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회 모임에 가서 선생님께 드렸더니 남들 잡담하는 시간에 슬그머니 읽으시고는, 독서회 시간이 되자 자랑하고 싶으신 듯 주섬주섬 꺼내신다. 선생님이 읽어주려고 하시기에 내가 얼른 가서 대신 읽어드렸다. ㅋ)
선생님, 저예요. 미련한 제자.
수십 년을 선생님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못 닮는 제자.
그렇게도 많은 가르침을 바로 옆에서 조근조근 알려주시고 가르쳐주셨는데도
조금도 따라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
그래도 제자라고 불러주세요.
제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 중의 하나는
용두동교회에 다닌 것, 그리고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신 것.
허공에 상상속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나고 이야기 듣고
같이 웃고 맛난 거 먹고 그리고 가르침을 받은 것.
많은 분들이 저처럼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 압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소극적이어서 직접 선생님 앞에서는 한 말씀도 못드리지만
우리끼리 만나면 수군수군 뒷담화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시다! 멋지시다! 놀랍다! 존경스럽다! 이렇게요.
가끔 우리의 생각과 다른 말씀으로 우리를 놀래키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피천득이 말한 청자연적의 살짝 삐뚤어진 이파리처럼
요샛말로 포인트가 되어서 선생님을 더욱 매력있게
선생님을 더욱 선생님답게 만듭니다.
선생님. 그동안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선생님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양 어깨를 매순간 묵직하게 누르고
계시는 존재는 박진순 선생님 만은 아니었죠.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우리에게 마땅치 않은 모습도 참 많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선생님의 제자.
저는 날마다 샘솟는 기쁨과 감사와 감동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즘 더욱 힘드신 선생님을 보면서 저에게 닥친 모든 어려움이 솜사탕처럼
가볍고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길게 오래오래 지속되었군요!
외람되게도 이런 편지를 선생님은 앞으로 몇 번이나 받아보실 수 있을까,
그런 슬픈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세월은 가는 것이고, 선생님도 저도 계속 늙어가면서 아플 것이고
생의 어느 순간 작별의 때가 올 것이겠지요.
그 때 하지 못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선생님을 내 삶 속에서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십 년 동안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가장 어려울 때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다시 살아난 것도 감사드립니다.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나 그 빚을 한 푼도 갚지 못한 것,
죄송하긴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을 닮았더라면, 선생님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따라갔더라면
반쯤은 갚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선생님, 이제껏 살아온 것이 꿈 같습니다.
엊그제 창원에 갔었는데 안개가 자욱한 곳을 걸었습니다.
희미한 자연 속에서 마치 나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인생이 저는 좋습니다.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몸과 마음이 좀더 가쁜했으면 좋겠고, 마음의 짐, 어깨의 짐이 조금 가벼워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저는 선생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세요.
저의 마음속에 천사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는
사랑하는 박진순 선생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고요한 시간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 선생님과 저만 존재하는 것처럼 조용합니다.
저도 앞으로 조용히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고요를 책임져 주시겠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2018년 5월 늘 어리석은 제자, 이숙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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