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 단상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요즈음 재미있는 제목의 소설책을 읽는 중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먹는 것과 기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모두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들이므로 당연히 손이 갈 수밖에.
아침부터 온종일 시간을 비워놓고 마음먹고 파고든다면 저녁나절에는 뒷장까지 더 넘기고 감탄(감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새로운 책을 펼칠 때마다 간절하게 ‘죽여주는데!’하는 감탄이 터져 나오기를 바라지만 ‘아니 이런 책이 세계 40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단 말이냐’하면서 슬픈 감탄이 터져 나올 때도 있고, ‘이처럼 데면데면한 글이 책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하면서 고통스러운 감탄이 터져 나올 때도 있으니까)섞인 감상문을 몇 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끗발이 괜찮으므로 매일 조금씩 아껴가며 씹어 먹기로 했다. 끝까지 끗발 좋게 갈지 나중에는 개끗발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아무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루의 양식이기도 하고, 일생의 양식일 수도 있겠다.
그 중 기도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하루를 시작하는 최초의 먹거리(?)다. 대개의 하루는 눈을 뜨자마자 감사의 기도로 시작하는 신실하고도 완전 범생인 크리스천이므로. 하하.
기도하는 시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지만 유독 내가 좋아하는 기도의 장소가 몇 군데 있다.
그 중 하나가 예배당이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예배당 안에만 갇혀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므로 꼭 하나님을 뵙고 싶어서 그곳에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좋은 것이다.
보통 예배당에서는 예배를 드리므로 혼자 기도하려면 일찍 자리를 잡거나, 뒤늦게까지 남아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거의 언제나 남들보다 이삼십 분은 일찍 예배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도하고, 끝난 후에도 남들보다 십 분은 늦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습관이 있다.
고백컨대 그 시간은 마치 애인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뛰는 시간이기도 하다.
세상의 진흙탕에서 뒹굴던 마음이 ‘흰 눈보다 더 희게, 양털보다 더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간동안 언제나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라는 것이 꼭 입술을 움직여 중얼거리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기도라는 것이 꼭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일일이 고한다거나 원하는 소원을 올려드리는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가만히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 모습이, 그 마음이, 기도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깨끗한, 혹은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예배당 단상을 보면 마음에 알지 못할 불순물이 살짝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상에는 몇 가지 무생물(?)이 자리하고 있다.
십자가, 설교단, 설교자나 예배 인도자 등이 앉을 의자가 좌우에 세 개씩, 그리고 태극기와 교회기.
단상을 볼 때마다 늘 끊임없이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 무생물들이 과연 단상에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 따지고 들자면 ‘단상’이라는 곳 자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것도 잘은 모르겠다.
단상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자가 있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예배드리는 교인들을 굽어보기 좋게 하기 위하여?
예배당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자이고,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언제인가 담임목사도 언급했지만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교인들은 무대의 배우이고, 그 연극을 보시는 분은 하나님 단 한 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일마다 단 하나의 관객인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무대공연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절대로 주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에둘러 말한 것이므로.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교인들은 예배를 포함하여 말씀을 듣는 것으로 예배드린다.
예배에는 설교자나 교인들과의 구분이 있을 수 없는데 단상이라는 존재는 눈에 보일 정도로 아래, 위의 구분을 지어 놓을 뿐만 아니라 생각 없이 생각하다보면 가끔은 설교자를 예수님이나 하나님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일조를 한다.
나만의 생각이라고 한정짓고 말씀드려야겠지만, 이토록 민감한 부분은.
아, 십자가.
매일 예수님만 매달고 나는 결코 매달려 있지 않으려는, 내 욕심만 가득한 형틀.
매일 예수님은 그곳에 매달아 죽이고 또 죽이면서도 나는 결코 죽지 않으려는, 죽고 싶지 않은 저주의 형틀.
예수님이 고난의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까지 가는 동안 무임승차하여 모든 것을 누리고만 있는 예수의 후예들이 가슴을 치며 바라보아야 하는 형틀.
