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교회 홈피에 난리가 났다. 폐쇄 결정이 내려졌다고 하니 부랴부랴 내 글을 퍼서 옮겼다.
뭐...거의 이곳에 올린 글들이지만 그래도...그래서 일단 이곳으로 얌전하게 복사하여 옮기는 중^^;;)
비판을 들어보세요
(한 달 전 즈음일 겁니다... 사순절 특새를 다니면서 긴 시간을 MP3에 저장한 설교를 들으면서 오갔는데 어느 날 유독, 유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세 번을 연거퍼 되풀이해서 듣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동영상을 보면서 한 줄씩 말씀을 들으며 받아적어야 했습니다. 평생 내 가슴에 지녀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고도 모자라 말씀 후의 목사님 기도문을 다시 정성들여 필사했습니다. 어찌나 고생했는지 반나절은 족히 소비한 것 같습니다. 정말 한 자 한 자 받아쓰느라 개고생(?) 했지만 보람있었지요....어떤 말씀인지 궁금하시면 백주년 교회 가셔서 수요예배 말씀 클릭하시고 2011년 6월 8일자 수요예배를 여시면 <비판>이라는 제목의, 폭풍같은 말씀이 은혜로 쏟아질 것입니다. 설교자는 서영훈 목사라는, 잘 모르는 분입니다마는...요즘도 시간이 날 때마다, 혹은 나의 마음속에 쓸데없는 비판(여기서 부연설명을 하자면 쓸데있는 비판도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유다생각^^)이 도사리게 될 때마다 되뇌이고 또 되뇌이는 기도문이지만, 게으른 분들을 위하여 맛보기로 목사님의 기도문만 올려드립니다^^)
(우리교회 홈피가 폐쇄된다는 소문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퍼다 나르는 중이다. 아침부터, 그것도 금쪽같은 월요일 아침부터 개고생시키는 존재가 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넹.....)
<비판>의 서영훈 목사의 기도.
하나님.
우리는 비판함으로 내가 옳음을 증명해야 하고 남을 잡음으로 내 한계를 극복하는 것 밖에는 더 크고 넓은 수준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비판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그토록 지리멸렬한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이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선한 것을 찾거나 선택할 자유도 없는 노예라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안에 거룩이나 생명이나 사랑을 생산해 낼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도 우리는 하나님을 반항하고 거부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도 모두 이웃을 원수삼고 잡아 죽이는 것으로만 자기를 증명하는 인생들이라는 말입니다. 은혜의 하나님.
그러나 넉넉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로 찾아오셔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묶으심으로 다 도망갈 곳이 없고 율법보다 더 무서운 사랑의 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우리를 회복하시고 완성하겠다는 사랑의 의지를 나타내셔서 오늘도 우리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심정으로 성실히 찾아오시니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고 좌절할 것이지만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는 그래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다시 일어나 결국에는 승리의 자리로 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약한 무릎을 곧추 세워 인내의 자리로 갑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토록 단단한 서열
(가끔 쓰는 칼럼 하나 올립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 뿐 아니라 한국의 개신교회 교인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칼럼이어서 존칭이 생략되어 있는 부분은 양해 바랍니다^^)
그토록 단단한 서열
교인들끼리 식사를 할 때가 종종 있다.
주일, 교회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할 때도 있고, 장례식장에서 위로 예배 후 식사를 할 때도 있다. 그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단단한 서열이라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엊그제도 그랬다.
영안실에서의 일이다. 교인의 입관을 마치고 입관 예배를 드렸다.
유족들의 오열 속에 경건하게 예배를 드린 후 목회자들과 장로, 그리고 교인들이 삼십 여명 쯤 모여 장례식장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초지일관 변함없이 진행되는 서열의 모습을 보았다.
일테면 이런 것이다. 네 명 기준의 테이블을 몇 개씩 잇대어 놓은 식당의 제일 안쪽, 그러니까 상석에는 목회자와 장로들이 앉는다. 그 다음에는 전도사들이 절도 있게 자리를 잡고, 그 다음에는 권사 이하 순수 교인들이 자리를 잡는 식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서열대로 편을 가르는 풍경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또는 당연하게 연출되는지는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그런 모습이었으므로 참석자 모두 별 생각 없이 알아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교회에는 네 분의 목사와 네 분의 전도사, 몇 분의 수련 전도사 그리고 서른 몇 분의 장로가 있다.
제일 아래쪽, 권사 이하 평신도 쪽에 자리 잡은 나는 저만큼 떨어져 있는 목회자와 장로 테이블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슨 즐거운 이야기라도 오가는지 장례식장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가끔씩 터져 나올 만큼 참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들만 단단하게 뭉쳐있는 단단한 편가르기가 그 자리를 매우 편안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음식도 그 자리에는 유독 넘치고도 넘쳤다. 일을 돕는 도우미에 전도사까지 합세하여 접시를 포개어야 할 정도로 재빠른 배달이 이루어졌다.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목회자이거나 장로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접을 확실하게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자주 목격하는 평범한 교인들도 이력이 나서일까, 익숙해서일까, 그냥 당연히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들과 좀 달랐다.
어째서 그들은 그들대로 뭉쳐있는가?
천 명이 넘는 교인들을 일일이 찾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소수의 교인들이 모인 자리야말로 목사와 장로들이 교인들과 가까워지는 절호의 찬스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목사는 교인들을 꼭 대 심방 때에만 만나 손을 잡고 안부를 물어야 하는가?
십분 단위로 쪼개진 시간에 쫓겨 몇 마디 말도 못 나누는 형식적인 심방으로 교인들과 허심탄회한,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는가?
요즘에는, 장로들은 목사가 교인들과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장로들은 기획위원회와 각종 맡은바 직책과 한 달이 멀다하고 치러야 하는 각종 교회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장로들은 교회에 오면 회의하느라 교인들과 사사로운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실제로 나 역시 서른 명이 넘는 장로중에서 말한마디 나누어보지 않는 장로가 꽤 있거니와 형식적인 인사만 겨우 나누는 장로가 태반이다. 형식적인 인사란 어서오십시오, 건강은 어떠십니까, 그 정도이다. 명색이 작가인데 글은 잘 쓰시냐는 말은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예배 직후에 이루어지는 각종 회의-주보를 살펴보니 한 달에 두세 번은 회의가 있다-에 참석하시느라 교회를 들고나는 교인들과는 유명연예인들이 팬들 앞을 스쳐가면서 가벼운 악수를 하듯 하는 십분 남짓한 시간밖에 없다. 게다가 연이은 각종 맡은 부서에서의 보고, 회의, 전달 등으로 뛰어다니고, 오후 예배 후에 거의 언제나 벌이는 각종 행사에 얼굴도장까지 찍어야 하므로 바쁘기도 할 것이다.
결국 장로는 교회와 목사와 행사를 섬기느라 정작 교인들과 대화할 짬이 도무지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 희생정신이야 물론 높이 사주고도 싶지만, 어느 땐 (그까짓)행사때문에 천하보다 귀하다는 인간들이 홀대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몇 년 전, 담임목사가 새로 왔을 때,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담임목사는 교인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목회자 전용 식사 테이블을 마다하고 교인들이 앉아 식사하는 테이블로 식판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하지만 담임목사가 테이블에 앉자 앉아있던 평교인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담임목사라는 존재가 수저를 자유롭게 놀리지 못할만큼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면서 담임목사는 기도제목으로 써놓은 나의 형편을 기억하고 있었고, 요즈음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물었다. 단 한 번이었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소중했고 감사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교회에서 관리(?)하는 교인들 축에서는 비교적 하층민(교회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에 대한 낮은 평가, 각종 헌금 납부실적에서 한없이 뒤로 밀리는 초라한 순위, 목회자 앞에서 화를 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키지 않는 웃음은 지어보인 적 역시 없으므로 좀 떨떠름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뻘쭘한 관계 등등을 종합한 나의 성적표이다)임에도 기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서로 마음을 맞추는 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서로를 생각해주고, 기도해주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거리낌 없이 담임목사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선 담임목사에게 문제가 있다. 그들의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은 아닌가. 지엄하게 설교를 하고, 교육을 시키고, 질책을 하고, 하나님을 위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하여 교인들을 마치 일벌처럼 쓰기만 할 뿐, 도무지 돌보려 하지 않는 과오에 대하여 그들은 작은 뉘우침이라도 있을까?
이름도 없는 일벌들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각종 봉사와 전도에 힘쓴 나머지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져 있는 바람에 정작 가정에서의 목회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교회안의, 목회자들의 뇌리에는 없는, 낮고도 낮은, 이름 없는 자들의 뻥 뚫린 마음에 인간적인 위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나님의 위로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더욱 큰소리를 칠까봐 나는 겁이 난다.
