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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들었다

거룩한 비효율-김성수목사님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5. 2. 10.

거룩한 비효율 - 김성수 목사 (2009.12.3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요14장6절)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8장32절)


예일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엘리트집단을 가르치던 헨리 나우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헨리 나우웬이 홀연히 캐나다 토론토 교회에 정신지체공동체로 들어가서 여생을 보냅니다. 그런 헨리 나우웬의 모습에 의분을 느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필립 얀시입니다. 그 필립 얀시가 캐나다로 헨리 나우웬을 찾아가서 왜 고지에 엄청난 가능성을 버려두고 굳이 낮은 곳에 가서 기회를 낭비하느냐 라고 따집니다.


그때 헨리 나우웬은 필립 얀시에게 기독교 역사 내내 복음의 위대함이 입증된 때와 사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인물들에 관해서 물었고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기독교 복음의 위대함이 입증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해지던 때는 항상 기독교가 약자로서 핍박을 받을 때 이었고 그 부흥의 중심에 선 사람들 또한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였지 높은 명예나 권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으로 필립 얀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바드나 예일에서 많은 인재들을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거라고 착각하지 말아라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기독교 고지론으로 항의를 하러온 필립 얀시에게 오히려 기독교가 힘을 갖게 되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이 세상의 권세를 쥐게 되었을 때에 어김없이 기독교는 타락의 길을 갔다는 것을 반추시켜준 것입니다.


