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이 끝나 집에 오자마자 김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 어리광쟁이 우리 남편이 김밥이 먹고 싶다고 칭얼대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식성이 변하는 남편이다. 카레, 짜장, 치킨, 순대, 떡볶이, 햄, 김밥...이런 초딩 입맛은 바로 나이고 우리 남편은 그런 음식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아프고 난 후 내쪽으로 많이 넘어왔다. 다행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가끔 카레도 만들어주고 짜장밥도 만들어주면 꽤 맛있게 드신다.
김밥... 참으로 번거로운 료리이긴 하지만 한 달에 한 번도 외식하지 않는 남편을 위하여 어제 미리 장을 봐놓았다.
그리하여,
밥을 하고, 밥이 뜸이 들때까지 시금치 데치고 다시 무치고, 계란 지단 부치고, 홍당무 썰어 볶고, 맛살, 햄, 가지런히 잘라놓고, 노란무까지 대령시켜놓은 후, 윤기가 잘잘 흐르는 밥에 소금 후추 참기름으로 간을 해서 잘 비벼 놓은 후, 각종 재료들을 우리집에서 가장 넓은 장소에 모셔놓고 (그래도 쪼그리고 앉아야 하지만) 김밥말이를 도마 위에 얹어놓고 바싹 마른 김을 올려놓은 후 잘 비벼진 밥을 한 덩이 놓고 이쁘장하게 펴는데 (아, 3시가 되도록 끼니가 들어가지 않은 텅 빈 나의 위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입맛을 다시면서 김밥 고명을 잔뜩 올려놓는데) 밖에서 두런두런 할머니들의 수다가 들려온다.
우리집은 일층인데 아파트 입구 옆에는 낡은 의자가 두 개 놓여있다. 딱히 벤치 하나 변변하게 없는 낡고 허름한 아파트인지라 어르신들이 막상 만나 담소를 나누려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는 고로 현관문 앞에 해바라기하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 (혹 여러분이 모이면 그 중 연세가 덜 되신 분은 의자 옆에 쭈그려 앉는다) 도란도란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다. 그러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봉다리 속의 땅콩도 꺼내 드리고 떡이 있으면 몇 조각이라고 내 놓곤 하면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그 모습이 정말 너무 이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내가 매일 가는 어르신이 계시는 아파트는 좀 사는 중형 아파트여서인지 모르지만 곳곳에 정자며, 벤치며 쉴 곳이 잘 마련되어 있는데 쯧...
그리하여
제일 먼저 만든 김밥을 바쁘게 썰어서 얼른 가지고 나갔다. 과연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 두 분이 쌀랑한 날씨에도 햇볕바라기를 하고 계시다. 따뜻한 김밥을 드렸다. 깜짝 놀라시며 환히 웃으시며 반가워하시는 할머니들. 내가 더 감사했다.
딱 열줄만 만들 생각이었으므로 밥도 딱 그만큼이었다. 그리하여 9줄을 더 만들어 한 줄 남편님 드리고, 한 줄은 내가 먹으니 자그마치 7줄이나 남았다.
김밥 킬러인 아들에게 문자했다.
-엄마가 김밥 만들었다. 갖다 먹어라.
-지는 지금 태백이어유 ㅠ.ㅠ
-아이고 부럽!!! 그럼 이쁜 우리 하나라도 줘야징~~
아들은 출장중인가 보았다.
저녁에 이쁜 우리 하나(설명드리자면 우리 아들과 2년째 같이 살고 있는 사랑스런 여자아이다)에게 전화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고스톱을 치기 때문에 필수로 만나지만, 전화로 직접 통화하기는 일년에 한두 번 겨우 있는 일인데, 정말 모처럼이었다.
-
하나야. 집에 왔니?
-아니요.
-그래? 저녁은 먹었어? 엄마가 김밥 만들었는데.
-오늘은 못 먹어요. 내일 갖다 먹을께요.
-에잉. 내일 어떻게 먹어. 아까 만든건데 내일까지 못갈껄?
-아니에요. 냉장고에 넣어두시면 되요.
-아쉽다. 이따 늦게라도 와서 가져가지. 아들은 태백이라든데?
-그게요...저도 지금 태백 가고 있어요.
-뭐시라???
-오빠가 오래서 지금 버스타고 가고 있어요. 지금 원주 지났어요.
........
아이고야.......그러니까 아들은 오늘 태백으로 출장을 가서 아마 내일까지 머물 것인 것 같고
이쁜 우리 하나는 태백으로 출장간 아들을 만나러 혼자 너댓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아이고 혼자서, 그 먼길을!) 가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이번이 두번째다.
몇 달 전에는 김천인가 하는 곳에 출장을 간 아들을 만나러 (겨우 하룻밤을 같이 있으려고) 저녁 7시에 집을 나서서 혼자 전철타고 서울역까지 서울역에서 난생 처음 타본다는 KTX를 물어물어 겨우 타고 다시 다른 기차를 갈아탔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어쨌든 그 먼길을 혼자 찾아갔더란다. 인터넷으로 뒤지고 난리를 쳐서 말이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도착한 이쁜 하나를 픽업해서 배를 쫄쫄 곯고 있는 하나를 위하여 모텔에서 치킨 시켜먹었다나뭐라나... 그리고는 다음날 간단히 일을 보고 같이 차를 타고 올라온 전적이 있었다.
매일 같이 있는데! 매일 같이 사는데! 벌써 2년째 같이 살고 있는데!
결국
따스한 김밥은 쿠킹호일에 칭칭 감겨 냉장고로 들어갔다. 하나 두 줄, 아들은 석 줄.
냉장고에 들어갔으니 맛을 기대하긴 글렀다. 내일 와서 먹는다니 먹겠지만 오늘처럼 맛있겠는가. 에휴.
그러면서 생각한다. 그 큰 눈을 깜빡이며 어두운 버스를 타고 혼자 태백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이쁜 우리 하나의 마음을.
그리고 태백 구석에서 이쁜 하나 오기만을 기다릴 울 아들의 마음도.
그러니까니 하나님도 일찌기 말씀하셨잖나!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태백에 갈 일이 없는 나는 저녁으로 다시 김밥을 우적우적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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