새로 오신 담임목사는 그 후로도 몇 번 자리에 합석하여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 같았는데, 하도 교인들이 경직되어 있으니까 어느 순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 목회자를 하늘처럼 섬기던 습관과, 목회자와 성경속의 예수님을 비유한 목자와 혼동시키는 각종 교육으로 인해 예수는 나의 친구요, 내 방패 되시니의 찬송가가 무색하도록 목회자는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너무도 먼 그대로 각인되어 버린 탓이다.
그 모든 것들은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았을 뿐이므로 담임목사는 적어도 일년 정도는 테이블 합석을 강행했어야 했다. 그렇게 초장에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마음을 먹었다면 빠른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묵묵히 계속 해야 하지 않는가? 교인들이 자연스레 인식할 시간은 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야 미미한 대인기피증이 있어서 누구든, 더구나 목회자가 열정적으로 다가오면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른 교인들은 담임목사나 부목사들과 대화하거나 신앙상담을 받고 싶어도 그 속내를 드러내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럴 것이다. 분명 한 교회 안에서 주일의 상당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맡은 바 업무(?)가 너무도 다른 바람에 따로따로 노는 형국이니까.
어쩌다가 평교인은 자연스럽게 같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담임목사가 어려운 존재가 되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담임목사와 개별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는 정말 힘들다.
내 경험을 말한다면 나는 삼십 년 가까이 같이 신앙 생활하던 이전 담임목사와 나의 깊은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고민이나 신앙의 문제점을 단 한 번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담임목사는 교회의 단단한 벽돌처럼 그냥 무생물로 여겨질 때도 있다. 아니면 일 잘하는 CEO 정도?
나는 목회자들을 성직자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들을 특별하게 대우한다거나 특별히 존경한다거나 하는 마인드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인격을 믿고, 그들의 직업윤리를 믿으려고 노력하며, 그들의 신앙지도를 잘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들은 신학이나, 신앙에 있어서 전문인이 아닌가. 내가 소설가인 것처럼 말이다.
영안실 식당에서 목사, 장로, 전도사와는 따로국밥으로 놀면서 나는 생각했다.
만약, 이 테이블마다 목사, 장로, 전도사가 적절하게 섞여 앉아서 일분씩이라도 돌아가면서 각자 처해있는 형편을 서로 묻고 늘상 산재해 있는 각 가정의 어려움과 집안, 직장, 교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들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곁들여진다면 어떨까?
이름만 겨우 알고 한 번도 말을 나누어보지 않은 장로가 옆 자리에 앉아 여러분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면서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어떨까? 목사 장로 테이블에서 (자기들끼리만)흥건하게 흘러나오던 웃음소리를 평교인들의 테이블에도 좀 나누어주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가스펠 중에서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라는 좋은 노래가 있다.
사자들과 어린양이 뛰놀고, 어린이가 손을 넣어도 독사가 물지 않는 그 날이 다시 오리라는, 이사야 말씀을 노래로 만든 곡이다.
나는 그 가스펠을 부를 때마다 생각한다.
사자들과 어린양이 같이 뛰놀게 하려면 사자들의 야성을 죽여야 하고, 힘이 센 사자들이 먼저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어린 양과 같이 뛰놀 수 있다. 즉, 있는 자, 가진 자, 명예와 권세가 있는 자들이 먼저 자신의 위치를 낮추어 어린 양의 수준까지 내려와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중심적인 파워를 가지고 있는 장로들도 교인들이 있는 곳까지 내려와야 하고, 교인들에게 영의 양식을 먹인다는 목사들은 스스로 양식이 되어 어린 양의 밥이 되어야 진정한 <교회 섬김이>가 될 것이 아닌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교인들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인들에게 가장 낮은 자로 다가가는 것은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교인들이 생각하는 목사 밑에 장로(혹은 장로 밑에 목사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들만의 꼭대기 자리다툼이므로), 장로 밑에 권사, 권사 밑에 집사, 집사 밑에 평교인, 이런 식의 철저한 서열 순위는 하루빨리 파괴되어야 한다. 너무도 오래 동안 군림해 온 그 단단한 윗자리를 부숴버려야 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성전을 보고 일갈하신 것처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그 단단한 서열의 벽을 깨부숴야 할 것이다.
당신들의 겸손하고 낮아진 그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러므로 보여주시라.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만큼 명확하게.
편 가르기, 서열이 없는, 가장 낮은 자세로서 교인들을 섬기는 모습을!
사순절의 어느 봄날, 유다
(나에게는 영성일기를 쓰는 블로그가 있습니다. 아침, 그곳을 산책하다가 3월의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쓰고도, 내가 결심하고도 이내 잊어버린 마음을 다시 잡으려고 복습하는 의미로 올립니다^^)
매일 오전 11시에 CBS에서는 성서학당을 한다.
처음 성서학당을 보았을 때, 나는 기쁨이 충만했다. 와, 이런 말씀을 듣는구나. 완전 나에게 필요한 맞춤형 바이블스터디였던 것이다. 내가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에 대하여 성서를 통해 매우 인격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강사를 보면서 새삼 그분들이 존경스러웠다. 이 땅의 목회자들의 마인드가 모두 저래야 하는데, 하는 껄적지근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꿀보다 더 단 말씀에 흠뻑 빠져버렸다...
오늘 성서학당에서 나는 다시 환희를 경험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가?
강사의 물음이었다.
대답은 아니오였다.
예수님은 영적인 분이었지 종교적인 분은 아니었다. 종교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구분해야 한다. 그 시대에서 가장 종교적인 부류는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고, 친구로 대해주셨고, 예수님의 신부라 칭하셨다. 그만큼 사랑하신 것이다. 사랑은 규칙이 아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과 접속하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기억하라. 우리는, 나는 리더라, 하는 생각으로 살라. 일어나 빛을 발하겠다는 생각으로 살라. 생각하라,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책을 좀 읽어라.
(생각하고 질문하고 책을 읽는 것은 유다의 특기인데 ㅋㅋ)
하나님을 조폭두목으로 만들지 말라고 강사는 말씀하셨다.
굴복하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종교의 억압에서 풀려나 자신의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휘하기를 원하신다.
무리지어 일천번 제 드린다고 몰려다니지 말라.
자신의 시간, 재능, 에너지를 가장 좋아하는 것에 쏟아부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그 길을 향하여 줄기차게 가는 것, 그러면 성공한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 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국 나는 글을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겠넹?^^)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빛을 발하게 된다!!
성서학당을 보고 나자 힘이 마구 솟았다. 하하.
그리하여 박영호의 <잃어버린 예수>, 그 두꺼운 책을 다시 펼쳤다. 아, 그곳에도 주옥같은 말씀이 가득했다.
연필 들고 밑줄 치면서 열심히 읽었다. 가슴에 와서 박히는 은혜의 말씀이 너무 많아서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집에 얌전히 앉아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수시로 들을 수 있으니 너무 좋은 세상이다...
인터넷으로 존경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바이블스터디를 하고, 책을 읽고, 영상물을 본다...
그것들의 섭렵은 나의 믿음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오늘도 새벽을 오가면서 설교 두바닥 들었다.
무엇이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니까 모든 말씀이 나에게 엑기스가 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오늘도 정말 충만한 하루가 될 것 같다.
조금 있으면 다시 교회에 가야한다.
수요 예배 특송을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해야 옳겠지만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수요 예배 특송을 하지 않는다면 수요 예배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도 알고 나 자신도 인정하는 것이므로...
열심히 교회쪽으로 붙들어매려고 하는, 낮이나 밤이나 교회만 생각하게 하려는 그 얕은 수(일년에 한 번이라도 수요예배에 참석하게 하기 위하여 속별로 특송을 하게 만드는)에 결국 나도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교회에 가면, 그렇게 수요예배를 드리게 되면 다시 옷깃을 여미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오늘 저녁, 하나님은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실까....기대만땅!^^
가고 오는 전철에서 들을 설교 두 바닥도 기대하면서 다시 <잃어버린 예수>를 손에 들고 있다. 몇 장이라도 더 읽다가 가야징~~^^
*후일담
그날 수요예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만땅으로 경험했다.
힘들고 복잡했던 가슴이 뻥, 하고 뚫렸고, 상쾌한 성령의 바람이 나를 살살 간질렀다. 포근~했다^^
나에게 맞춤형으로, 그렇게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신 분은 김구민 전도사(전도사님이 맞나요?^^;;)이시다.