십자가가 단상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을 뿐만 아니라 할 말도 그에 못지 않지만 다음에 아예 한 섹션을 할애하여 다루기로 하겠다.
그리고 의자들.
의자들의 존재는 의자에 누군가 앉게 하기 위하여 있을 것인즉 그 분들은 대개 높으신 분들이다.
설교자, 장로, 신학박사, 감독(감리교단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계신 분을 말한다) 등.
단상의 높은 위치를 감안할 때, 그 곳에 앉아 계신 분들은 어쩐지 상하관계나 주종관계에서 윗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것 같다는 기이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주로 권면, 훈계, 지시, 말씀 선포, 가끔가다 질책도 이어지므로(마이크 잡은 분들 자신의 잘못이나 회개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혹 있었는지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교인들은 초등학생처럼 어르신들의 교육을 받는 자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의자의 역할이다.
만약, 예배당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라면 단상 위의 의자는 불필요하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교인석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순서가 되면 차례로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든, 기도를 하든, 성경봉독을 하든, 광고를 하면 되지 않는가? 사실, 그렇게 단상에서 의자들을 치워놓은 많은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상 위의 의자에 앉아서 전 교인의 출석률을 확인하시느라 일분에 5도씩 고개를 돌려야 하는 목회자들의 수고를 덜어준다는 의미도 있다. 교인들 또한 단상 위의 목회자들의 미미한 움직임이나,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을 살피느라 설교를 허투루 들을 일이 없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만약 단상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만 살아계시게 다른 생물(?)들은 몸을 감추고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만 드러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존재, 두 개의 깃발.
태극기는, 50년대부터 우리 교회 담임을 맡았던 이북출신의, 반공의식이 철저했던 애국지사 수준의 목회자에 의하여 하필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70년 대 중반부터 단상으로 올려졌었는데, 밀레니엄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오늘 이 시각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일절 기념 예배에서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고, 비장한 목소리를 지니신 원로 장로님이 기미독립선언문 전문을 비장하게 낭독하던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속이 살짝 꼬인 나로서는 만약 이북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하고 상상하고는 하는데, 푸르딩딩한 인공기가 십자가 옆에서 펄럭이고 있는 모습을 그려볼 때마다 어쩐지 섬짓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단상 위에 태극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이북의 교회에서 예배드리게 된다면 펄럭이는 인공기에 기함을 하면서 예배 도중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갈 확률이 높다.
국가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거론하자면, 100분토론 버금가는 열띤 토론회가 삼박사일은 이어지게 될 것은 자명하므로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각각의 의견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단상 위에 이물질이 하나 올려져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바람 한 점 없는 예배당 단상위에서 항상 후즐근한 모습으로 축 늘어져 있는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아련해진다.
저런 태극기는 백두산이나 학교 운동장에 높이 세워놓은 깃대위에서 힘차게 펄럭거려야 비로소 제 멋이 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깃발, 교회 기.
흑자주색 벨벳 바탕천에 선명하게 교회마크가 새겨진 깃발은 나로서는 롯데 자이언트 깃발이나 베이징 올림픽 깃발처럼 신앙과는 교회와는 예수님과는 별 의미 없게 보인다.
세계의 교회는 가톨릭을 포함하여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에 일치하는데, 우리 집, 남의 집 구별 할 일이 있을까?
어차피 에큐매니칼(교회 하나 되기, 교회 일치)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 교회에 대한 자긍심으로 깃발 하나 만든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교회 사무실이나 담임 목사 사무실 구석에 얌전히 세워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학교 교장실에 학교깃발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엊그제 주일에도, 물끄러미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각종 행사나 광고를 위하여 구비된 커다란 프리젠테이션 기기에 가려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십자가, 여전히 축 늘어진 채 기운 빠진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개의 깃발, 그리고 의지에 앉아 계시면서 교인들을 굽어보시던 높으신 분들...
...그곳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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