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단단한 서열
교인들끼리 식사를 할 때가 종종 있다.
주일, 교회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할 때도 있고, 장례식장에서 위로 예배 후 식사를 할 때도 있다. 그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단단한 서열이라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엊그제도 그랬다.
영안실에서의 일이다. 교인의 입관을 마치고 입관 예배를 드렸다.
유족들의 오열 속에 경건하게 예배를 드린 후 목회자들과 장로, 그리고 교인들이 삼십 여명 쯤 모여 장례식장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초지일관 변함없이 진행되는 서열의 모습을 보았다.
일테면 이런 것이다. 네 명 기준의 테이블을 몇 개씩 잇대어 놓은 식당의 제일 안쪽, 그러니까 상석에는 목회자와 장로들이 앉는다. 그 다음에는 전도사들이 절도 있게 자리를 잡고, 그 다음에는 권사 이하 순수 교인들이 자리를 잡는 식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서열대로 편을 가르는 풍경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또는 당연하게 연출되는지는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그런 모습이었으므로 참석자 모두 별 생각 없이 알아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교회에는 네 분의 목사와 네 분의 전도사, 몇 분의 수련 전도사 그리고 서른 몇 분의 장로가 있다.
제일 아래쪽, 권사 이하 평신도 쪽에 자리 잡은 나는 저만큼 떨어져 있는 목회자와 장로 테이블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슨 즐거운 이야기라도 오가는지 장례식장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가끔씩 터져 나올 만큼 참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들만 단단하게 뭉쳐있는 단단한 편가르기가 그 자리를 매우 편안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음식도 그 자리에는 유독 넘치고도 넘쳤다. 일을 돕는 도우미에 전도사까지 합세하여 접시를 포개어야 할 정도로 재빠른 배달이 이루어졌다.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목회자이거나 장로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접을 확실하게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자주 목격하는 평범한 교인들도 이력이 나서일까, 익숙해서일까, 그냥 당연히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들과 좀 달랐다.
어째서 그들은 그들대로 뭉쳐있는가?
이천 명이 넘는 교인들을 일일이 찾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소수의 교인들이 모인 자리야말로 목사와 장로들이 교인들과 가까워지는 절호의 찬스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목사는 교인들을 꼭 대 심방 때에만 만나 손을 잡고 안부를 물어야 하는가?
십분 단위로 쪼개진 시간에 쫓겨 몇 마디 말도 못 나누는 형식적인 심방으로 교인들과 허심탄회한,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는가?
요즘에는, 장로들은 목사가 교인들과 가까이 있지 못하도록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장로들은 기획위원회와 각종 맡은바 직책과 한 달이 멀다하고 치러야 하는 각종 교회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장로들은 교회에 오면 회의하느라 교인들과 사사로운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실제로 나 역시 서른 명이 넘는 장로중에서 말한마디 나누어보지 않는 장로가 꽤 있거니와 형식적인 인사만 겨우 나누는 장로가 태반이다. 형식적인 인사란 어서오십시오, 건강은 어떠십니까, 그 정도이다. 명색이 작가인데 글은 잘 쓰시냐는 말은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예배 직후에 이루어지는 각종 회의-주보를 살펴보니 한 달에 두세 번은 회의가 있다-에 참석하시느라 교회를 들고나는 교인들과는 유명연예인들이 팬들 앞을 스쳐가면서 가벼운 악수를 하듯 하는 십분 남짓한 시간밖에 없다. 게다가 연이은 각종 맡은 부서에서의 보고, 회의, 전달 등으로 뛰어다니고, 오후 예배 후에 거의 언제나 벌이는 각종 행사에 얼굴도장까지 찍어야 하므로 바쁘기도 할 것이다. 결국 장로는 교회와 목사와 행사를 섬기느라 정작 교인들과 대화할 짬이 도무지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 희생정신이야 물론 높이 사주고도 싶지만, 어느 땐 (개나 물어갈 까짓)행사때문에 천하보다 귀하다는 인간들이 홀대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몇 년 전, 담임목사가 새로 왔을 때,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담임목사는 교인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목회자 전용 식사 테이블을 마다하고 교인들이 앉아 식사하는 테이블로 식판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하지만 담임목사가 테이블에 앉자 앉아있던 평교인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담임목사라는 존재가 수저를 자유롭게 놀리지 못할만큼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면서 담임목사는 기도제목으로 써놓은 나의 형편을 기억하고 있었고, 요즈음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물었다. 단 한 번이었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소중했고 감사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교회에서 관리(?)하는 교인들 축에서는 비교적 하층민(교회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에 대한 낮은 평가, 각종 헌금 납부실적에서 한없이 뒤로 밀리는 초라한 순위, 목회자 앞에서 화를 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키지 않는 웃음은 지어보인 적 역시 없으므로 좀 떨떠름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뻘쭘한 관계 등등을 종합한 나의 성적표이다)임에도 기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서로 마음을 맞추는 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서로를 생각해주고, 기도해주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거리낌 없이 담임목사에게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선 담임목사에게 문제가 있다. 그들의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은 아닌가. 지엄하게 설교를 하고, 교육을 시키고, 질책을 하고, 하나님을 위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하여 교인들을 마치 일벌처럼 쓰기만 할 뿐, 도무지 돌보려 하지 않는 과오에 대하여 그들은 작은 뉘우침이라도 있을까?