역시 하나님은 멋쟁이셔!!
실명 권장에서 실명 원칙으로?
투표하셨습니까?^^
마음에 드시는 분에게 도장 꾸욱 찍어주셨습니까?
덕택에 국민의 소중한 권리행사도 하고, 하루 임시공휴일이어서 포근한 봄날을 즐기고 있습니다...
요 아래 '실명'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길래 저도 한 말씀 보태려고 들어왔습니다.
참 다양한 생각들이 있어서 읽는 맛이 납니다^^
저의 직업상, 취미상 인터넷 카페에 대 여섯 군데 가입되어 있습니다.
이곳처럼 다음 카페에도 몇 군데 가입되어 있는데 모두 닉네임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검색한 거의 모든 카페 회원들이 닉네임을 쓰고 있기에(문협 카페, 동인 카페, 클래식 카페, 동호인 카페 등)
인터넷 카페, 하면 닉을 쓰는 곳이라고 자연스레 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닉네임을 쓰면 참 재미있는게 많아요. 그래서 오프라인 만남을 해도 자연스레 닉을 부르는데 그 재미 또한 쏠쏠합니다. 저는 닉이 세개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즐거울 때도 있는 겁니다 ㅋㅋ)
그리고.
이 카페에 제가 가입한 2월 17일에는 <우리 카페는 실명 사용을 권장합니다>라는 공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곱번째 가입했는데, 그 이전의 가입회원을 보면
1. 용두동교회
2. 이상헌
3. 주님과 함께
4. 옛교인
5. 박성수
6. 조용준
으로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별로 망설일 것도 없이 저의 다음 블로그 닉을 그대로 썼습니다. 닉의 사용은 인터넷 카페의 관례라고나 할까요? 하여튼 저는 그렇게 카페를 활용해왔으니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카페지기의 공지사항보다 제가 먼저 닉을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그 후, 가입회원들의 면면을 보니 카페에 익숙하신 분들은 닉을 사용하신 것 같고, 카페 이용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이름을 그대로 쓰신 것 같습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저는 <권장>이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그야말로 권장은 권유의 뜻입니다. <그렇게 하였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무방하>다, 혹은< 아니어도 뭐 괜찮다>,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할 수 없고>, 대강 이렇게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 카페 가입 당시, 엊그제 갑자기 공지 제목을 바꾼 것처럼 <실명 사용을 원칙으로 합니다>하고 공지가 떴더라면, 무슨 범법자도 아니므로 굳이 공지를 거역하면서까지 닉네임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그런데 왜 갑자기 며칠 전 공지 사항의 제목이 바뀐 것일까요? 실명 권장에서 실명 원칙으로요? 조금은 빡세진 느낌입니다...권장이라는 단어와 원칙이라는 단어의 차이는 꽤 깊습니다. 저는 원칙이라고 못박은 그 원칙을 내가 왜 본의아니게 위배하게 되었는지 속이 좀 상합니다... 카페를 개설하실 때 진작 공지를 하셨으면 이런 복잡한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런데요... 실명 원칙은 소급되어 적용하게 되는 것인가요? 그 전에 가입한 저 같은 회원도요?)
잠시 공지 내용을 복사해 올리겠습니다.
용두동교회 나눔카페를 이용하시는 성도님들께 요청드립니다.
현재 우리 카페는 실명인증을 하신 분들만 가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정책상 실명인증이 되었다고 해서 닉네임이 실명으로 자동으로 설정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가입시 닉네임을 실명으로 해 주시거나 또는 가입 후 왼쪽 상단 [내 정보]에 가시면 닉네임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눔들을 더 친밀하게 나누기 위함이니 모든 성도님들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정회원 등업시 닉네임이 실명으로 조정되지 않은 분들께는 조정 된 후 등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에서 밝혔듯 이 카페는 실명인증을 하신 분들만 가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보안장치가 매우 탄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교인들끼리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교회에서 배려한 것이 아닐까 하고 저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지 내용에서 <좋은 나눔들을 더 친밀하게 나누기 위함으로> 실명으로 바꾸기를 협조 부탁드린다고 합니다.
저의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좋은 나눔들을 더 친밀하게 나누기 위하여는 실명이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명이 좋은 경우는, 교인들이 글을 읽을 때 실명의 회원을 아는 경우, 사랑과 친교가 깊어질 수도 있고, 교회에서 이곳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확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고, 어려운 일을 토로한 실명교인을 위해 중보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무엇엔가 화가 난 실명교인을 위해서 전화 한 통화해서 위로나 조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실명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입견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어서 아, 이 사람 또 그 얘기하네, 하면서 글의 진실을 선입견에 의해 왜곡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싶을 때, 실명인 경우, 나 이런 사람이야, 이런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을 좀 알아보라고! 하면서 뻗댈 수도 있습니다. 또 무엇인가 은혜를 나눌 때 실명의 경우, 자칫 자기 자랑이라거나 자기 믿음 자랑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곳은 일단 용두동 교회 교인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교인들은 각 사람의 개성이 드러날 때 빛날 수도 있고, 천명의 교인들이 (마치 오늘 투표하는 것처럼 각각 한 사람의 평등한 개인-장로나 목사, 권사, 집사, 초신자라는 가시적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한 사람씩의 목소리를 내는데는 참 공평하게 적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글을 올릴 때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어느 글을 올릴 때에는 용두동 교회 교인 중의 한 사람으로써 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귀하게 생각하시는 <자유의지>를 이곳에도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공지가 저렇게(실명원칙!!!!) 빡세게 떴으니 앞으로 가입하시는 분들은 모두 실명가입의 원칙을 얌전하게 지키실 것이 분명하고, 이전에 가입하신 분들은 그분들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것이 어떠할까, 하는...
누군가 닉네임으로 글을 올렸는데 읽는 분이 궁금하다 생각하시면 댓글로 물어볼 수도 있고, 교회측에 물어보면 당장 알려줄 것입니다. (회원가입할 때 실명을 적으니까 카페지기는 이 분이 누구인지 손바닥안에 있으니까요^^)
저는 제외하고라도(ㅋㅋ) 실명사용을 권장한다고 하는데도 그 권유를 따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분이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것인즉, 그분의 생각을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쉬운 점은...
홈피를 새롭게 단장하느라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카페에서의 실명이나 익명에 대한 것조차 생각하지 않고 카페의 문을 연(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이런 카페는 저 같은 컴맹이라도 반나절이면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곳의 담당자님께...좀...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교회측에서 이 나눔카페를 열기 전, 충분한 검토를 했더라면 요 아래처럼 쓸데없이 회원(교인)들끼리 격론을 벌이지는 않지 않았을까 하는.... 하긴 그래서 이곳이 더 활발하게 활성화되기는 했네요...^^
계속 드는 의문은...
왜 실명 권장에서 실명 원칙으로 전환되었을까...하는....
아, 이 글을 쓰는 사이에 어느새 투표가 끝났네요.
국민의 소중한 권리를 행사하는 뜻깊은 날, 우리 용두동교회 교인의 소중한 권리를 생각합니당^^
(뒤늦게 확인했는데요...이전에 없었던 공지내용의 추가부분도 장난아니게 무섭네요... 빨강글로 되어있는 부분... 그러니까 앞으로는 닉을 사용하면 등업조차 되지 않게 되었네요...
뭐...그렇게 되었다면 실명에 대해 왈가왈부할 건더기조차 없게 되지 않았나요?)
이런 교회, 저런 목사
어제 이상한 교회에 다녀왔다.
평창동 갤러리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제법 큰 갤러리 꼭대기층에서 벌어진 이상스런 모임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낯선 평창동까지 끌려가게 된 것은 지난 금요일 밤, 원로작가의 출판기념회에서 왕선배 소설가의 꼬드김 때문이었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기도 하는 그 왕선배님은 살짝 나를 불러내더니만 "우리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다른 여느 소설가와는 다르지 않느냐.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크고 비밀한 일을 알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서두를 단 뒤, 본론을 꺼냈다. 어찌어찌해서 목사님 한 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이 평창동 갤러리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면서 모임에 한 번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갔다.
서로 처음 만나는 분들이 대부분인 듯 어색한 표정으로 열 댓명 정도 되는 분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깔끔하고 너무도 목사님처럼 보이는 분과 인사를 나누고 모집책인 듯한 두 분(한 분은 나를 끌고 온 왕선배 소설가, 다른 한 분은 갤러리 주인이었다)이 얼결에 끌려온 느낌이 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했다. 네 명의 소설가와 몇 분의 갤러리 주인, 큐레이터, 구치소 간부, 연대 기독교학과 교수, 그리고 국민일보 이태영 기자도 보였다. 미술쪽 반, 문학쪽 반, 출판 쪽 약간 그 정도의 구성이었던 것 같다.
