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콘야, 이고니온으로 향했다. 그곳까지 5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콘야의 호텔에서 두 번째 밤을 맞이할 것이다.
나의 옆 좌석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이국의 광활한 들판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무료해진 순례자들은 다시 1달러짜리 상금을 놓고 퀴즈를 하면서 버스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눈치였다. 나로 말한다면 그 다섯 시간을 오롯이 혼자 즐겼다고 봐야 하겠지.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 어느 교회를 보러 달빛 비추는 밤길을 걸었다.
가는 도중 어두워졌는데 어떤 교회를 보려고 내려서 걸어간 것.
마침 보름달이 훤히 떠서 어두운 길을 비춰주었다.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북두칠성도 또렷하게 보였다. 너무 선명해서 바로 머리 위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자그마한 호수 위에 휘영청 둥근 달이 떠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검은 들판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 그토록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던가.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서 어두운 들판을 걷는 시간.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주 크고 다리를 절룩이는 개가 나에게 다가왔다. 코끝으로 나를 건드렸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그 개가 너무 불쌍해서 비싼 돈 주고 산 과자를 반이나 던져주었다. 제발 맛있게 먹어라.
카파토기야에서의 충격적인 순례를 끝내고 긴 버스 여행 끝에 제법 번화한 도시인 콘야에 도착했다. 네온싸인 반짝이는 건물과 자동차들이 다니는 모습은 한국의 여는 도시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도시는...다 똑같아 보인다. 자연과 달리 문명은 사람을 질리게 하는 게 있다.
호텔은 도시 중심부에 있었다. 번화한 밤거리가 활기차 보였다. 이제껏 보아왔던 터키의 이미지와는 판이했다.
여행의 두 번째 밤을 보낼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짐도 부리지 못하고 식당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했야 했다. 접시를 반도 채우지 않은 빈약한 식사를 하면서도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했다. 순례자들이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는 시간, 나는 일탈해야 했다. 4층인지 5층인지의 배정받은 룸에 트렁크를 내려놓기만 하고 서둘러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외국에 가면 나는 용감해지는 것 같다. 외국인 아무나 붙잡고 말을 잘 건다.
"이곳에서는 어디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나요?"
물론, 프런트에서는 의아한 눈빛이었다.
터키의 호텔들은 흡연자들에게 관대했다.
그들의 풍습인지, 종교적인 이유도 포함되었겠지만 청년들도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데 반해 열 살 안짝의 아이들까지 담배를 피우는데 익숙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호텔방에는 어김없이 투명 재떨이가 응접 테이블에 구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기특하게도 거의 모든 호텔은 아파트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발코니가 있어서 밖으로 나가 밤하늘을 보면서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그러니 왜 이 투숙객이 밤늦게 뛰어내려와 흡연 장소를 찾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비는 물론 금연이었고, 순례자 주제에 일층 구석에 있는 멋진 바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뉴욕에서처럼 호텔 밖으로 나가야했다. 프런트에서 손짓하는 곳으로 갔다. 호텔 정문 옆이었다. 필시 관광버스 기사를 위해 놓여 있음직한 스탠드 재떨이가 회전문 양 옆에 어여쁘게 놓여있었다.
나는 제일 먼저 식사를 대강 마치고 호텔 정문 바로 밖에 마련된 흡연코너로 달려갔다. 절대 들킬 염려가 없는 시간이었다. 콘야의 야경을 감상하면서 느긋하게 피우는 담배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저쪽 스탠드 재떨이에는 터키 남자 둘이 수다를 떨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므로 나는 비어있는 이쪽을 택했다. 서울에서부터 공수해 간 말보로 라이트에 멋진 외국남자가 선물해준 빨강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순간, 거의 완벽한 기쁨을 누렸다.
담배 한 대가 거의 다 타들어가자 한 대를 더 피울까, 그냥 룸으로 돌아갈까,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한 대 더 피우고 들어가서 기절할까,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저쪽을 보니... 그 중 한 터키 남자가 눈에 익었다. 누굴까, 누굴까...
가만 보니, 아다나 공항에서부터 우리 버스를 운전했던 바로 그 버스 기사였다. 그 남자는 진작 나를 알아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자꾸 흘낏거리더라니.
꽤 잘생기고 몸집도 장난 아니고, 늘 웃으면서 무겁기 짝이 없는 내 트렁크를 열심히 들어주었던 터키 남자이다. 게다, 내가 좋아하는 구레나룻도 그럴 듯한.
나로서는 흡연 장면을 들킨 셈이었고, 그로서는 새삼스럽고도 신기한 발견이었겠지. 기독교인들이 거의 대부분인 순례자들 전용 버스를 운행하는데 남자도 아닌 여자가 호텔 밖으로 뛰쳐나와 담배를 꼬나문 모습은 아마도 기네스 감이었을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한 대 더 피우고 들어가면서 물었다.
"버스 드라이버...?"
"예스, 예스!!"
확실했다. 그냥 지나치기 좀 그래서 마침 주머니에 있던 달러 몇 장을 손에 집히는 대로 쥐어 주었다. 5달러. 많지도 적지도 않은 팁이었을 것이다.
여행의 이틀째가 되고 보니, 트렁크를 정리하는데 요령이 생겼다.
아직도 순례자들이 식당 뷔페 코너를 순례하는 동안 나는 먼저 방으로 올라가서 잠을 정리했다. 이것저것 한 군데 모으고 옷가지를 다시 잘 접고 세면도구를 찾아 욕실에 구비해놓는 재미가 쏠쏠했다. 호텔 방은 쾌적했고, 침구는 정갈했다. 무드에 죽고 사는 나는 제일 먼저 나의 트윈 침대 머리맡 스탠드이 불을 켰다. 노르스름한 불빛이 포근하다.
룸메이트 왕언니가 욕실에 있는 동안 나는 다시 살며시 밖을 나갔다. 이번 역시 순례자들에게 발각될 염려는 없었다. 호텔 정문 양 옆으로 스탠드 재떨이를 향하여 가는 기분이라니. 그곳에 서서 콘야의 야경을 만끽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맛이라니!
아찔할 정도의 흡연의 쾌락을 누리고 룸에 갔더니 내가 방을 비운 사이 목욕 재개한 룸메이트 왕언니는 기도 중이셨다. 침대위에 오토마니 올라앉으셔서 무릎을 꿇고 침대 헤드 쪽으로 몸을 돌리고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나는 마치 죄라도 지은 것 같은 마음으로 살며시 문을 닫았다.
그런데...혹시 나는 정말 죄를 지은 것은 아닐까? 몰래 담배 피우는 죄?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데 어쩐지 마음이 거림직해지는 것은 왜였는지 모르겠다. 왕언니의 기도하는 뒷모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아름다운 경건의 모습이었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믿음이 좋았으면 좋겠다...
밤 11시. 노트북 시간은 오전 5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꿈속에 빠져 있겠지.
어찌된 일인지 뱃속이 약간 불편했다. 오래전에는 과민성 대장증상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도 가끔 배가 사르륵 아파 오면 겁이 더럭 났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하나님, 그런 해프닝은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온종일 강행군이어서 피곤한데 빨리 잠들어야 하는데 나는 자꾸 생각이 다른 곳으로 간다. 헤비 스모커의 비애가 이런데서 꼭 발동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더 호텔 문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코트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를 지나 호텔 밖의 스탠드 재떨이를 향해, 그 귀찮은 여정을 도무지 귀찮게 생각하지 않는 나는 과연 애연가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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