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독서회에서 존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루면서 곁가지로 채택된 책 중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있었다.
그 책을 채택할 안목이 계신 싸부님을 존경해마지 않으며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조금 딱딱한 것 같지만 오직 십자가만이 신학의 규범이다라는 명제가 나의 눈을 끌었다.
1518년(와, 이렇게도 오래된 이야기라니) 4월 26일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어거스틴 교단의 수도사외의 개회 토론을 주최하였다. 그것에서 다루어진 십자가 신학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진술인 명제 19와 명제 20을 이 블로그에 담는 영광이...^^
19.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피조물 안에서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신학자로 불리어져서는 안된다.
(이런 명약관화한 선언이 일찍이 선포되었음에도 아직도 헤매는 한국 교회가 우리 하나의 입을 빌리자면 '아아 불땅해(어제밤 고스톱에서 완전 박살이 난 아들을 보고 하나가 약간 약올리는 뉘앙스를 담고 일부러 혀짧은 소리로 한 말^^)'이다...
20. 그러나 볼 수있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보여진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신학자로 불려질 만하다.
하나님의 뒷모습에 대한 루터의 언급은 모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직 뒤에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좋았다. 하나님이 보인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므로 보이지 않는다. )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뒷모습에 대한 계시는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계시로서 홀로 인식할 수 있는 믿음에 관련된 것이다.
예수는 빌립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예수 자신의 인격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설명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요한복음 14:9)
루터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신학자'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 나타난 그의 계시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진술인 '참으로 당신은 숨어계신 하나님이십니다'의 진리를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즉 숨어계신 하나님의 개념이 십자가 신학의 중점에 놓여있다.
(이하 내가 밑줄 친 부분 중에서 몇 문장)
하나님은 특별히 고난을 통하여 알려진다.
어떤 사람이 의롭다 여겨질 수 있기 위해서는, 그는 먼저 그가 죄인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
고난이나 악을 세상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넌센스의 침입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달리,
십자가의 신학자는 그와 같은 고난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배로서 간주한다. (허걱, 아무리 그래도 고난을 가장 소중한 보배라고 하시다닛.....)
여기에서 내가 별표, 그리고 빨간 줄 쳐놓은 포인트는....
시험의 즐거운 절망을 경험함으로써 죄인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배우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하여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시험은 그것이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남겨둔다........
내 조만간에 <즐거운 절망>의 제목으로 글을 써야지, 하고 결심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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