그 럭셔리한 갤러리 공간 한 층에 교회를 만들게 된 연유를 들으며 나는 혀를 내둘러야 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니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기적같은 일들의 결과였다.
아무 조건 없이 갤러리를 교회 사용으로 내어 준 갤러리 주인이며, 주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갤러리에 교회를 세울 포부를 완성시킨 목사님 모두, 이성만 가진 세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제 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문득 우리 조재진 목사님이 우리교회에 부임하셔서 하신 첫 설교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여라"라는 설교가 떠올랐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나를 끌고 온 왕선배 소설가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이 이 곳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시는데, 이 땅에 교회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직한 교회를 세우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먼저 이태영 기자님이 샘플을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면서 모델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서요."
한동안 사양하던 이태영 기자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그의 말 대부분은 이른바 차인표식 목회에 대해서였다. 그의 이야기는 요 밑의 국민일보 오늘 기사에 거의 100% 그대로 씌어있다. 역시 글쟁이라 어제 오후에 나눈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기사화 할 수 있는 그가 정말 부러웠다.
그 곳에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목사님의 비전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좋은 기회였다.
목사님의 말씀 중에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교회없는 교회였다. 개척교회가 부흥이 되어 새 교회지를 사고 교회를 지을 무렵이었다던가? 마침 IMF가 터져 교인과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본 목사님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교회를 지으려고 모았던 돈을 어려운 형편에 처한 교인들에게 삼백만원, 오백만원씩 나누어 주고, 주위의 불우한 이웃들에게도 그런 방법으로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건물로서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지만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지금도 왕성하게 사회 봉사와 구제를 하면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교회 지을 돈으로 이웃을 섬기고 교회는 지역의 사회복지관을 빌어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후 지금까지 지역의 사회관을 빌어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다고.
"교회가 교회를 짓기 위하여 많은 헌금을 하고, 교회 유지를 위하여 또 다시 많은 헌금을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지요."
이번, 갤러리에 교회를 세운다는 생각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갤러리도 교회가 될 수 있고, 회사도 교회가 될 수 있고, 주변의 복지관도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목사님의 생각이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생각들이 있고, 참 다양한 목사님들만큼이나 다양한 교회가 있을 수 있구나 하는 나의 생각.
아들에게 다운받으라고 해서 본 힐링캠프.
본방을 보았던 남편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감격하면서 다시 열심히 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행복했고, 내 자신을 생각하니 슬펐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새힘을 얻었다.
자, 이제 우리도 차인표 식 목회를 한 번 따라가볼까...?
아니, 이렇게 한 번 결심해 볼까?
나도, 차인표다!!
그분이 오시면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개성이 있다고 할까?
얼굴도 다르고, 지문도 다르고, 음색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꿈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관점도 다르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척도도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저런 검사를 통해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해왔다.
혈액형으로도 나누어보고 성격테스트를 해서 성향도 나누어보고 기질도 몇 가지로 나누어보고...등등...
실존주의 철학에 의한다면(^^) 우리는 모두 피투성의 존재(被投性 存在)로 세상에 던져졌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원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운명처럼 세상에 던져진 존재, 사람.
기독교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로 세상에 던져졌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태어난 곳에 따라, 부모의 성향에 따라, 부모에게 물려받은 핏줄에 따라, 성격도 다르고 하나씩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면서 자라간다. 그렇게 여러가지 굴곡을 거쳐 이리저리 뒹굴고 헤매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면서 성인이 되는 것이다.
종교인도 다 다르다. 기독교인도 모두 다르다. 다를 수밖에. 오묘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인간은 만들지 않으셨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 한 사람을 하나님은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 제물로 삼으셨다. 나의 행함과는 전혀 관계없이, 전격적인 은혜의 선물이었다...
자신이 죄성을 느끼는 사람일 수록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고 감격하게 마련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고백 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도 갖게 되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는 말씀을 전적으로 받아들였으므로 우리는, 혹은 나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각성하고, 각성하면 할수록, 이 못난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날마다 매순간마다 목이 메이는 것이다....
교회는 그렇게 죄인들의 소굴이다.
죄인들의 소굴이니 얼마나 추하고 얼마나 개판일까...너나 나나 죄인이니, 아무리 감춘다고 하여도 서로를 알아보는 법. 속이 시커먼 것도, 탐욕과 이기에 가득한 마음도 모두 미루어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 도낀개낀이니까.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죄인이요, 보잘 것 없어도 죄인이요, 잘나도 죄인이요 못나도 죄인이며, 잘 살아도 죄인이요 헐벗고 굶주려도 죄인이다.... 교회에 다니는 예수쟁이들은 그러므로 참으로 한심한 자들이요, 그런 한심한 자들을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은 밸도 없어 보인다.
아무리 가르치고 가르쳐도 맨말 딴 짓만 일삼는 죄인들, 잘못하고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헷갈려하는 죄인들, 아니면 죄를 짓고서도 여전히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죄인들, 너나 나나 죄인인 것을 만천하가 다 아는데도 그중에서 잘난 척하느라 정신없는 죄인들도 있다...
하지만 이 죄인들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은 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에서 교회에 다니는 죄인들은 복받은 자들일 것이다. 자신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야말로, 자신의 꼬라지를 인식하는 것 말이다...
하긴 그 초라하기 그지없는 죄인의 꼬라지를 인식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좀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쇼크처럼 받아들인 사람, 모태 신앙으로 뜨뜨미지근하게(겉보기에) 이현령비현령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듯한 사람, 날마다 날마다 일밀리씩 자라는 사람, 앞으로 두발짝 갔다가 뒤로 한발짝 가기도하고, 간혹 옆길로 새기도 하는 사람, 하나님 손바닥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자유를 갈구하면서 뛰쳐나가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좋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종종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어둔 골짝을 헤매는 사람...별별 죄인들이 교회에는 가득하다. 모두 죄인이니까 하는 짓도 죄인답게 더티하고 어리석고 욕심에 눈이 멀어 정신없이 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공언하셨다. 인증해주시고 인증샷 찍어주셨고, 우리가 잊어버릴까봐 성경책도 수십수백만권 찍어내어 눈앞에 펼쳐놓으셨다....
제발 읽던지 듣던지 해라, 아는 만큼 보이느니라....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책이라면 수면제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설교시간을 잠마귀 쫓느라고 정작 설교는 못 듣는 사람도 있고, 멍하니 앉아 지난 일을 반추하느라 설교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한 마디도 접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닌갑다...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또 언제인가는 우리의 영안을 확 뜨게 하여주셔서 성경책이 꿀보다 더 달다는 진실을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이고,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고 입신의 경지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설교시간도, 골수를 쪼개는 말씀으로 내면이 뜨듯해져서 기어이 눈가에 뜨뜻한 눈물을 몇 방울 흘리게 되는 경험을 곧 하게 될 것을 믿는다.
여기에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제발, 이 죄인과 저 죄인이 째려보지는 말자는 것이다. 대체 왜 저런다냐, 하면서 정죄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제발 쓸데없는 것으로, 작은 일에 목숨걸지 말자는 것이다.
내 중심의 사고에서 나를 완전 죽여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내 성향대로 남의 믿음을 재지 말자는 것이다. 더구나 믿음과 하등 관련이 없는 것들에 믿음을 대입시켜서 죄인들끼리 시험들지 말자는 것이다....
어느 죄인이 이혼했으면 흉보지 말고 기도 한 번 더 해주고, 어느 죄인이 때돈 벌었으면 지난 비리 들추지 말고 아낌없이 축하해주고, 어느 죄인이 흉악한 죄를 저질렀으면 돌로 치지 말고 그 손에 든 돌을 내려놓던지, 자신의 돌짝같은 가슴을 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일대 일로 하나님과 만났다.
일대 일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일대 일로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각 사람에 맞는 신앙을 주셨다.
주신 분복대로 어느 죄인은 성경만 파고 들기도 하고 어느 죄인은 모든 것을 은혜로 싸잡아서 두루뭉수리하게 일처리를 하기도 하고 어느 죄인은 바리새인처럼 다른 죄인 정죄하는데 목숨걸기도 하고 어느 죄인은 식당에서 설거지에 은혜받기도 하며 어느 죄인은 여전히 자랑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예수님을 밀어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어느 죄인은 남 흉 보는데 달란트가 충만하여 유비통신의 발원지가 되기도 하고 어느 죄인은 세상의 파워를 교회에서도 들이대며 큰소리치는 바람에 교회를 들끓게 만들어 매우매우 어쩌면 지나치게 활기(?)있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바울의 말에 의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지 않던가....
