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바위기둥들이 제각각 검은 모자를 하나씩 눌러 쓰고 서 있는 파사바흐체 골짜기에서 카펫을 하나 샀다. 오로지 기도하기 위하여 뾰족한 탑을 파고들어 탑 꼭대기에 도처를 마련했던 기독교인들. 그 언덕에서 색색의 카펫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몇 몇 순례자들과 중동 지방 특유의 문양이 새겨진 카펫을 하나씩 골랐다. 나는 붉은 색과 검은 색이 강렬한 카펫을 샀다. 화려했다. 나도 화려하고 싶었다. 나는 그 카펫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나의 화려함을, 화려하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켜 줄만큼, 아니 그보다 더 화려한 카펫이었다. 70달러. 그 정도 가격이면 한국에서도 나쁘지 않은 러그 정도는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나는 카펫을 파는 청년의 티 없는 웃음 값으로 기꺼이 바가지를 쓰기로 하고 한국말 잘하는 청년에게 한 푼도 깎지 않았다. 질감은 형편없고 무늬도 조악했지만 나는 그런 유치함이 좋았다. 나의 카펫을 보고 가이드가 웃었다.
“그것은 카펫이 아닙니다. 바닥에 깔 수도 없어요. 카펫 축에도 못 들어가는 거지요.”
상관없었다. 나는 그냥 파사바흐체 골짜기에서 구원의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이던 그 카펫을 내 손에 넣고 집으로 가져가 소파 등받이라도 하면서 두고두고 보면서 골짜기의 바람을 떠올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삶이 여유로운 순례자 한 분은 정통 페르시아 카펫을 적지 않은 가격에 구입했다. 나는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우리를 인솔하는 선교사 가이드는 아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쉴 새 없이 정보를 주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 안달하는 눈치였다. 꽉 막힌 사람은 아니고, 신앙을 넓게 생각하는 모습이 그런대로 좋았다. 만약, 주여, 주여, 그렇게 믿음으로만 해석했더라면 식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동안 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마치 우리가 가이드의 썰을 들으러 이곳까지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의 장황한 역사 이야기를 순례자들이 재미있게 듣기를 원했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것을 대놓고 짜증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듣기 위하여 이 곳에 온 게 아니잖아. 나는 눈을 감고 싶으면 감아야 하고 창밖을 보고 싶으면 창밖을 바라보아야 하고 음악을 듣고 싶으면 들어야 하고 나른하게 잠속으로도 빠져들 것이다, 당신의 해박한 지식의 전달과는 관계없이.
경치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실내가 온통 나무로 만들어진 식당이었다. 짙은 갈색의 나무 벽에서 세월이 느껴졌다. 문양이 아름답고 잘 조각된 오래된 나무 의자가 격조 있었다. 구운 케밥을 먹었다. 갈비찜 맛이었다. 스프는 여전히 맛있었고 바구니 가득 담긴 과일은 신선했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음식을 맛있다고 말 할 수 있는 나의 ‘싸구려’ 입맛을 나는 사랑한다.
눈썹이 짙고 크고 검은 눈을 가진 젊은 터키 남자들이 써빙을 해 주었는데 그 중 한 남자가 다가와 나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한다. 같이 있던 순례자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제일 젊고, 제일 멋지니까 알아보네?”
그렇구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들어보지 못하던 매혹적인 인사를 이곳에서는 다반사로 받는다. 그래, 이곳은 신데렐라의 무도회장이니까.
신데렐라의 꿈은 금방 깨졌다.
그 남자는 사진사였고, 제일 먼저 나를 찍어주고 난 이후 모든 순례자들을 찍어주고 우리가 식사를 끝마칠 즈음, 이미 현상된 사진은 접시 사진이 되어 식당 뜰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 순발력에 모두 놀랐지만 사진은 거의 모두 희미했고, 접시는 너무도 조악해서 거의 사지 않았다. 나는 나의 얼굴이 찍힌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미했지만 즐거운 표정은 선명하게 보였다. 가방을 여는 나를 옆에 있는 왕언니가 말렸다.
“저런 것은 정말 필요 없어.”
“그래도, 아무도 사지 않으면 저 청년 너무 손해 보지 않을까요. 저 많은 접시들은 다 어떡하고요.”
일흔 한 살의 왕언니는, 사진 접시 진열대에서 여전히 머뭇거리는 내 손을 꽉 붙잡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사람들을 사랑하지 마.”
왕언니에게 손목이 잡힌 나는 순순히 그곳을 떠났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지도.
사방이 툭 터져 있는 바람에, 모든 경치 속에 그늘 하나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바람에, 더없이 밝은 햇볕을 쐬면서 담배 한 대 피울 수 없는 처지를 잠깐 비관했다.
식당 옆에 있는 기념품점에 들렀다. 카파토기야 조각품 몇 개를 고르고 계산을 하려고 하니 지갑이 없다. 순간 깜짝 놀랐다. 가방은 열려 있었고, 지퍼마다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품이 심상치 않았다. 나의 여행 경비가 고스란히 있는 지갑인데!
관광을 하면서 너무 흥분했었나. 혹시 카펫을 사면서 지갑을 떨구지 않았나.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이드의 조언에 따라 여권은 다른 곳에 있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정식적인 여행의 첫날인데 어떡하지?
하는 수 없이 한국에서부터 동행했던 가이드를 불렀다.
“지갑이 없어졌어요. 카펫을 사면서 가방에 제대로 넣지 않고 흘린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중해 보이는 가이드는 잠깐 생각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일단 침착하시고요. 버스의 좌석을 잘 살피시고, 식당에 앉았던 자리, 그리고 들렀던 주변을 천천히 다시 돌아보세요.”
...해프닝은 십 여분이었다. 버스안 내 좌석에 지갑이 떨구어져 있었다. 버스에서 지갑을 꺼낸 적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100달러짜리 지폐들은 그대로였다.
순간, 너무 자고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다. 좀 더 조신하게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여전히 배터리가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순례자들 틈에 끼어 겨우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순간 덜컹거렸던 마음은 찍을 수 없었다. 아차, 하면서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잘못 했습니다 하는 나의 짧은 기도문도 찍을 수 없긴 매한가지였겠지.
'그리스터키 성지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콘야(이고니온) (0) | 2014.12.16 |
---|---|
7. 데린구유 (0) | 2014.12.16 |
5. 카파토기야 (0) | 2014.12.16 |
4. 수리아 안디옥 (0) | 2014.12.16 |
3. 바울의 고향 다소 (0) | 2014.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