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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QT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1. 6. 25.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

 

 

큐티 숙제를 받아왔다. 이번은 좀 특이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동안 살아가면서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뭐가 어떤 것이 예수님의 음성일까? 마음 어딘가를 두드리는 어떤 느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음성이 진짜로 들릴까? 남궁 원 목소리로? 혹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 레너드 코헨 같은 음성으로? 갑자기 막연해진다. 갈라지고 쇳소리 나고 불분명한 남편의 목소리가 예수님 목소리일지도 모르므로 일단 모든 <소리>나 <울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기로 했다. 어디 나의 놀라운 관찰력 내지는 감지력이 어디까지 촉수를 들이밀 수 있나 한번 지켜봐야겠다.

 

 

조롱받는 한국 기독교.

몇 권의 소설집을 읽었다. 요즘 뜨고 있는 소설가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 충만기>에 대하여 먼저 말해볼까.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성경의 어투를 빌려서 썼다. 가라사대, 하더라, 등등 고어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일절, 이절도 있다. 나도 한 번 써 보려고 마음먹었던 컨셉인데 이기호가 먼저 인터셉트 해버렸다. 그런데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 어쩐지 한국 교회를 매우 비웃는 듯한 냄새가 나는 것이 바로 문제 인 것이다. 열정분자를 넘어서서 완전히 신앙 속에 풍덩 빠져 있어 사리분별이 안 되는 최순덕을 등장시켜 교인들을 시각 장애자에 버금하여 묘사한 것이다. 씁쓸하기도 했지만 아니라고 항변할 처지도 못되는 여러 정황이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교회의 문제를 교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속세의 사람들, 일테면 이기호 같은 소설가나 그 외 많은 지성인들에 대해 당당하게 나서서 그래도 난 예수가 좋다오, 하면서 큰 소리로 복음성가를 부른다면 나 역시 최순덕 같은 맹신도가 되는 것이겠지....

 

백가흠의 성탄절, 이라는 소설도 매우 시니컬했다. 요즘 소설가 중에서 기독교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나는 확실히 알았다. 아니, 엄밀히 말한다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교인들(기독교인)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여러 책을 읽으면서 새삼 소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소설은 생의 이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현실을 삐딱한 시선으로 낯설게 바라보는 작업이 바로 소설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갖춰야할 덕목이라 하겠다. 날마다 나는 행복해요, 를 외치는 기독교인들 앞에 어느 날 불현듯 다가와서 정말 행복해? 그렇다면 행복이 뭔데? 하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바로 문학가요 소설가인 것이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두 개의 직함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소설가와 기독교인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인가. 그 둘은 정말 같이 끌어안고 인생을 살아가기는 힘든 것이다.

 

오죽하면 유명하던 소설가 김승옥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 순간부터 소설을 못 쓰게 되었는가 말이다.

소설계에서는 (어줍잖은)신앙이 멋진 소설가 한 사람을 잃게 만들었다고 아쉬워하는 판이다. 몇 몇 사람을 보더라도 기독교, 특히 개신교도들 중에는 소설을 쓰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기독교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 두 개의 다른 안경을 동시에 끼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제대로 길을 갈 수가 있을지.....

 

소설가에 비해 음악가는 또 다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새 생명 축제에 김정택 장로가 와서 간증의 시간을 가졌다. 좌중을 압도하는 그 파워풀한 능력의 말씀, 하나님을 향한 무시무시한 열정,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어진 마음,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짦은 시간이지만 영원의 시간을 가진 것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 나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많이 생각했다. 하나님은 사람에 따라 분량에 맞는 달란트를 주었다. 균등한 배분은 아니지만 어느 면에서는 믿음에 분량에 따른 가장 균등한 배분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달란트가 아주 조금이라고 해서 가슴 아파 한 적은 별로 없다. 다만 주신 달란트를 맨날 땅에 묻어버리고 모르쇠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을 칠뿐이다. 나는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것을 언제까지 고백하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나의 가장 커다란 아킬레스건이다.

달란트의 비유. 김정택 장로님은 많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

거기다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니...

 

예수님은 나에게 말씀하신다. 소설가가 되고 싶으냐? 제대로 된 소설가가 되어라.

예수님은 나에게 말씀하신다.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라. 너의 분복대로 준 것이다.

또 하나의 작은 사건이 있었다.

나는 날마다 싸이에 일기를 쓴다. 엊그제 싸이에 들어가 하소연을 만방으로 늘어놓았다. 나는 그 시간을 매우 즐기는 편이므로 거의 한 시간가량을 자기비하 발언과 좌절의 하소연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저장을 하는 순간 그만 날아가 버린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의 하소연이, 넋두리가 깡그리 없어진 상황이 닥치자, 순간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이게 뭐람. 수소를 잔뜩 넣은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다가 팡, 터진 느낌이 바로 그럴까? 글 쓰는 사람은 글 쓰고 저장 잘 못해서 없어지거나 날아갈 때가 가장 괴롭고 힘들다.

어떤 소설가는 쓴 글이 날아가자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느라 밤새 고통당했다고 했다. 나는 소설도 아닌 일기였지만 내 몸의 한부분이 잘려나간 것 같이 허전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조금 후 생각이 달라졌다. 예수님은 나에게 그런 쓸데없는 하소연은 늘어놓지 말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렇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약간의 꾸짖음도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너, 맨날 그렇게 하소연만 늘어놓을 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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