어느 죄인이 여전히 유치하게 돈자랑 자식자랑하면 옆에서 실컷 맞장구 져주자는 말이다. 어느 죄인이 어깨에 힘주고 아들 딸 잘 났다고 떠벌리면 진심으로 축하해주자는 말이다... 진심이 안나오면...? 진심인척이라도 하자는 말이다...어느 죄인이 비싸고 폼나는 옷으로 치장하고 명품백 들고는 별일도 없으면서 죄인들의 주시를 받고 싶어 죄인들 사이를 바쁘게 비집고 다니면 입에 발린 칭찬이라도 해주자는 말이다. 어느 죄인이 못된 말빨로 찍어누르면 이크, 하는 척이라도 하자는 말이다. 어느 죄인이 세상의 서열처럼 교회에서의 서열을 부르짖으면 아~직 멀었구나, 하면서 속으로만 코웃음치자는 말이다...옆 동네 죄인이 땅을 사면 토사곽란에 시달리지 말고 축하문자라도 찍어보내자는 것이다.... (에구...끝이 없넹...^^;;)
우리는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같다.
물론 형제끼리 가장 많이 싸우기는 하지만, 우리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척이라도 해서,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기도하는 척 하면서 욕을 한 바가지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면에서는 예수님처럼 온화하게 웃어주자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습관 들이기의 일환이기도 하다....
시기 미움 다툼 질시, 이런 유치한 감정에 이끌려 사는 우리 죄인들에게 언제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서 손에 손잡고 허그하고 눈물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줄 때가 이를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곧 그 때가 오리라고 확신한다.
그분이 오시면...^^;;
가난한 천사
카톡에 올린 선배의 사진을 보았다. 선배라...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 언니는 가족과의 친분에서 시작되었다. 엄마의 친구의 딸이었다. 우리집과 언니의 집은 똑같은 시기에 무너지는 중이었다. 파산을 향해 치닫는 두 집안은 그래서 더욱 끈끈했는지 모른다.
언니의 권유로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장학금 받으면서 공부 할 수 있어. 하하. 1년 선배였던 언니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서 장학금받고 나는 공부를 심각하게 멀리하는 바람에 하위권에서 서성거렸다. 장학금은 커녕 문학 예술에 미친듯이 빠져드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유급할 뻔 했다^^;;
교대에 들어간 언니가 선물한 책이 떠오른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이었다. 덕택에 나는 칼바도스에 대한 위대한 갈증이 생겼고, 나와 비슷한 성정을 지닌 주인공 조앙마두에 대해 연민을 품었고, 단단하고 이성적이며 날카로운 라비크에 대해 연정을 품었다. 그런 스타일의 남자를 나는 좋아한다^^...
언니는 나에게 천사였다. 성모 마리아처럼 처녀가 애를 낳은 나를 품고 반 년을 같이 살았다. 새끼 손톱만한 아이의 발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렸던 언니.
그 언니가 교직생활을 접고 파리로 유학을 갔을 때, 나는 십삼년 동안 겨우 한 통의 전화를 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언니를 만났다. 파리지엔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지성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는 아름다웠다.
카톡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당당한 아름다움이 매혹적이었다. 파리 유학시절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귀국한 후, 언니와 나는 날마다 정독 도서관에서 만났다. 언니는 강의 준비를 하고 나는 소섫을 썼다. 매일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고 좋은 책을 교환해서 읽고는 했다.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이름 난 몇 몇 대학을 전전하면서 강사를 하던 언니는, 연구소에서 나오는 부수입으로 가난한 나를 아낌없이 섬겼다. 옷을 사주고, 책을 사주고, 맛난 음식을 사주고, 용돈까지 주었다.
가족보다 더 사랑해.
언니의 고백이었다. 독신인 그녀는 많이 외로워보였지만, 실제로 참 많이 외로웠지만 바쁜 일상은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바로 언니였다.
하지만 언니의 삶은 고달팠다.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하는 강사 생활을 접고 특수학교에 취직해서 몇 년 동안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언제인가 언니가 근무하는 학교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놀랄만큼 지독한 책임감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그 학교까지 때려치웠다.
이제는 좀 쉬고 싶어... 언니의 얼굴을 보니 과연 피곤해 보였다.
그리하여...고급백수가 되었다.
남에게 베푸는데 달란트가 있던 언니는 소유한 그 무엇도 없었다. 가난한 천사 언니는 그 알량한 퇴직금을 아낌없이 나에게 주면서 성지순례를 가게 했다.
잘 다녀와서 좋은 글 써.
내가 등단했을 때는 나를 끌고 가서 노트북을 사주기도 했다. 뿐인가, 자신이 교류하는 하이클래스급 지성인들의 모임에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소개하기에 바빴다.
내가 좋아하는 후배야.
언니는 나를 늘 그렇게 소개했다. 말끝에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정말 사랑스럽지?
하이고.... 겨우 두 살 어린 나를 그녀는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너라고 부르지 않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녀의 인간에 대한 존중을 나는 존경한다.
언제인가 너무 힘들어서 언니에게 도움을 구한 적이 있었다. 언니는 즉각 나의 구원요청을 들어주었고, 언니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맙다고 메일을 보냈더니 언니는 나에게 이런 답메일을 보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떠올려주어서 정말 고마워.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도 하나 있다.
성가대의 반주를 하던 교회 후배가 독일로 유학을 가는데(그 후배와의 친분은 성가대에서 같이 있었다는 그 정도였다)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자그마치 천만원을 쥐어준 것이다. 아무 조건도 없었다. 그 때 언니는 월세에 살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혀 하는 나에게 언니가 말했다.
내가 유학을 해봐서 아는데 유학 생활은 정말 힘들거든.
그렇다고 친분이 깊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그냥 베푼 것이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남을 도와주다가 '좀 쉬어야겠다'면서 일을 그만 둔 그녀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세상에...소르본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녀는 지금 만 이년 째 아무 일도 하지 않고(혹은 하지 못하고) 교회에만 열심히 다니고 있다. 객관적으로, 비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계속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겠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뭔 구제냐고 눈총를 받을 수도 있겠고, 인력 낭비라고 할 수도 있겠고, 일 할 때 일만 하고 놀지 말아라, 하는 찬송가 구절에 위배되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믿으면 성공해야 하고, 남들 위에 서야 하며, 뒤로 자빠져도 돈이 펑펑 쏟아지는 그런 삶을 생각한다면 그녀는 완전 망해버린 삶을 살고 있다....처음은 미약했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가 아니라 처음은 창대했지만 말할 수 없이 미약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녀의 일생을 찬찬히 돌아본다. 세상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너무 어리석게 사는 것이겠지만 과연 그럴까?
남의 고통을 돌보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그녀는 과연 잘못 산 것일까?
그녀의 진실한 기도와 물질적인 후원으로 어려운 삶을 헤쳐나간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는 무엇이었을까...
작은 예수, 천사였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언니의 미래를 나는 알 수 없다.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것도 나는 모르겠다.
그녀가 쉬면서 교회 일을 하는 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그녀의 삶에 역사할지 그것 역시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써 그녀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수십년 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에게 쉼이 필요해서 그녀는 지금 쉬고 있는 것일 테고, 그 쉼의 시간 동안 그녀의 영혼은 더욱 맑고 밝게 빛날 것이며, 그녀의 앞날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평안이 깃들 것이라는 것은 안다.
내 옆의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듣는데
내 옆의 작은 자에게 자신의 몸을 잘라내어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는 언니를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
내 앞가림도 못해 고통당하는 나에게 언니의 삶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 예수님의 명령은 정말 지키기 힘들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그녀는 내 눈앞에서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 보여준다.
타인을 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언니를 위하여 오늘도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결심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천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개독교인의 슬픔
독서회가 개강했다.
오늘은 <너>에 대한 집중 탐구였다. 정신과의사 김병후의 신간 <너>에 대한 독서회였는데...
대화 중에 기독교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불교 신자도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있고, 기독교인은 나를 포함하여 두 사람이었는데...
엄청난 독설을 감수해야 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예수에 대하여 알 리가 없고, 구원이나 사랑이나 성경말씀을 모른다. 다만 그리스도인을 알 뿐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으로 시작하는 그 많은 질타!!
기독교인들이 절에 가서 땅밟기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행태에 대하여 무지막지하게 많은 예화를 들면서 쏟아내는 분노의 목소리에...나는 고통받았다...