그때 필립 얀시가 성도의 삶에 본질인 거룩한 비효율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라고 그의 책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역설과 복음의 의외성을 그때 필립얀시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필립 얀시는 그 전까지의 자신의 신앙은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었음을 그 내용이 담긴 그의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이미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 힘은 신자가 높은 자리에서 크게 성공하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사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 데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십자가의 도를 헨리 나우웬은 필립 얀시에게 몸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도는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섬김으로 권위를 세우며 죽음으로 사는 그런 역설적 삶의 법칙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법칙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는 종교개혁 이전의 크리센덤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 보입니다. AD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림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그때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그 기나긴 크리센덤 시대가 이어집니다. 기독교의 위력이 로마의 힘과 결합을 하여 온 세상에 엄청난 힘으로 군림을 하게 된 때입니다. 그때가 사람들은 저마다 그 크리센덤 시대를 가리켜서 기독교의 부흥의 시대라고 칭송을 합니다. 그러나 메노나이트 신학교의 크라이더 교수는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주요 페러다임 전환을 크리센덤 시대의 도래로 보면서 그때를 초대 교회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전승한 그 복음이 완전히 왜곡된 시기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기독교가 힘을 소유하고 세상에 권세를 쥐었던 그 크리센덤 시대가 얼마나 타락을 하고 부패를 했었는지를 백일하에 보여줌으로 해서 기독교 패권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지를 여실히 폭로해 줍니다. 따라서 그러한 크리센덤 시대의 막을 내리고자 한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은 역사적 필연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크리센덤 시대 이후 즉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인 오늘날의 개혁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그 크리센덤 시대의 오류를 바로 잡아서 초대 교회에 진정한 복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의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혁교회는 무엇을 회복하여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조차 구별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해를 마무리 짓는 오늘 우리는 오늘날 개혁교회가 버려야 할 것과 회복해야 할 것을 돌아봄으로 해서 올바른 한해의 손익계산을 해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기독교가 막강한 힘과 권력으로 군림을 하던 크리센덤 시대는 기독교 고지론이란 것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에 힘과 권력을 쥐어야 한다라는 기독교 고지론은 최근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반복적이며 지속적이며 계속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회의 주변에 머물던 심지어 카타콤이라는 지하 무덤에 은신하여 살던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중심축으로 이동을 하면서 즉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그렇게 주변인으로 머물던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중심축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기독공동체가 영적 흡입력 대신에 권력과 출세와 명성에 기회를 제공하는 세력집단으로 부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황이 왕을 세웠다 폐위시켰다 하는 그런 권력까지 소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인간의 제도와 조직과 영향력을 신뢰하고 복음에 의한 자발적 회심이 아니라 개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압력 집단으로 변했고 검소한 예배와 내적 영적 내력 대신에 호화로운 건물과 현란한 예배 의식으로 세상에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그리고 교회의 초점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에서 예배당 현상 유지 및 몸집 불리기로 변질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게 크리센덤 시대의 특징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그러한 고지론에 입각한 기독교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무기로 삼는 하나님의 참 교회를 그리며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개혁교회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들의 피로 이루어낸 종교개혁의 의미를 완전히 퇴색시켜 버리고 또 다시 고지론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혀서 종교개혁 이전에 크리센덤 시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교회가 말씀의 능력을 상실하고 엉뚱한 비 본질적 부산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고 십자가의 도가 진정한 파워임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람들로 채워낼 수 없다라고 착각을 하고 다른 방법들을 동원하여 예배당을 채우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진검승부를 해야 됩니다. 교회에 문을 낮추고 연극이나 무용 멀티미디어 등을 예배에 동원하고 프로페셔널 연주인등을 돈을 주고 고용을 해서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서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어주고 때로는 적당하게 울려주기도 하면서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전하겠다라는 발상은 기특한 발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에 권위를 교회 스스로가 땅에 던지고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능력이 없으니까 우리가 우리의 방법으로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건 진검승부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식의 사고는 교회라는 단어의 정의조차 모르는 무식한 발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적을 보고 모인 수많은 이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모아놓고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이 땅에서 세상적 방법으로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세상적 성공과 번영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성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자기의 삶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는 일을 방해받을 수 없다라는 그런 절박한 신앙고백을 굳게 지켜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 거룩한 그 비효율에 파워와 복음의 역설성과 그 복음에 의외성을 올바로 배우고 인식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완성되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삶으로 경험하며 사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연말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의래 하게 되는 것이 한 해의 손익계산입니다. 과연 나는 올 한 해 동안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이루어 내며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았는가, 나는 연초와 비교하여 얼마의 이윤을 챙겼고 얼마의 손해를 보았는가, 나는 작년과 비교하여 얼마나 더 부자가 되었는가, 등등 그러한 것으로 손익계산을 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사람들은 저마다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의해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고 결정지어 버립니다. 그래서 혹자는 예상치 못한 이윤에 감격을 하기도 하고 굉장히 행복해 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올해 못 이룬 꿈 내년에는 이루리라고 몇 년을 기대하면서 혼자 화이팅을 외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절망에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 절망감과 박탈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 모든 반응들이 전부 이 세상에서의 소득과 성공과 번영에 획득과 성취에만 집중하고 있는 잘못된 세계관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의 재화에 있고 없음에 의해서 이렇게 목숨까지도 버리는 안타까운 손익계산을 할까요. 누가 세상의 힘을 얻어내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실패자이며 낙오자라는 정의를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 놓은 것일까요.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의 판단에 의해서 평가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목숨까지도 그렇게 놓아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그게 하나님을 떠난 저주받은 세상의 실체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고 있는 이 세상의 종국적 결말 그것이 바로 그러한 모습 속에 투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행복해야 하고 하나님이 없으므로 불행해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이 하나님으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지 않고 이 세상의 다른 것들로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없으니까 마치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으로 스스로 판단을 내려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손익계산이 그들이 원하는 이 세상 힘의 획득과 손실로 결정 지워진다면 우리 성도의 손익은 무엇을 근거하여 계산되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역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그 복으로 손익계산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복을 얻어냈는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소원을 성취해 내었는가, 이런 것으로 한 해의 손익을 계산해서 행복과 불행, 감사와 원망을 내어 놓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손익계산입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성령과 함께 하는 순간부터 손해 보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절대 손해 보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모든 현실은 전부 이익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만난 그때부터 끝까지 플러스입니다. 마이너스를 요기서 잘라 그것을 자꾸 손익계산서의 오른쪽에 놓으시면 안됩니다. 인생은 기다란 플러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그것을 잘라서 손해라고 여기는 것 뿐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 어떤 경우라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삶입니다. 사고를 당하고 질병을 얻고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산산조각이 났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는 사람이면 그 삶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살아있는 그 자체가 전부 이익일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합력하여 자기 부인의 성취와 거룩의 완성이라는 그 목적지로 수렴이 되기 때문에 성도의 모든 인생은 이익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우리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쌓여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시키는 데에 거름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올 한해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올 한해가 우리 안에 쌓여서 그것이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되는데 거름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도화지 다 꾸겨서 날려 버리고 새 도화지에다가 써야지 그런 생각 가지시면 안됩니다. 우리들의 그 헌 도화지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입니다. 쫄딱 망했는데도 그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불치병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가치 있는 삶입니다. 우리 자식새끼가 올 한해 너무 속을 썩였습니다.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다면 그러니까 우리는 한해를 보내면서 난 참 올 한해 가치 없는 삶을 살았다는 둥 난 올 한해 손해만 보았다는 둥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해라는 식의 넋두리를 늘어놓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한 우리들의 한해는 모두다 최고의 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끌고 간 삶이 올 한해 우리들의 삶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쉬지도 않으시고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최선을 다해 이끌어온 한해를 우리들이 가치 없는 한해라고 폄하하거나 폄훼하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이 규정해 놓은 그러한 힘의 틀 안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평가해 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들의 한해는 외양으로 그 한해가 어떻게 나타났던지 간에 최고의 한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 한해도 하나님께로 깊숙이 성숙되어진 한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6장) 그러니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자로 죽어라고 올 한해 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망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성공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병이 걸린 것으로 드러날 수 있고 사고로도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전부 합력하여 우리들을 예수님께로 한발 더 끌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 한해 우리들의 모든 일상은 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잘 믿는 일에 사용된 것이므로 열심히 일을 한 것이며 그 삶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서 자신을 자랑하고 인기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번영 그리고 소유의 확대나 명성의 획득 등이 그들에 이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런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실제화 즉 십자가의 실제화의 복음이 내 삶속에서 실제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 한해 우리들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많이 나타날수록 우리들은 유익을 본 것 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지니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에베소서4장13-15절)


