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밑줄 친 문장 몇 개만 더)
텍스트는 직물처럼 저마다 고유한 결(무늬)를 지니고 있다.
하늘의 무늬가 천문(天文)이라면 사람의 무늬는 인문(人文)이다.
경전은 천문에 속한다.
신앙공동체에게 있어서 경전은 하늘의 무늬, 하늘의 결, 하늘의 문향, 하늘의 소리를 전한다.
그런데 서구의 성서비평은 천문을 인문으로 읽고 말았다.
이제부터 성서해석은 천문에 귀를 기울이는 수행이 되어야 한다.
구약은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경전이다.
경전 언어는 과학적 정보를 담고 있는 말이 아니다. 경전 언어에는 상징성이 있다.
역사비평학이 등장하기 이전 교회는 오랫동안 성서의 뜻을 네 가지도 추적하였다.
성경말씀의 의미를 문자적, 역사적, 도덕적, 영적으로 추적하기도 하고
문자(letter), 알레고리(allegory), 도덕(morality), 신비(anagogy)로 보기도 했다.
이 가운데서도 중세 교회는 도덕에 중점에 두었다. 왜 그랬을까?
삶을 성경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춰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윤리에서는 범법이나 위반이 악이지만,
성경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인 체하는 의지가 악이 된다.
현대 서구 성서학은 로고스(logos) 중심의 해석학이다.
하지만, 서구의 성서해석이 벌이고 있는 논란은,
성경말씀의 무늬를 수렴할 때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시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경말씀에 새겨진 하늘의 무늬를 사람의 수(繡)로 읽고 만 것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 말씀에 새겨진 하늘의 무늬를 수(繡)놓아야 한다.
성서해석에서 단순히 역사적 지식이나 종교적 정보를 얻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거룩한 뜻을 세속 속으로, 삶 속으로, 문화 속으로, 역사 속으로 실천해가는 수행이 되어야 한다.
성서해석은 세 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저자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이며 나머지 하나는 독자이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신앙은 경전읽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한국 경전공부의 토양은 사경회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편지니...(초기 한국교회가 이해한 기독교 경전)
서구문화가 외향적 진보를 가치의 척도로 삼을 때, 동양은 나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기풍에 전력을 기울였다.
깨달음을 통한 독자의 인격적 변화를 경전해석의 궁극적 과제로 삼았다.
"내가 기독교를 믿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가장 터무니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키에르케고르)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지난 2000년 동안 시행하였던 렉티오 디비나(이 책을 먹으라는 의미로 영적 독서를 말한다)에는
렉티오, 메디타티오, 오라티오, 콘템플라티오, 의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신앙에 이르는 길은 경전을 "어떻게"읽느냐에 달려 있다. 잘못된 독서는 기독교 신앙의 삶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
경학에서 성서해석은 연주(performing)의 경지에 다다라야 한다.
기독교 경학에는 영적 감수성이 전제된다.
기독교 경학은 성서해석의 목적을 성경읽기의 기쁨에 둔다.
성서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기 이전에 해석하는 사람의 자세다.
사람의 성품이다.
성서의 세계는 우리에게 낯선 세계가 아닌, 우리르 ㄹ향한, 우리를 위한, 우리의 세계로 변환되는 기쁨이 일어나게 된다.
칼 바르트가 지적하였던 "성서 안에 있는 낯선 신세계"라는 말은 성서의 스토리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낯설음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제 구약해석은 기독론적 신학이 아니라
신학적 기독론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 이야기보다는 하나님 중심의 그리스도 이야기를 선포해야 한다.
"신학은 신에 관한 詩" (시인 페트라르카)
성서해석은 성서적 사실을 검증하거나 증명하려고 하기보다는 말씀의 진리를 시 처럼 독자의 가슴에 와 닿도록 해야 한다.
성서해석의 역사 비평적 독해의 결과 성서해석은 "성경으로부터 배우는 작업에서 성경에 대하여 배우는 작업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성서읽기와 성서해석을 하나님 사랑이라는 신앙의 지평에서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공부는 마음공부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공부다.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면서도 세속적인 욕망을 초월하는 가치를 터득하는 공부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다. 즐김의 공부요 즐거움의 공부다.
말씀공부는 삶을 아름답게 한다. 환경을 헤쳐가게 한다. 시련을 넘어서게 한다.
경전공부는 경전읽기로 시작한다.
성경 이야기는 통째로 읽어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경전읽기는 일종의 예술이다.
경전읽기는 하나의 연주다.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소리는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것이다.
성서해석은 하나님의 세계를 느끼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즐기는 학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경전읽기는 경전의 소리로 내 속을 채우는 여정이다.
성경에는 성경공부라는 말이 없다. 대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을 묵상하라고 가르친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라. 내 귀에 들리도록 소래 내어 읽어라.
성서해석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의 됨됨이다.
(이 책을 읽은 후부터 나는 성경을 읽을 때 소리내어 읽는다. 정말 좋다. 정말 좋다. 놀라울 정도로 좋다!)
'2016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가로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이 내게로 왔다 (0) | 2016.04.10 |
---|---|
감사의 카드 (0) | 2016.04.09 |
아이러니 (0) | 2016.04.07 |
객소리 조금 (0) | 2016.04.05 |
하나님께 생일 감사 인사 (0) | 2016.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