예수님 얼굴에 똥칠하는 기독교인, 교회라면 치를 떨게 만드는 기독교인, 신앙심이 특출하여 주위사람들을 괴롭히는 기독교인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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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욕을 먹어야 할 사람은 목회자들이다. 그들이 제대로 가르치기만 했어도, 목사님을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순진무구하시고 믿음 투철하신 열성파신도들이 그렇게 개판이 되지는 않았으리!
믿음이 너무 좋으셔서 말이야...하면서 비꼬는 회원들의 끝이 없는 비난의 말을 고스란히 얻어먹으면서 나는 괴로웠다...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개독교인이 되어버린 이 현실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제 교회에서는 십계명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십계명이라도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매일 행동강령을 가르쳐주고 체크하는 책자라도 하나씩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 독서회에서 오간 온갖 욕을 먹고 있는 우리 예수님을 생각하니 정말 눈물 난다...
예수님, 이렇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이 땅의 교인들에게 직접 강림하셔서 일갈을 하시던지,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목회자들 꿈속에 나타나 혼쭐을 내시던지 제발 어떻게 해주십시오...
<너>를 읽고 나눈 대화에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론처럼 내려졌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한다. 나와 너가 다름으로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니...
똘레랑스가 존재하지 않는 곳 교회에서, 가장 똘레랑스가 활발하게 펼쳐지는 굣이 교회가 될 때까지 내가 할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다.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성경 읽을 시간도 없는데 무슨 책을 읽느냐는 기독교인.
서울의 <종묘>를 갔는데 갈 곳이 없어서 제사지내는 곳을 가느냐고 화를 내며 일행이 뿔뿔이 흩어져 결국 보지도 못하고 헤어졌다는 기독교인.
편협하고 무지하며 독선적이고 자기만 알고 남의 말은 절대 듣지 않는 기독교인.
남의 종교에 대한 배려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인.
(절에 가서 구원이 없는 종교라고 스님에게 맞대고 욕을 하는 기독교인, 불상의 목을 자르는 기독교인. 사탄의 세력이 물러가게 해달라고 절 앞마당 땅밟기를 하는 기독교인)
완악하고 교만하며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능력이라고 믿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평생 새벽기도를 마다하지 않는 기독교인.
인색하고, 돈 밝히고, 남을 돌아볼 줄 모르고, 제삿날 코빼기도 안 비치고, 시부모 공경보다 교회에 가는 일을 우선하고, 세상 명예 권세에 앞장 서서 달려가면서 잘사는 것을 축복이라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
수많은 예화를 가지고 가슴이 멍든 저 회원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었다. 그들의 주위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 죄송했다..
하나님. 우리 이렇게 못나게 살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예수님. 예수님 얼굴에 똥칠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예배당 로비에서 만난 사람
특새 기간에는 이렇게 아침을 맞이한다.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다가 문득 눈을 뜨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비치는 여명. 또 하루가 이렇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어느덧 훤하게 밝아오는 교회를 나설 때였다.
예배당 로비에서 어느 성도님과 마주쳤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십년도 더 지난 옛날, 남자속회라는 모임을 통해 몇 번 인사를 나누던 분이었다. 새벽에 교회가면 좋은 점이다. 어쩌다 마주치는 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그분이 자꾸 식사를 같이 하고 가자고 하신다. 교회에서 아침 식사는 해본적이 없는데다 독서회도 가야 하고 해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그분이 간증을 했다. 오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간증이었다.
지난 사년 동안의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 기간 중에서 단 하루 피치 못할 일로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꼬박 참석을 했다고 한다. 그분은 납품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밤 장사였다. 밤새도록 추운 거리를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이곳저곳을 들러 언 손을 발을 동동거리면서 납품을 하고 그렇게 날밤을 새고 교회 기도회를 온다는 것이다. 아... 힘들겠다....
"물론 나라고 따뜻한 집에 가서 쉬고 싶지 않겠어요. 밤새 떨고 돌아다녔는데. 하지만 이 시간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달려오곤 하지요... "
그분은 사년 동안의 특새기간 동안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뜨뜨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회개하면서 많은 눈물을 쏟았다고. 새롭게 변화하면서 이제껏 핑계만 대면서 살아온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바쁘다고, 할 수 없다고 새벽기도회 못나오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핑계예요. 내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정말 좋으면, 이곳에 마음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애들 학교도 보내지 말고, 남편 아침도 차려주지 말고 나오라는 말은 절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사정과 형편과 믿음의 역량에 따라, 아니면 자신의 확고한 어떤 신념에 따라 어느 분에게는 귀한 시간이 되기도 하고, 어느 분에게는 매년 하는 연례행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그 분은 놓치지 않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많은 은혜를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핑계거리를 입에 달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분을 만나니 새삼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분은 어떤 계기로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회를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아주 멋지게 붙들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집에도 계시고 직장에도 계시고 길에도 계시고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도 계시다. 늘 그렇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께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여 간절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이 새벽에 교회에 나오기까지는 많은 일을 절제해야 할 것이다. 잠을 줄여야 하고, 재미있는 심야프로를 보고 싶어도 새벽에 일어날 생각을 해서 참고, 가족과의 단란한 아침 식사를 포기하기도 할 것이다. 매일 새벽기도회 간다면서 큰소리치거나 싸울 수는 없으니까 삶속에서도 다른 때보다 더욱 참을 일이 많을 것이다. 삶의 여러 부분을 포기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는 그 마음과 그 열심과 그 사랑을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나 역시 40분의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하루의 황금같은 4 시간을 고스란히 바쳐야 한다.
어제, 택시를 타고 의정부역을 가자고 했더니 기사님이 말했다.
"나는 동네 교회에 가느라고 교회버스 기다리는 분인 줄 알았는데 역에 가시네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교회 가요."
"아니, 교회를 가는데 왜 역으로 가십니까, 이 신새벽에?"
"교회가 쫌 멀어요...."
나는 그 기사분이 교회에 다니는지 아니면 세상의 안티기독교인인지 알 수 없어서 거기까지만 말했다. 잘못하다가는 완전 미쳤다,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참 어이없고 밑지는 장사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오고 가는 길을 포함한 그 네 시간이 모두 새벽기도회의 연장이다. 첫 전철을 타고 오면서 기도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방송설교를 듣기도 한다. 사순절이 지나면 쌀쌀하고 냉정한 나의 눈매도 조금은 부드러워지리라...
예배당 로비에서 그분의 오분 간증을 들으면서 그분과 같은 많은 분들이 새벽기도회를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아름다운 분들이다. 부디 하나님과 더욱 깊어지는 사순절이 되기를...
로비에서 만난 그분의 눈은 오늘도 부어있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깨나 쏟으셨나 보다. 하지만 그분의 얼굴은 너무도 해맑았다.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행복하고 평안한 표정.
과연,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을 품속에 꼭 안고 계시니까.
홈피 관계자님께 부탁드립니다
홈페이지가 이전보다 더 예쁘게 업그레이드 된 것 같아 보기에 참 좋습니다^^
푸른 색 바탕이 아름다워서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그동안 수고해 주신 담당자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요...
이전에 교인들과 나누던 방( 자유게시판, 그리고 은혜나누기방, 생각나누기 방)은
방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냥 이 곳 코이노니아 한 곳으로 통합된 것 같은데요...
홈페이지 개편하기 전에 올려졌던 많은 소식이나 글들을 볼 수 없어서 대단히 아쉽습니다.
홈피 역사의 단절이라고나 할까요...? ^^;;
영성일기, 교회소식, 갤러리, 새가족, 부서별 소식은 홈페이지 개정 이전의 글들이 모두 복원되어 있는데 반하여
교인들의 나눔장이었던 자유게시판, 은혜나누기, 생각나누기에 올라왔던 그 많은 게시글들은 모두 삭제되어 있는 것이
좀 섭섭하게 느껴집니다.
없애시려면 다 없애시든가, 이전 글들을 살리시려면 다 살려야 형평에 맞는 것 아닌가....요...?^^
더구나 교인들의 여러 행사소식이나 소천소식, 그곳에 올린 많은 분들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은
우리 교회 교인들이 수 년 동안 나눈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갑자기 지난 글들이 사라져 버리니 좀 당황이 됩니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전, 교인들이 함께 했던 세 곳(자유게시판, 은혜나누기, 생각나누기)에 있었던 기존의 글들은
모두 복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요...
요 밑에 부음을 알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글을 제가 올렸더니
부음이 교회소식난에 들어가버렸네요?^^
이제껏 교회소식은 주보나 속회공과만 올려져 있었는데 이번 부음만 올라가 있으니 조금은 이상해 보이고요...
