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리스터키 성지순례

10. 라오디게아 교회(터)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4. 12. 16.

파묵칼레로 가는 길도 역시 아득했다. 길고도 긴 버스 여행. 이쯤에서 진력이 날만도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지루한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충분히 누리고 싶었다.

오후에 휴게소에 들렀다. 음료수 마시고 잠시 쉬어가기 위해서였다. 아름다운 터키 하늘이 들판위에서 나에게 축복 같은 기쁨을 아낌없이 선사하고 있었다. 정말 귀한 것들은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는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순례자들은 화장실도 들리고 여러 종류의 주스를 파는 가게에 들어갔다. 공동 여행경비라는 것이 있어서 단체로 무엇인가 사거나 먹을 때는 지갑을 열 필요가 없이 마음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일 엑기스 주스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독하게 밀려오는 흡연의 욕구가 나를 아득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떡하든 이번 기회에는 담배를 피워야 했다.

 

일행이 모두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주스를 마시는 모습을 창밖으로 관찰하던 나는 슬며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지막한 건물 두 채가 전부인 들판이었다. 담벼락을 끼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가게 옆에 있는 주유소는 한가했다. 마치 시에스터처럼 고요한 세상. 천국처럼 밝은 햇빛 속에서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찌나 햇빛이 강렬하던지 담배에 불이 붙었는지 확인하기조차 어려웠다. 저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이 있을까.

마치 불량소녀처럼 담벼락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며 담배 한 대를 천천히 피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그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도 잊지 않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가그린을 하려고 가방을 여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순례자들은 냄새에 민감한데 이것을 어떻게 하지!

기쁨의 순간은 10분도 채 안되는데 지불해야 할 고민이 너무 컸다.

결국 머리를 써서 주스 가게로 들어갔다.

다른 순례자들은 하나 둘 버스에 오르는 시간이었다. 무지무지하게 큰 컵의 석류 엑기스 주스를 샀다. 3달러였다. 입가심용이었으므로 겨우 몇 모금 마셨을 뿐이었지만 가그린 효과는 충분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1달러도 하지 않을 주스를, 그것도 배가 불러 겨우 몇 모금 마실 주스를 오로지 담배 냄새를 없애기 위해 3달러를 주고 마셔야 했다는 것.

몰래 눈치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참 귀찮기도 하지만 그 귀찮은 것을 넘어서는 흡연의 간절함과 충족감은 표현할 길이 없다. 취미 생활은 참 나를 복잡하게도 하고 힘들게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불편함 때문에 금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가 온다면 저절로 끊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은 있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로 향하던 중 면 판매장에 들렀다. 이른바 <문화체험>이었다.

성지순례에는 다른 외국 여행처럼 쇼핑을 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심리적 압박도 없고 깨끗하다. 하지만 두 군데는 꼭 들러야 했다. 선교사 가이드 말에 따르면 관광의 수익을 위해서 터키 정부에서는 여행 일정에 쇼핑이 없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 믿어야겠지...

그 중 한 곳이 바로 면 판매장이었는데 거대한 규모였다. 면으로 만든 거의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작게는 면 지갑에서부터 옷가지 이불, 머플러까지. 나는 그냥 구경만 열심히 했다. 순례자들은 선물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다. 하긴 멋들어진 염색의 머플러는 가격도 과히 비싸지 않고 특산품이니까 선물용으로는 제격이었다.

나는 터키 여행 기념으로 작은 지갑을 몇 개 사고 싶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너무 조악했다. 값이 좀 비싸더라도 세공이 예쁜 것을 사고 싶었는데 그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

몇 년 전, 인도 여행을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아주 작은 가죽 동전지갑을 선물 받았는데 심플한 모양이 너무 마음에 들어 늘 가방에 지니고 다녔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작은 지갑을 선물해서 그 사람이 늘 가방 속에 넣고 다닐만한 작지만 귀중한 지갑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화려한 터키 민속의상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는 터키의 색이 마음에 들었다. 강렬하고 화려하다. 나의 마음속에도 강렬함과 화려함이 있는 것을 안다.

쇼핑에 관심이 없는 순례자들은 널찍한 로비 의자에 앉아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은 한국에서는 정월 대보름이라는 말이 오갔다.

한국에 있으면 나물이랑 땅콩 잣 호두 같은 부럼을 먹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어느 순례자가 터키 땅콩을 한 봉지 샀다. 정말 커다란 봉지에 들어있는데 가격은 단 돈 2달러.

2달러어치 땅콩을 풀어서 순례자 모두 맛을 보면서 정월 대보름 기분을 만끽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악한 플라스틱 충전기는 얼마나 비싼 것이었으며, 3달러짜리 석류 엑기스 주스는 또 얼마나 비쌌던 것인지 짐작이 되고 비교가 되었다. 관광객만 상대하는 곳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옛 골로새 교회터가 있다는 산골짜기를 지나고도 버스는 한참을 달렸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흥분을 준다. 성경은 상상속의 이야기도 아니고 만들어진 이야기도 아니고 옛날 누군가 살았던 이 땅에서 일어난 기록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에게 현실을 접목시키는 힘이 되기도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 터에 도착했다.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그야말로 교회 터.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흩어진 돌조각만 옛 이야기를 희미하게 들려주는 곳.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시록의 말씀은 너무도 냉철하다.

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미지근하다고 했는지 지형적인 이유가 있었다. 9킬로 떨어진 온천지대에서 뜨거운 물을 끌어들이고 눈 덮인 인근 산에서 찬물을 끌어 쓰던 당시의 상황에 맞는 비유 말씀이었던 것이다. 계시록의 이 성결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의 믿음이 혹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처럼 미지근한 것은 아닌가 하면서 반성하곤 했다.

바로 그 라오디게아 교회 터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멋진 사진 두 장을 찍었다.

하나는 라오디게아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바위, 돌 가운데 나지막하게 솟아 있는 언덕에 올라 석양의 하늘에서 구름사이로 빛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뒷 모습을 찍은 사진. 말썽 많은 나의 고물 디카를 건네주며 나를 찍어달라고 부탁하자 순례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뒷모습을 왜 찍어요?”

찍고 싶어요. 저렇게 하늘을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을요. 하나님만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요.”

그 사진은 성지순례에서 찍은 그 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이 되었다.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만 바라 볼 것이다.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만 바랄 것이다.

또 한 장의 사진은 라오디게아 교회터를 구경하고 버스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던 중간에 찍은 사진이다.

해가 저무는 광활한 들녘에 긴 전봇대가 서 있었다. 일자로 뻗은 들판에 혼자 오롯이 서 있는 목이 긴 전봇대가 마치 무슨 슬픈 짐승처럼 보였다.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라고 읊었던 노천명의 시구가 저절로 떠오를 만큼 그 전봇대는 나에게 많은 말을 걸어왔다. 그 쓸쓸한 모습에 내 가슴마저 먹먹해졌다.

나 역시 충분히 쓸쓸했다. 삶이 쓸쓸했고, 혼자 있는 많은 순간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했다. 사랑하는 마음도 쓸쓸할 때가 더 많았고 많은 사람들 틈에서 웃을 때에도 가슴 한켠이 휑해지면서 쓸쓸했고 길을 걸으면서도 쓸쓸했다.

저토록 순수하게 쓸쓸함을 보여주고 있는 전봇대를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너의 순수한 쓸쓸함을 뷰 파인더에 넣고 두고두고 너를 기억하겠다.

그렇게 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은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순례자들은 저만큼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나는 뒤를 돌아서서 무엇인가 보고 있다. 뒤돌아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