이름도 없는 일벌들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각종 봉사와 전도에 힘쓴 나머지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져 있는 바람에 정작 가정에서의 목회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교회안의, 목회자들의 뇌리에는 없는, 낮고도 낮은, 이름 없는 자들의 뻥 뚫린 마음에 인간적인 위로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나님의 위로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더욱 큰소리를 칠까봐 나는 겁이 난다.
새로 오신 담임목사는 그 후로도 몇 번 자리에 합석하여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 같았는데, 하도 교인들이 경직되어 있으니까 어느 순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 목회자를 하늘처럼 섬기던 습관과, 목회자와 성경속의 예수님을 비유한 목자와 혼동시키는 각종 교육으로 인해 예수는 나의 친구요, 내 방패 되시니의 찬송가가 무색하도록 목회자는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너무도 먼 그대로 각인되어 버린 탓이다.
그 모든 것들은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았을 뿐이므로 담임목사는 적어도 일년 정도는 테이블 합석을 강행했어야 했다. 그렇게 초장에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마음을 먹었다면 빠른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묵묵히 계속 해야 하지 않는가? 교인들이 자연스레 인식할 시간은 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야 미미한 대인기피증이 있어서 누구든, 더구나 목회자가 열정적으로 다가오면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른 교인들은 담임목사나 부목사들과 대화하거나 신앙상담을 받고 싶어도 그 속내를 드러내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럴 것이다. 분명 한 교회 안에서 주일의 상당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맡은 바 업무(?)가 너무도 다른 바람에 따로따로 노는 형국이니까.
어쩌다가 평교인은 자연스럽게 같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담임목사가 어려운 존재가 되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담임목사와 개별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는 정말 힘들다.
내 경험을 말한다면 나는 삼십 년 가까이 같이 신앙 생활하던 이전 담임목사와 나의 깊은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고민이나 신앙의 문제점을 단 한 번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담임목사는 교회의 단단한 벽돌처럼 그냥 무생물로 여겨질 때도 있다. 아니면 일 잘하는 CEO 정도?
나는 목회자들을 성직자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들을 특별하게 대우한다거나 특별히 존경한다거나 하는 마인드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인격을 믿고, 그들의 직업윤리를 믿으려고 노력하며, 그들의 신앙지도를 잘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들은 신학이나, 신앙에 있어서 전문인이 아닌가. 내가 소설가인 것처럼 말이다.
영안실 식당에서 목사, 장로, 전도사와는 따로국밥으로 놀면서 나는 생각했다.
만약, 이 테이블마다 목사, 장로, 전도사가 적절하게 섞여 앉아서 일분씩이라도 돌아가면서 각자 처해있는 형편을 서로 묻고 늘상 산재해 있는 각 가정의 어려움과 집안, 직장, 교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들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곁들여진다면 어떨까?
이름만 겨우 알고 한 번도 말을 나누어보지 않은 장로가 옆 자리에 앉아 여러분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면서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어떨까? 목사 장로 테이블에서 (자기들끼리만)흥건하게 흘러나오던 웃음소리를 평교인들의 테이블에도 좀 나누어주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가스펠 중에서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라는 좋은 노래가 있다.
사자들과 어린양이 뛰놀고, 어린이가 손을 넣어도 독사가 물지 않는 그 날이 다시 오리라는, 이사야 말씀을 노래로 만든 곡이다.
나는 그 가스펠을 부를 때마다 생각한다.
사자들과 어린양이 같이 뛰놀게 하려면 사자들의 야성을 죽여야 하고, 힘이 센 사자들이 먼저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어린 양과 같이 뛰놀 수 있다. 즉, 있는 자, 가진 자, 명예와 권세가 있는 자들이 먼저 자신의 위치를 낮추어 어린 양의 수준까지 내려와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중심적인 파워를 가지고 있는 장로들도 교인들이 있는 곳까지 내려와야 하고, 교인들에게 영의 양식을 먹인다는 목사들은 스스로 양식이 되어 어린 양의 밥이 되어야 진정한 <교회 섬김이>가 될 것이 아닌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교인들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인들에게 가장 낮은 자로 다가가는 것은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교인들이 생각하는 목사 밑에 장로(혹은 장로 밑에 목사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들만의 꼭대기 자리다툼이므로), 장로 밑에 권사, 권사 밑에 집사, 집사 밑에 평교인, 이런 식의 철저한 서열 순위는 하루빨리 파괴되어야 한다. 너무도 오래 동안 군림해 온 그 단단한 윗자리를 부숴버려야 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성전을 보고 일갈하신 것처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그 단단한 서열의 벽을 깨부숴야 할 것이다.
당신들의 겸손하고 낮아진 그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러므로 보여주시라.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만큼 명확하게.
편 가르기, 서열이 없는, 가장 낮은 자세로서 교인들을 섬기는 모습을!
'교회에서 착한척 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똑같다!! (0) | 2012.02.27 |
---|---|
은혜로우신 글들 (0) | 2011.06.25 |
추수감사절에 교회에 가지 않고 성당에 간 이유 (0) | 2011.06.25 |
나를 전도하라! (0) | 2011.06.25 |
예배당 단상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0) | 2011.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