따지고 들자면 교회소식은 교회 집행부에서 알리는 지침 정도가 역할이지
교인들의 애경사를 나누는 곳은 교회소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그냥 제 생각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당)
오히려 부음같은 애경사는 코이노니아에 올리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만...
마지막으로요...
설교 동영상의 크기 문제인데요...
다른 교회의 설교 동영상을 보면 전체 화면으로 확대할 수 있어서 목사님의 말씀에 더 집중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 교회 설교 동영상은 크기가 전체 화면으로 확대되는 기능이 없네요...
동영상크기가 너무 자그마해서(^^;;) 화면에 코를 박고 보는 형상이 되고는 합니다.
어떤 기술적인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씀에 더욱 집중하고 은혜받기 위해서라도 동영상을 전체화면으로 확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부탁을 어느 분께 드려야할지, 어느 담당자에게 드려야할지 몰라 부득이하게 이곳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자알 부탁드립니다^^
늘 우리 용두동교회 훔페이지 발전을 위해 애쓰고 계시는 담당자 분께 마음 속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면서...
-이숙경 권사 올림
나의 모든 비리를 죽여버리고
어제, 한 교인의 장례식이 있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얼굴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신 분이었다.
수십 년 스쳐지나가면서 짧은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사사로이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교회가 크다보니 모든 사람과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의 기회는 있었다.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발간하게 된 미담집을 집필하기 위하여 편집위원 몇 분과 함께 그분의 집을 방문하여 두어 시간에 걸쳐 교회에 얽힌 이야기를 인터뷰한 것이다.
교회가 오래 되었다는 것은 믿음의 선배를 그만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되고, 신앙의 멘토를 삼을 만한 분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도 될 것이다. 나는 새삼 우리 교회에 오래 동안 다니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장례식에 함께 하면서, 키노르의 일원으로 가운을 입고 조가를 부르면서,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이 여전한 영정사진을 보면서 잠시 그 분에 대한 생각을 했다. 믿음의 선배로서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었다.
병원에서의 천국환송예배 후 벽제에서 화장을 하고, 다시 양평의 납골당에 안치할 동안 동행하신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었다. 예배 시간이 달라 마주치지 못했던 분들, 그리고 스쳐지나가면서 아주 짧은 안부만 여쭙던 분들과 제법 긴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서 오래된 교인 몇 분을 만났다. 이제는 나도 제법 나이 든 축에 끼었는지 이제는 아는 분들의 자녀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노숙해 보이는 사십대 중반의 자녀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이름만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그녀가 너댓살 때 보고는 처음이었다. 아니, 걔가 바로 너란 말이냐...나의 비명섞인 감탄.
우리 교회에서 자랐지만 결혼 후 멀리 이사가고 어쩌구 해서 우리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개종을 했다고 한다. 시댁과 남편의 종교로 말이다. 가톨릭교도가 된 그녀가 궁금했다. 우리 교회도 오래동안 다녔고 했으니 그녀가 느끼는 개신교와 카톨릭의 차이점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교회와 성당과 제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고.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가 말했다. 그녀 역시 간결하고도 명쾌한 대답이었다. 단 하나의 단어!
"비리."
옆에 같이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무슨 말이지?
"비리가 없어요."
그녀가 다시 말하자 나를 위시해서 같이 모여있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非理...
"신부들은 사심이 없고 비리가 없어요. 세습, 그런 것도 없고."
"결혼을 하지 않고 재산도 가질 수 없으니까 비리를 저지를 이유가 없기도 하겠지요."
"그러니까 신뢰가 가요. 믿을 수 있는 거지요. 사심이 없다는 것을 믿으니까."
"깨끗해요."
"교회 건축이나 부흥, 교인 확장에 목매지 않아요. 개인적인, 사사로운 야욕이 없어요."
그녀가 좀 시니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개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데요, 뭐."
.........
아직도, 여태까지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의 딸이기도 하고 배울만큼 배웠고 지혜로워보이는 그녀가 내뱉은 첫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비리...
교회에 얼마나 비리가 많으면, 교회가 얼마나 비리에 물들어 있으면, 교회가 얼마나 비리 논란에 휩싸여 있으면 그 말이 첫번째로 튀어나왔을까.
목회자들이 얼마나 사심이 많게 느꼈으면 신부와의 변별성을 예식이나 교리나 신앙고백이나 삶이 아니라, 아주 저차원적인 '비리', 그것에 두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느끼는 차이점이 예배의 형식이나 교인들의 삶이 아니라 신부나 목사 같은 성직자의 삶에 두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만큼 개신교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적, 신학적 차이를 나는 잘 모른다. 사람들도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논할 일이다. 우리는 신학자가 아니라 신앙인이다.
그리고 우리가 목숨 걸고 전도해야 할 세상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적 차이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옆에서 지켜보는대로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의 삶을 보고도 느끼겠지.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판단할 것이다.
저런 신앙생활을 나도 하고 싶다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아직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 않는 비기독교신자들은,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피터지게 외치면서 전도해야 할 그 대상들은
그냥..보이는 교회와 보이는 성당에 대하여 알 뿐이고 느낄 뿐이다. 아무리 목청껏 외쳐봤자 그들의 눈에 비춰지는 우리의 삶이나 교회, 성당의 모습이 아름다워보이지 않으면, 호감을 가질 수 없으면 어떻게 교회나 성당에 가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말로 전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 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보여주어야 하나, 예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들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성경공부를 다니고 있다. 대여섯명의 소수인원이 감리교목사님 부부를 초청하여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너댓 시간 신앙과 삶을 나누는 은혜로운 시간이다. 십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는 그 모임은 작년 7월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얼마 전 그 바이블 스터디에서 나누었던 말씀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잠시 조금만 인용한다면...
<오늘 나의 사는 모습을 저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무어라 할 것인지생각해 봅니다. 좀 전에 보았던 사도행전의 이방인들처럼 우리를 바라보면서
좀 바보 같기는 하지만 저 사람들은 무언가 달라. 사는데 힘이 있고, 자기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나눌 줄 알고, 하여간 저들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고 생각할른지?
아니면 저 예수쟁이들 하여간 시끄러워,만나면 저들끼리 헐뜯고 치고 박고, 지들만 잘살고, 헐벗은 이웃은 나 몰라라 하고, 예배당만 크게 지을 생각만 하고, 혹시 이런 소리만 듣는 것은 아닌지?
오늘 우리들도 교회 밖에 있는 저 불신자들에게 특별한 공감을 주지 못하면 핍박 정도가 아니라완전히 소외되는 일이벌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깨끗하다고 주장해도, 아무리 우리 교회는 깨끗하다고 주장해도, 아무리 우리 목회자는 깨끗하다고 주장해도 우리는 교회다니는 사람들에 속해 있고, 우리 교회는 한국 교회에 속해 있으며 우리 목회자 역시 한국의 목회자에 속해 있다.
교회가 세상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현실..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린 개독교인의 슬픔이 여기에 있다....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는 그 눈총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6,70년대의 교회 부흥의 유종의 미가 2012년에 이르러서는 '비리'라는 가슴 아픈 단어로 종식되어야 하나, 하는 안타까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하지만!
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비리>라는 슬픈 단어에 녹아있는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바꾸어 주실 것을 믿는다.
신부에게 향하는 <신뢰>가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기 위하여 나 자신부터 비리 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서부터 신뢰받기 위하여
변하고 깨지고 부서지고 완전히 죽어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란다....
타인을 향한 손가락이 내 자신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곳에서부터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2012년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나를 분명히 변화시켜주실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다.
하나님, 사순절을 통하여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의 모든 非理를 죽여버리고
2012년 부활절,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하기를 원합니다.
똑같다!!
지난 주에는 주중에 교회를 두 번 갔다.
수요일은 여선교회 기도회로, 금요일은 연합속회로.
강의다 뭐다 해서 최근 몇 년동안은 착실하게 참석하지는 못하다가 방학기간이어서 그리고 대망의 2012년을 맞이한 새로운 각오로 참석했다.
주일은 여러 예배가 있어서 잘 마주치지 못했던 분들을 오랜만에 뵙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손도 잡고, 안부도 묻고, 아주 간만에 만난 분과는 허그도 하면서 즐거운 친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나에게는 태어난 곳이 바로 교회 전방 일 킬로였고, 결혼할 때까지 그 반경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교회는 곧 고향과 다름아니고 어쩌면 친정같은 곳이기도 하다.