모든 면이라 함은 성공도 포함이 되고 실패도 포함이 되고 부유함도 포함이 되고 가난함도 포함이 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면에는 모두 우리의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들어난 피상적 현상이 어떠한 것인지에 관계없이 우리는 전부 감사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초인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하는게 간디나 테레사 수녀처럼 사랑의 화신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다 떨어져야 됩니다.

 

우리 삶속에서 그런 것은 15절에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라는 말을 잘 보셔야 됩니다. 사랑을 해서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희들을 그에게까지 자라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너희가 착한 일을 하여 그에게 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확 덮고 있는 데 그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딱 덥게 되면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착안 일을 하게 되고 그 착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착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착한일 거기서 그 착한 일을 하다라는 단어에 쓰인 헬라어가 알레뚜오입니다. 그건 진리를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안에서 예수의 사랑 안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진리를 너희들이 먼저 이해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너희들은 그리스도에게 자랄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모든 게 진리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거짓이 아닌 참 그게 진리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리가 예수다 그러는데 그 말뜻을 진짜 이해를 하십니까. 진리가 예수다 진리가 뭔지를 알아야 진리가 예수다 라는 말이 이해가 갈거 아닙니까.

 

사람들은 사실과 진리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은 어떠한 객관적인 그냥 현상을 가리켜서 사실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그것을 기준으로 선과 악이 구별이 되고 또 생명과 죽음이 설명되어져야 되고 또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결정적인 힘이 되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다시한번 진리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선과 악이 구별되어져야 되고 생명과 죽음이 설명되어져야 되고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결정적인 힘이 되는 것을 알레떼이아 진리라고 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으로 선과 악이 구별이 됩니까.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으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집니까. 그래서 그것을 사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인들의 세상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객관적 현상에 불과한 사실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주관에 의해서 해석 되어진 후에는 진리라는 잘못된 이름을 얻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 죄인들의 새상에서는 한마디로 죄인들은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즐깁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진리는 나의 칼이 되어서 다른 이를 심판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기 때문에 죄인들은 진리를 조작하고 생산해 내는 것을 아주 습관처럼 즐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실을 갖고 진리로 둔갑시켜서 자기들의 무기로 쓰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입니다.

