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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2019년!

해피와 행복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9. 2. 13.

(내 생각에 내가 동조하는 기분은 이런 것일까? 아침부터 즐거운...


2016년 5월에 책을 읽다가 쓴 글인 거 같다... 가만 보니... 조지 기싱의 "헨리라이크로프트 수상록"을 읽다가 필 받은 모양이다...전반부의 긴 사설은 뺐다^^)




...생각이 향방없이 날 뛸 때가 있다(있었다).

두서없고 뒤죽박죽인 채 맨몸으로 화살을 맞고 또 어딘가로 쏘기도 하면서 (생각만으로), 그렇게 타인을 목조르면서 또한 자신의 목졸림도 경험하는 것.

그 생각의 끝에 창조나 창작이 없다면, 그러니까 일종의 예술로서의 치환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언제나 자해의 수단이 되었다.


만약 내가 고통과 상처와 연민을 글로 풀어내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날뛰는 생각들이 문학이나 다른 예술 분야에 몸을 담그면 다양성과 독창성, 낯섬과 비약 등으로 변환되어 예술적 상상력의 베이스가 된다.

그리하여 평생 조신하게 학습된 범위안에서 안주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잠재되어 있는 감성을 건드려 이런 저런 지름신을 도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좋아. 인간들이 모두 제복을 입고 똑같은 회사를 줄지어 가지 않는다는 것이. 때리는 인간도 있고 맞는 인간도 있고(이건 내동생의 이야기), 우는 인간도 있고 웃는 인간도 있고, 사랑하는 인간도 있고 사랑받는 인간도 있다는 것이.

물론 대다수의 인간들은 이것저것을 다 맛보며 살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인간들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라도 보면서 다른 인간의 생각과 삶을 엿보겠지.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타인의 불행을 엿보면서 새삼 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소유(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여)를 세어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낯선 인간을 곁눈질하고 마음에 품기도 하는 작은 일탈에 대한 사유의 확대로,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 버금가는 역작이 탄생될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습득된 교육과 지식으로, 그런 문명의 힘으로 지성의 옷을 덧입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오산. 

많은 선택의 순간, 지성의 힘을 빌 것 같지만 그것도 역시 오산.

아는 것과 느끼는 것 중에서는 단연 느낌이 훨씬 강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경제에도 통계로 내보이는 이론상의 수치경제와 실물경제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피부로 느끼는 실물경제이다.

비도 간간히 내리겠다, Beethoven / Piano Sonata 17번 ‘Tempest’- 3.Allegretto // Pf : Alfred Brendel [6:30], 이런 곡도 들려오겠다, 나의 정신세계가 그야말로 유혹에 빠져 엄청난 감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지금 내가 무슨 글을 이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네.

처음 샤롱의 글을 인용했을 때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불행을 곱씹는데 골몰하며 불평하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 다행이지 않은가 하는 (나의 어줍잖은)주장.

인간이니까 피부로 절감하는 불행을 곱씹을 수 있고 곱씹는데 골몰할 수도 있고(나는 골몰하는 인간을 보면 그저 끌어안아 주고 싶다. 그 몰입은 또 얼마나 이뻐!)

인간이니까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어마무시한 것에 이르기까지 불평할 수 있다는 것.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자신이 불행하다면 불행한 것이고 아무리 불행해보여도 자신이 행복하다면 행복한 것이니 참 재미있지 않은가?

그리고 조지 기싱의 말을 빌어오면서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느끼는 해방감보다 홀로 자신의 불행을 깊이 성찰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는데
도대체 행, 불행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묻고 싶었네.


그것은 내가 이러저리 헤매면서도 기어이 쓰고 싶어하는 것,


"행, 불행을 가르는 기준이 현실적인 도표나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닌가?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


한국어의 행복하다와 영어의 Happy는 이콜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나 같으면 영어의, 좀 가벼운 느낌의 Happy를 날마다 조금씩 누리며 사는 것이 한국어의 행복하다의 첫걸음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모르겠다, 모르겠어.

비도 오시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 유리창 앞의 도회지 뒷골목 정경도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커피도 맛있고, 해서 온 감각이 해피, 해피 하고 소리지르고 있으니 이런 글을 쓸 밖에. 지금 내 앞에 古家로 통하는 느릅나무 길이 보인다.
그러니 여러분이여. 삶의 순간을 촉촉하게 적시고 싶은 분은 나와 함께 저 길로 걸어갑시다.

저 길 끝에

해피와 행복을 몽땅 느끼게 해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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