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노래를 들으며 슬픈 생각을 하니 시간까지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는 느낌.
갈테면 가라지, 하면서 그냥 앉아 종일 노래만 듣고 싶으나 곧 일어서야 하는 이 슬픔은 또 뭔가.
슬픔의 길이와 깊이와 폭을 재면서 이것이 더해, 저것이 더 슬퍼, 하지는 말기.
나도 살만큼은 살아서 이런 고통 저런 고통 많이 겪을만큼 겪었다고 전제한다면.
가족이 있어도 친구가 있어도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있어도 고통의 순간에는
그야말로 나홀로 오롯이 겪어야 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내가 매일 돌보는 90세 된 할머니는 모든 생각이 자신에게 쏠려있다.
복사뼈의 아주 작은 상처를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 쓰다듬는다.
아파.
무릎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
머리도 아파.
돌보아주어야 하는 나는 할머니 옆에서 붕대도 감아주고 약도 발라주고 마사지도 해준다.
어느 때는 가여워하며 어느 때는 귀찮아하며 어느 때는 아무 생각없이
그러면서 고통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몸의 고통, 그리고 영혼의 고통.
우리는 결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지 못한다.
민영진 박사님의 말.
'예수님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만 하라고 하신다'
지난 토요일 재난이나 사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때 박사님의 대답은
'모릅니다.'
나는 모릅니다, 하시는 그의 말씀을 평생 담고 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이렇게 저렇게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의 생각을, 나의 결론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밀어부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통 당하는 많은 분들을 떠올리며
나의 지난 고통을 되짚어보고 있다.
지나갔으니, 혹은 지나가고 있으니 그것은 이미 각색이 되어서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스럽다. 아무도 그 깊이를 모른다.
시인 김경주는 이런 시 한 구절을 남겼다.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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