 

죄인들이 진리를 조작해 내고 생산해 내는 과정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상호간에는 힘이 작용하게 되고 이 힘의 정도에 따라서 인간의 해석과 태도는 그 평가를 달리받게 됩니다. 그 힘이 어떻게 조성이 되고 획득되어졌는지는 중요하지가 않고 실제 사실이 어떠하다는 것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힘은 힘이면 되는 거고 사실은 사실이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 건 갈릴레요에게 있어서는 사실이였죠. 다른 한편 태양이 지구주위를 돈다라는 것은 또한 당시에 많은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에게 사실이였습니다. 실제 현상은 갈릴레오의 사실과 일치를 했지만 당시 종교 재판을 진행했던 지극히 상식적이며 지적이였던 그리고 권력을 갖고 있었던 그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비 진리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천동설이 진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가진 이들이 진리로 채택을 한 것은 선악과 옳고 그름에 판단기준이 되어서 사람을 심판하기도 했습니다.


갈릴레오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힘으로 그 세상적인 힘으로 만들어내고 조작해낸 진리라는 칼이 들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힘을 소유한 이들은 그 진리로 갈릴레오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인들은 진리를 조작해내고 생산해 내는 것을 아주 즐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떤 사람이 당시 권력에 의해 채택된 그 사실과 충돌하는 그런 바른 사실을 주장할 때 힘에 의해 채택된 그 사실은 순간 진리가 되어서 옳고 그름에 기준으로 행사를 하게 되고 심지어 다른 사실을 주장하는 자를 죽을 수 있는 힘까지 동시에 부여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들이 갖고 있는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요약을 하면 인간들은 자신의 주관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진 그 주관적 사실을 진리라고 밀어붙이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신처럼 되고 싶은 아담적 욕망에서 기인한 죄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지는 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맞던 맞지 않던 그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나는 옳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옳다. 지구가 태양을 돌던 태양이 지구를 돌던 그거는 애초에 관심이 없고 그 사실을 주장하는 내가 옳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걸 진리로 조작하고 둔갑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상대방을 난도질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소유한 세상이 이 세상에서 진리라고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 바로 도덕과 윤리 그리고 세상의 힘, 돈, 재화, 가치 이것을 많이 가진 자가 성공한 자고 그것을 많이 획득한 자가 휼룽한 자다, 그리고 그것을 많이 얻은 삶을 성공한 삶이라고 하고 그것을 많이 얻어가는 삶을 번영이라고 한다라고 하는 이것을 진리의 칼로 쥐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도덕과 윤리를 만들어서 우리도 이만큼 깨끗하게 살아낼 수 있다라고 우길 수 있어야 되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 말고 힘으로 소유하고 있는 의지하고 있는 그것들이 진자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고 가치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걸 진리로 꼭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걸 진리로 삼아서 그걸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난도질해버리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 넌 죽어도 싼 사람 그렇게 세상이 우리들에게 도장을 팍팍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장을 맞고 자기가 목매달아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작된 진리를 가지고 우리들을 미혹하는 마귀의 속임수일 뿐입니다. 거기에 참 진리인 예수가 하늘에서부터 뚫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놓고 내가 진리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다. 내가 진리이기 때문에 나로서만 너희는 착하고 악하고 너희는 생명이 있고 없고 나로서만 너희는 행복하고 불행한 자로 나눠져야 되. 이 세상에 힘이 있고 없고 병이 들고 안들고 사고를 당하고 안당하고 돈이 많고 없고 이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너희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행복과 불행으로 나눠지면 안되. 너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의 생과 사를 나누면 안되. 내가 진리야 그게 바로 내가 곧 진리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진의입니다.


우리들은 그 예수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연말 손익계산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진리인 예수가 우리들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불행한 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낙오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우리들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이 조작해 놓은 그러한 가짜 진리에 의해서 자신들을 평가하고 거기에 대해서 실망하고 그것 좀 얻어 냈다고 좋아서 헬렐레 하고 왜 연말을 그렇게 보내십니까. 왜 이렇게 우울하셨습니까. 그동안 왜 이렇게 아내 보기가 민망했습니까. 돈 못벌어다 줘서 그랬죠. 1년 동안 아니면 우리들은 그러한 사실로 그러한 사실에 불과한 현상으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면목없어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르죠 또 일도 안하고 일년내내 집에서 탱자 탱자 놀던 그런 사람들은 반성해야죠. 그런데 열심히 했는데 못번걸 어떻해. 열심히 했는데 망한걸 그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에게로 한발 더 성숙되어졌으면 우리들은 이익을 본 것입니다.

