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독서회 오프닝 메시지를 전하시는 민영진 박사님(목사님, 시인, 학자, 교수^^).
지난 토요일에도 어김없이 온화한 미소와 함께 십여분 간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위한 자료 프린트물이 장장 7장이었다. 옆에 계시던 우리 싸부님이 보시더니만 잽싸게 강탈(정말 강탈 수준이었다. 프린트물 내놓으라고 손을 턱 내밀었으니)하셔서 총무에게 빨리 복사하여 스물 다섯명의 회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그래서 받았네, 저 프린트물을.
메시지를 전하실 때에도 감동이었지만 노학자가 짧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밑줄치고 주석붙이고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신 저 프린트물을 다시 읽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옷깃이 여미어졌다.
서불진언 언불진의...
글도 안되고 말도 안되면 우리는 무엇으로 뜻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그 회의가 아마 박사님께도 있었는 모양이었다.
언어의 한계는 글을 쓰는 나로서는 더욱 매 순간마다 절감하는 부분이다.
글도 언어이다. 우리는 꿈도 언어로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머릿속에서는 이미 언어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이 났군, 물이 깊었어, 누군가를 만났지.
이미지도 영상도 모두 언어로 치환되어야 비로소 나의 머릿속에 입력이 된다. 흐릿한 어떤 이미지도 그 '흐릿함'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그 언어의 한계 속에서 더더욱 언어를 초월한 어떤 존재를 찾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언어는 나의 몸에 달라붙는다. 기도가 그러하고, 오늘 할 일을 되짚어보는 것도 언어가 필요하다.
할머니, 를 떠올리면 할머니의 모습을 이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할머니와 치과에 가야 하는군.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이런 문장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한계안에 갇힌 불쌍한 듕생(미안, 요즘 '불타 석가모니'라는 책을 읽다보니 언어가 불교쪽으로 가버렸넹)인 나를 비롯하여 글을 쓰는 것을 낙으로 삼거나 업으로 삼거나 하는 인간들은 어떻게 하면 그 한계를 조금이라도 더 넓힐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민영진 박사님의 저 프린트물에 의하면 우리말 어휘는 약 5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는데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몇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계를 기억하고 있다.
문학 쪽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많은 어휘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래서 많은 단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작가를 다른 작가들이 매우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것도 이른바 지적 재산이라는 것일까? 하하 이 말은 농담이고) 내 경우를 말한다면 매해 덧없이 차곡차곡 나이가 쌓이는 바람에 이렇게 나이를 겁나게 많이 먹었는데도 무엇인가 글을 쓰려고 하면 매일 그 단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느낀다. 그렇게 해서 절망 한 보따리를 또 끌어안고 슬퍼하는 것이다. 오늘이 그렇네.
물론 박사님처럼 언어의 한계를 가장 이성적으로, 자료수집적으로, 객관적으로 증명해보이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저 쓰잘데없는 잡문이나 소설이나 가벼운 책들을 들고 씨름하는 것이지만 날이 갈수록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다시 절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아직까지 사전 한 권 씹어먹은 적이 없으니(작가들은 사전 몇 권은 씹어먹어야 비로소 작가가 된다는 풍문이 있다) 중고판 사전이라도 하나 구비해서 매일 한 장씩 주욱주욱 찢어서 씹어먹어볼까....
이건...
그냥 집을 나서기 전, 쓸데없는 소리 한 바닥 쓴 것이다. 이젠 정말 일어서야겠군.
오늘도 언어의 한계속에서 또 어떻게 그나마 잘 표현하고 지낼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가로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새 토요일! (0) | 2015.05.02 |
---|---|
어느덧 일주일 (0) | 2015.04.24 |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0) | 2015.04.16 |
시나페홀로-루이스 강의 (0) | 2015.04.15 |
숨어계신 하나님과 즐거운 절망 (0) | 2015.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