전철을 타고 제기역 1번 출구로 나오면 계단을 오를 때부터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은 남다른 감회가 많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저만큼 앞서 걸어가시는 분에게 뛰어가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수십 년 눈에 익은 길과 집들을 바라보면서 정겨운 눈길을 보내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일찍 교회에 도착해서 커피 한 잔 빼들고 지하 기도실에 들어가면 그 아늑함과 고요함에 묻어있는 예수님의 포근함이 전신을 파고들면서 나도 모르게 주님, 하면서 속삭이게 되는 것도 나만의 비밀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참석한 두 번의 모임은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여선교회 기도회도 전원 여자분들이었고, 연합속회도 전원 여자분들이었다. 여선교회는 여선교회이니 남선교회 분들이 참석하실 리가 없는것이고, 연합속회도 남자분들은 참석할 수 없는 시간대였기 때문에 당연했다.
여인들의 천국이었다.^^
젊은 성도들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고 삼십대 후반 약간 명과 사오십대, 그리고 대부분은 육십대 이후의 어르신들이셨다. 가만히 보니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수오일, 금요일 오시는 어르신들은 거의 같은 분들이었다. 그 놀라운 믿음에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런데.
수요일과 금요일, 하나는 기도회요 또 하나는 연합속회인데 제목이 다른 만큼 변별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행이 똑같았던 것이다.
여선교회 기도회에는 8, 90 분 정도가 본당에 모였는데 예배 전의 찬양, 순서에 입각한 찬양, 특송, 기도, 목사님 말씀, 헌금, 헌금기도, 짧은 기도 세 번 정도, 그리고 광고. 끝.
연합속회는 교구별로 나뉘어서 3구역인 나는 지하기도실로 갔다.
인원이 분산되어서 아늑한 분위기였다. 그곳에서도 찬양, 특송, 기도, 목사님 말씀, 헌금, 헌금기도, 짧은 기도 세 번 정도, 그리고 광고, 끝이었다.
내용은 쌍동이처럼 똑같은데 모임의 명목만 다른 것이다.
왜 그럴까, 왜 그래야만 할까, 왜 그럴수 밖에는 없는 것일까....
여선교회 기도회란 무엇일까.
여선교 회원들이 모여서 기도회를 하면 어떤 기도를 중점적으로 하는 것일까.
하다못해 예전에는 목사님이 말씀을 하시면,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이나, 집에서의 역할 등을 성경말씀에 입각하여 말씀해주셨는데 이번 기도회에서는 여선교회 회원들만 집중해서 들어야할 말씀은 아니었다.
그냥, 설교말씀이었다.
여선교 회원들에게는 여선교 회원들만의 특장점이 있을 것이다.
여선교 회원들에게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말씀도 있을 것이고, 여선교 회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교회 생활에 대하여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교육의 기회로 말씀을 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여선교 회원들이 교회나 가정이나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실천할 무엇인가도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이고, 교회 내의 소소한 일들에 대하여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정리해 줄 수도 있을 것이고, 가정을 이끌어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여성의 지위에 대하여 강조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뿐인가. 100년이 훨씬 넘는 우리 교회에 믿음의 산증인이신 여성 어르신들을 모시고, 그분들의 신앙 여정을 들으며 은혜받을 수도 있고, 전임 여선교회 회장님을 초빙하여 여선교회원으로서의 역할을 다짐하고 주문하고 반성하는 시간도 될 수 있을 것이고, 사사로운 작은 시빗거리에 대해서 같이 문제 제시도 하고, 의견도 듣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선교회 기도회의 프로그램 변화는 여선교회에서 담당하는 것인지 교회 집행부에서 담당하는 것인지 잘은 모르지만 한 달에 한 번 있는 귀중한 시간을 좀 더 효율성 있게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기도회, 라는 기가막힌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십여분에 불과했다는 것도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기도회, 라는 것은 기도를 하는 모임이다.
기도회에 걸맞는 형식을 갖추려면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간절한 기도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목사님 설교가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면 구태여 기도회라는 명칭이 왜 필요한가?
설령 목사님 말씀을 넣는다 하더라도 여선교회에 맞는 적절한 설교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여선교회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내가 기도회에 참석을 하고 있는 것인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것인지 헛갈였다. 형식과 시간 배분이 주일 예배와 너무도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연합속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교회는 속회의 오래된 전통이 귀하게 이어져왔다. 속회라는 지역 모임을 통해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알아가고 교회를 알아가고 아울러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신앙의 발전을 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연합속회는 그렇게 소그룹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다가 한 달에 한 번 교회에 모두 모여 다른 속에 계신 어른들도 뵙고, 우리 속회와 다른 속회의 장단점도 비교하면서 발전을 모색하기도 하는 좋은 시간이다.
연합속회에서 구역별로 모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구역을 인도하시는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계시고, 그분들이 구역을 이끌어 가는데 어려움과 바라는 점을 피력할 수도 있겠고, 속장이나 구역장들의 의견을 들을 수도 있겠고, 부흥되는 속회와 모이기 힘든 속회를 돌아보면서 분석도 하고, 위로도 받고 또 다시 힘을 얻는 좋은 시간을 만들 수도 있을 터인데 주일 예배처럼 똑같은 형식으로, 그저 목사님 설교를 듣는 것을 중심으로 연합속회의 구역별 모임을 한다면 구태여 구역으로 나누어서 연합속회를 드리는 것에 별 의의를 찾기 힘들지 않을까?
다른 속회의 소식도 전하고, 속회에서 환우들의 명단을 모아서 연합하여 기도를 열심히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좋은 소식은 나누면서 기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연합속회에서 우리 교회 장로님이 간증을 하신 적도 있고, 외부에서 강사를 모셔서 영양가있는 말씀을 들은 적도 있고, 여성 명사를 초청하여 문화강연을 들은 적도 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인적 자원이 많다. 법률가도 계시고, 다방면의 전문가도 계시고, 신앙의 어르신도 계시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우리 교회의 신앙 전통을 이어가는데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연합속회는 소통의 장이다. 속회에 참석하는 속도들이 모처럼 교회에서 모였는데 그냥 앉아서 주일 예배와 똑같은 형식으로 말씀만 듣는다면 연합속회로 모이는 의의가 있는 것인가?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도 설교 내용을 (어차피 여성분들만 모이는 연합속회이므로) 셀모임의 필요성이나, 개별 심방할 때의 마음가짐이나 속회에서 서로를 돌아보는 마음가짐 같은 것을 말씀을 인용하여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쨌는 두 모임에 참석한 나의 느낌은 여선교회 기도회나 연합속회나 모두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였다.
여선교회 기도회와 연합속회가 이름에 맞는 내용의 기도회와 속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제목에 이끌려 시를 읽었습니다....
가슴이 따끔~해지네요...)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이진명
김노인은 64세,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씨 62세,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을 열어본다
아내 박씨는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고,
김노인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급차가 와서 두 노인을 실어간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김노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아침신문이 턱하니 식탁에 뱉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렸다
나는 꼼짝없이 앉아 꾸역꾸역 그걸 씹어야 했다
씹다가 군소리도 싫어
썩어문드러질 숟가락 던지고 대단스러울 내일의
천국 내일의 어느날인가로 알아서 끌려갔다
알아서 끌려가
병자의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들어 추슬러놓고
늦은 밥술을 떴다 밥술을 뜨다 기도가 막히고
밥숟가락이 입에 물린 채 죽어가는데
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
거동 못하는 그 누가
아, 눈물 머금은 신(神)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
————
이진명 / 1955년 서울에서 풀생. 1990년 《작가세계》에 「저녁을 위하여」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단 한 사람』『세워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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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은 고요합니다. 세상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지 않습니다. 다만 고요히 웁니다. 고요한데 지극히 치열합니다. 고요하게 살피고 돌봅니다. 시를 통해 일상의 결을 다시 매만지며 냉담해져가는 우리 마음에 더운 불을 지핍니다. 우리를 곧추세우게도 하고 무릎 꿇게도 하는 일상의 풍경들을 시로 옮기면서 번민하는 시인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조차 사라진 이 벌거벗겨진 황량한 도시에서 극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렇게 날마다 사라져갑니다. 살아보려고 애쓰다 결국은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시인은 그들을 기억하고 곡비처럼 웁니다. 이 지극한 마음이 마지막으로 가 닿은 곳은 이런 비극에 무력한 신에 대한 애도. “아, 눈물 머금은 신(神)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라고 써야하는 날들이 두렵습니다. 이제 긴 겨울의 막바지, 부디 모두 무사히 이 겨울을 나시길. 혹여 너무 참혹해진 이웃은 없는지 주위를 한번씩 돌아보았으면 싶습니다.
-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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