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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QT

요한복음 QT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5.

◆요한복음 QT

 

 

수요일 인도자 공부 시간에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난생 처음 듣는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므로 시간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시간의 노예처럼 살았다고 목사님은 고백했다. 평생 목회하고 내년 봄 은퇴하게 되는, 명망 깊은 노목회자의 고백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목사님은 시간을 너무 잘 지켜서 문제라는 것을 온 교인들은 다 알고 있다. 문제는 시간을 잘 지켜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목사님만 모른다는 사실. 아마 목사님은 은퇴하신 후에도 영영 모르실 것이다. 목사님도 예전에 말했지만 약속에 10분 늦느니 50분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미투, 목사님!!)

더 이상의 말씀은 없었지만 목사님은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시간을 잘 활용하셨을 것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다. 인생이다. 시간이 흘러감으로 해서 어린애가 자라고 장성하고 죽는다. 나는 2000년부터 교회에서 조가 중창단을 하고 있다. 입관 예배나 발인 예배, 하관 예배 때 참석하여 조가를 부르는 중창단이다. 때문에 교회에서 누군가 상을 당하면 거의 빠짐없이 장례식에 참석한다. 일년에 스물 몇 번, 많게는 서른 번 정도의 장례식을 다녔으니 줄잡아 100번이 넘는 장례식을 함께 한 것이다. 대부분 장지나 화장장까지 동행하므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오랜 경력으로 그 방면에는 어느 정도 노하우도 있다. 한 가족이 장례를 치루는 일은 평생 몇 번 되지 않는 반면 중창단 같은 경우, 그야말로 온갖 형태의 장례식을 다 접해보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장례식을 보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모든 장례 절차가 실은 부질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미 그 분은 하늘나라에 갔다. 어쩌면 장례식이라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자, 남겨진 자들을 위한 위로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유족을 위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은 아닐까. 그 장례식이 초호화판이거나 아주 초라하거나 변별성을 느낄 수 없었다. 캐딜락에 실려진 관이건 소형 버스 짐칸에 실려 있는 관이건 그 차이가 죽은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특히 이번 주일에는 모두 4번의 장례가 있었다. 그 장례를 모두 참석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이생에서의 시간이 일단 정지되는 것. 향년 몇 세. 그것은 이생에서 누린 망자의 시간이다. 그 시간의 양에 관계없이 나는 그 사람이 누린 시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죽는 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천국에서 과연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천국은 어떤 곳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진주문, 갖은 보석으로 치장된 그런 곳이라면 별로 호감이 가질 않는다. 물론 더러운 쓰레기나 나쁜 냄새가 가득한 곳보다야 낫겠지만 그렇게 좋을 것도 없다.

나는 보석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진주로 만든 문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대단히 기쁘고 나무로 만든 문으로 지나가면 썰렁하고, 하는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보석 천지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설마, 하나님이 그런 천국을 만들지는 않았을 테지. 대체 보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그곳에 가서 웃음이 나올 리가 없으니 하나님도 생각이 있으실 것이다.

 

일주일 내내 시간에 쫒기면서 장례에 참석하고 그리고 또 한편 끝없이 가라앉은 침체기의 절정에 와 있는 나를 새삼 점검해 보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요한복음 큐티 숙제를 하게 된 것이다.

 

아침부터 요한복음을 QT하는데 뜻밖의 느낌이 들었다. 눈에 영생이라는 단어가 클로즈업되어 나타났다. 예전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은 갖지 않았던 단어였다.

일주일 내내 맞이했던 죽음을 뛰어넘는 단어 <영생>.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고 있나? 나는 과연 믿을 수 있나? 천국에서 주님을, 혹은 먼저 가신 지인들을 만난다는 것이 영생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장소에서 장소를 옮기는 것이 영생인가?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몸을 벗어나는 것이 영생인가? 육신에서 영혼으로(천국은 변화된 것이 가는 것)

시간을 벗어나는 것이 영생인가? 생로병사에서 죽음의 시간을 뛰어넘어 사는 것.

그러면 어디에서 사는가? 그곳이 바로 천국인가?

 

요한복음에 수없이 많이 나열되어 있는 영생이라는 단어. 그렇게 많은지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말씀은 전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들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구절을 인용한다면.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6:68 너희도 가려느냐, 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한 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8: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계속 나가다가 드디어 영생의 뜻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대목이 나온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제껏 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순간부터가 바로 영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나는 이렇게 세상에서 호흡하면서 살고 있다. 영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하면서 육체를 벗어나지만 그것은 나의 형체만 바뀔 뿐 계속 영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깊게 추구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생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나는 영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영생의 길을 가는 동안 요즘 다시 빠져드는 것이 있다. 기도의 습관이다.

누군가 전도는 습관이라고 열심히 외쳤지만 이제는 기도도 습관이라고 해야겠다.

기도를 습관처럼 하려면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인가!

 

엊그제 교회에 조금 일찍 와서 기도실에 앉아있는데 (나는 기도실에 앉아 있는 것을 참 좋아한다. 기도실에 앉아있는다고 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 평안함을 누리는 시간이 좋다) 큰 기도실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엿보니 처음 보는 젊은 여자였다. 아마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분 같아 보였다. 그런데 나는 뒤로 자빠질 뻔했다. 마치 음악처럼 그 분의 기도를 훔쳐(?)듣고 있는데 어찌나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나도 모르게 아멘, 하면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드디어 그 분이 자리를 비우게 되자마자 난 즉시 연습에 들어갔다. 그 분처럼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을 꼭 감고 아버지! 하면서 서두를 떼었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럴 수가! 교회 짬밥 삼십 년이 넘는 내가 이럴 수 있나.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내 자신을 토닥거리면서 오랜 시간 앉아서 기도 빨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주 긴 시간이 찔금거리면서 흐른 뒤에야 기도가 조금씩 나왔다. 너무 오랫동안 묵상기도만 했던 터라 쉽게 입술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음에 기도실에 갔을 때는 워밍 업 하는 시간이 조금 짧아졌고, 그 다음에는 조금 더 짧아졌다.

 

역시! 기도은 연습이었다. 경건에 이르는 여러 연습 중에 기도의 연습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특히 이번 주처럼 장례식을 4번이나 참석한다든지 하면서 바쁠수록 더욱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잘못하다가는 정신은 텅 빈 채로 몸만 바쁘게 움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주중에 교회에 올 때에는 될 수 있으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 일찍 와서 기도실을 이용해야겠다. 기도가 나아지면 나의 영생도 나아질 것이다.

 

 

두 번째 눈에 뜨이는 단어는 사랑이었다. 물론 기도의 연습 끝에 경건의 어떤 경지에 이르면 사랑도 넘치게 되겠지. (얄팍한 희망의 줄을 놓지 않고 있는 나!)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영생을 주러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서로 사랑하라, 고. 아, 오늘의 결론을 알겠다.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것.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잘 살아야한다. 영생의 삶은 시간을 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된 곳을 의미하는 거 같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기도의 습관을 잘 만들어보자, 그리고 영생에 이르는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귀한 명령!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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