 

예수라는 진리에 의해서만 우리들은 우리들의 손익계산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이땅에 내려오면 이 수많은 사실들을 완전히 기각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딱 달리자 마자 하늘에 별이 떨어졌습니다. 태양이 빛을 잃었습니다. 무덤이 열리고 시체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사실이며 진리라고 믿는 것 죽은 사람 무덤에서 못나와야 되고 별은 떨어지면 안되며 태양이 빛을 일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인간들이 조작해 놓은 모든 진리라고 하는 것들이 예수님이 오시자 비진리로 폭로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라는 진리가 우리들의 삶속에 떨어지면 공격을 당해야 되고 아파야 됩니다. 자기들이 이미 조작해 놓은 진리로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을 가르고 있던 터에 내가 진리야 하고 진짜 진리가 와버리니 자기들이 여태까지 진리로 갖고 있던 것을 놓기가 싫어 진짜 진리를 죽여서 뭍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진짜 진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생과 사를 결정하는 힘이 있어 다시 살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진리를 죽인 비진리를 거짓으로 확 폭로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 예수가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진리이신 예수가 가득 담긴 말씀으로 계속 공격을 당하면서 우리들이 붙들고 있는 비진리들을 자꾸 하나하나 놓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현실이 어떠하든 예수 믿는 우리들이 복된 자들이고 선한 자들이고 가치 있는 자들이고 진짜 행복한 자들입니다. 예수 없이 착하게 사는 사람들을 선이라고 하지 않고 악이라고 합니다. 예수 없이 선악을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되며 다른 이들을 보고 함부로 저 사람은 삶이 왜 저모양이야 왜 이렇게 비 윤리적이야 부도덕적이야 이렇게 평가하시면 안됩니다. 예수안에서 예수가 그를 예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시키는 일이 부도덕하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와 관계된 그 일이 선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진리라고 결정해 놓은 거기에 일희일비 하시면 안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안 착할까, 나는 왜 이렇게 여전히 부도덕할까, 그러나 그런 것으로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죽는 날 까지 부도덕하게 살다 갈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나는 이런 존재 밖에 안되는구나, 그래서 나에게 예수님이 필요하구나 라고 꼭 붙드는 사람이 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땅에서 그런 세상 것 얻어내고 또 세상에서 착한 사람, 잘난 사람, 이렇게 인기 끄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나타나는 현상이 어떠하든 오직 예수 깨로 자라가는 그 삶에만 관심을 두고 집중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땅의 재화로 손익계산하는 사람들이 아닌 예수로 손익계산하는 사람입니다. 조금 손해보는 삶 괜찮습니다. 그리고 조금 불편한 삶 괜찮습니다. 시기와 모함과 질투와 험담에 가슴 아파하는 삶 괜찮습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삶 괜찮습니다. 누가 그 삶에 이름을 지었습니까. 그것은 세상이 이름을 지은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절대 불쌍한 사람이 아니며 실패한 사람이 아니며 망한 삶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너무 주눅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그런 거룩한 비효율 속에서 참다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예수로만 행복합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비유는 가난하면 무조건 천국가고 부자로 살면 무조건 지옥간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아무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다가 간다고 해도 나중에 천국 간 사람과 이 세상에서 날마다 열락하며 자색 옷 입을 정도로 굉장히 부자였다라고 할지라도 나중에 지옥가면 둘중에 누가 가치있는 행복한 삶을 산 것이냐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휴헤프너처럼 84세에 27살짜리 모델하고 결혼하고 플레이보이지 창간해서 죽는날까지 아주 그냥 떵떵거리면서 이 도덕과 윤리 위에서 그냥 육적 쾌락과 세상의 모든 편안함과 위세를 다 누리다 간 사람에게 무슨 예수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사람 그렇게 살다가 지옥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냥 이렇게 보잘 것 없이 살다가 나중에 천국갑니다. 자 어떤 삶이 더 가치있는 삶입니까. 휴 헤프너입니까. 그런데 왜 전부 휴 헤프너 같이 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입니까. 하나님에게 이왕이면 이쁜 여자, 이왕이면 많은 재산, 이왕이면 많은 지식 나 휴헤프너 만들어달라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쾌락 누리다 가게, 편안하게 살다 가게 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다가 지옥가면 도대체 그게 무슨 가치있는 삶이겠느냐가 거짓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