니다. 다윗은 자기가 좀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조성될 때부터 악질이며 악한이며 썩은 자이며 죽일 놈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못짓게 도와주지 않습니다. 놔두십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죄를 더 좋아하고 죄의 지배를 받으며 내 자체가 죄임을 깨닫게 하여 내 자신에게서는 아무런 가치와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철저히 엎어져 예수만 붙잡게 만들어 가십니다. 나 자신에게서 아무런 가치와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해야만 예수를 향한 간절함이 나옵니다. 예수가 나를 쓰레기 더미에서 똑같은 쓰레기임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나를 건져올려 그 무가치한 인생을 존재로 인정해 주시고 그 쓰레기를 위해 죽어 또한 그 쓰레기를 자녀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해 주신다는 것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감사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나 자신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걸 붙잡으면서 나의 성숙과 발전과 계발이 신앙의 목적으로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예수의 은혜가 뭔지를 모르는 문외한에 불과합니다. 더 자기 자아의 자랑과 교만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박살이 나야 합니다. 나의 모든 행위와 생각과 행동이 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수준까지 가야만 거기서 바울이 이 고백이 등장하게 됩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지금 바울은 갓 예수를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가 되고 꽤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입니다. 이제 겨우 예수를 믿고 초신자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이 고백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의 빛으로 들어갈수록 이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빛이 비추지 않는 흑암의 상태입니다. 눈이 먼 소경의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과 무가치함의 발견으로 인해 한탄이 나와야 합니다. 아 나는 진짜 무가치하구나, 나는 죄만 짓는 쓰레기에 불과하구나... 진짜 이 고백이 있습니까? 진짜 예수 앞에서의 자기의 패역함과 더러움과 쓰레기됨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까. 전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나는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그래서 나는 예수 잘 믿고 있다..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태반이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쓰레기요 벌레라는 고백이 없이는 절대 예수 안 붙듭니다. 절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를 진짜 믿고 있는가 자문해야 합니다. 진짜 자기를 들어다 봐야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를 붙들지 않습니다. 자기를 붙듭니다. 자기 성공과 야망과 욕망을 붙듭니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직 예수 아니면 나는 죽는다는 절박한 고백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이러한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에게서는 어떤 근거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냥 지옥에 던져야 마땅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냥 지옥에 던지는 것이 합당함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지옥에 던진다 해도 아무런 불평 할 수 없는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런 요구를 할 수 없는 죄만 좋아하고 죄만 추구하고 죄만 사랑하는 자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예수의 십자가 은혜가 부어져 쓰레기를 무한한 가치인 예수의 가치와 맞바꾸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다. 절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 은혜가 나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 은혜만 붙드는 것입니다. 매우 수동적입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구원의 근거가 없고 지옥게 가야 하며 저주를 받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그래야 말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나를 구원하시겠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오히려 하나님을 반대하고 미워하고 저주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절망적 인생입니다. 가능성이 1%도 되지 않습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절망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해가 되며 배설물과 같은 인생입니다.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도 죄 짓고 내일도 죄를 짓습니다. 예수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전부 나의 영광과 행복을 위해 살아갑니다. 사망의 몸입니다. 시체와 묶여 썩은 내가 진동을하고 구더기가 눈을 뚫고 나와 진물이 흐르는 상태의 사망의 몸입니다. 죄인의 몸입니다. 내가 그런 존재라고 바울이 고백을 합니다. 자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망입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논조가 바뀝니다.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뭐가 감사합니까?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하답니다. 이 감사가 터져나옵니다. 나는 절망이고 죄 뿐이고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서 완벽한 절망인데 그런 소망 없는 자,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를 구원하시니 그게 감사하답니다. 예수가 아니면 나는 지옥행이고 예수가 아니면 영원한 저주의 상태인데 그 완벽한 절망인 자를 예수가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은혜로 덮어버리니 이것이 너무 감사하답니다. 

지금 죄를 짓는 자신의 상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바울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죄에게 팔려갑니다. 죄를 좋아하는 본질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말 절망적이어서 자신에게 아무런 가능성이 없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이룰 가능성이 전혀 없는 철저한 절망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무 가치 없는 자를 예수가 십자가 은혜로 덮어 구원을 해버리십니다. 그것이 감사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뭘 감사하고 있습니까? 내가 변화되는 것? 내가 성숙하는 것입니까? 그건 역시 나를 강화하고 내가 괜찮아져서 나 자신을 흐뭇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오직 예수만 기뻐하고 예수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진짜 그렇습니까? 내가 교회 잘 다니고 내가 헌금 잘 하고 내가 봉사 잘 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짜 바울과 같은 감사가 있습니까

내가 철저히 쓰레기임을 자각했기 때문에, 내가 예수께 해만 되고 배설물과 같은 무가치와 가능성 없음을 뼈저리게 자각했기 때문에, 뼛속까지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자기 존재에 대한 참된 절망에서 나오는 감사가 격발되고 있습니까. 

그게 구원받은자, 성도의 바른 반응입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나는 절대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죄를 이기고 죄를 덜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만 붙들게 되는 것, 예수만 소망임을 알게 되는 것이 곧 감사입니다. 이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