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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간의 기원

'다시 듣기' 하면서 '다시 읽기'

by 이숙경(2011canna@hanmail.net) 2016. 2. 4.

201624일 목요일

 

                                                                    다시 듣기 하면서 다시 읽기

 

 

새해 들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세음. KBS Classic FM에서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매일 두 시간씩 들려주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십 몇 년 이상 된 장수프로그램인데 세음 때문에 저녁 시간을 행복하게 보낸다는 시청자들의 사연에 공감한다.

저녁만 즐거운 것이 아니다. 거창하게 말한다면 문명의 발달로 그 시간에 듣지 못했더라도 '다시 듣기'를 통해 들을 수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세음을 들을 수도 있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나의 작업은 세음과 함께 이루어져왔다

오늘의 날짜와 일어난 시간(난 왜 꼭 일어난 시간을 적는 것일까. 성실할 때는 체중계에 올라가서 한숨을 쉬던 기록과 혈압 측정까지 노트 위에 적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어떤 강박이 있는 게 틀림없다)을 적고 그 밑에는 거의 언제나 세음의 날짜를 깍두기 모양의 칸 속에 넣고 화살표를 죽 그었다.

그 화살표는 다음 세음의 날짜, 그리고 그 다음 화살표 끝으로는 다른 날의 세음 날짜를 적었다. 밤늦게 노트를 덮을 때 세음의 깍두기 칸이 여러 개이면 어쩐지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했다는 기분이 들어 스스로 위안을 삼곤 했다. 비록 글의 진도는 미미했지만 오늘은 그래도 책상 앞에 세타임을 들을 때까지 장장 여섯 시간은 앉아있었던 말이지, 하면서

하지만 어느 땐 똑같은 이유로 스스로 자학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책상 앞에 세타임을 들을 때까지 장장 여섯 시간을 앉아서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이지? 두 문장 쓰기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하지만 어떤 결론에 이르러도 마지막은 감사의 기도로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이, 그만큼 세음은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주었다. 또 안할 소리를 하고야 마는데, 세음은 분명 무생물이지만 예전의 내가 말보로 라이트를 친구 이상이라고 했던 것과 비슷한 강도의 애정으로 나에게는 다가온다.

세음을 나는 사랑했고, 세음과 함께 하는 시간을 기다렸고, 그 시간은 참 많이 행복했으니가끔 밥맛없는 친구보다 훨 낫지 않은가 말이다.

 

가장 좋은 시간은 세음이 순수하게 백 뮤직으로 존재했을 때이다. 이것은 좀 세음에게 미안한 말이기는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가끔 집중의 강도가 안광이 지배를 철할 정도가 되고 내가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쓰게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일 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세음이 끝나 있는 것이다.

어제 뉴스에서 본, 송유관으로 몰래 기름을 빼내기 위하여 길고긴 땅굴을 파고 작업했을 인부의 집중도와 비슷하다고 하면 좀 이상한 비유일까 모르겠다. 하여튼 어제 그 장면을 보고 나는 감동했다. 오로지 송유관을 향한 집념, 뭐 그런 거 말이다.

사실 이상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도 어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둡고 흙이 가득 찬 땅속을 뚫고 들어가서 공포와 두려움을 포함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날마다 조금씩 뚫고 들어가서 송유관 같은 영감의 줄기를 드디어 찾아내서 그곳에 빨대를 꽂아 나의 뇌 저장창고로 운반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어제 TV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세음을 듣고 있었으나 들을 수 없었던 시간이 길면 그만큼 내 글속에 함몰되었다는 의미이므로 그럴 때 정말 행복했다. 21일자 세음을 다시듣기로 듣고 있는 지금은 너무도 선명하게 음악이 들려오는 것을 볼 때 나의 집중도의 현재상태는 중하, 정도일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돌아오라, 소렌토로 같은 명곡은 나를 중학교 음악시간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서 즐거운 것이고, one more cup of coffee 같은 음악은 암울하고도 찬란했던 십대 후반으로 나를 몰고 가니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지 음악을 듣고 있는지 헷갈리기는 한다

 

오늘 오전의 몇 시간은 책을 읽었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아 마저 읽느라 다른 날보다 좀 더 독서의 시간이 길었다. 그 책은 두어 번 읽었는데, 한 번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읽었고,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웃음을 참으며 읽었다. 요 며칠 동안 세 번 째 인지 네 번 째 인지 하여튼 또다시 읽은 감상은 말할 수 없는 감격이다. 독서의 후폭풍이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강도가 센 감동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책에 밑줄 긋기가 취미인 나는 두어 번 독서의 후유증으로 물음표, 느낌표, 아멘, 물결무늬 밑줄, 형광펜 밑줄, 굵은 두 줄의 밑줄 등 다양한 표식이 문장에 그려져 있었는데 내가 왜 이전의 독서에서 이 문장에 밑줄을 쳤을까를 유추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한 나를 내가 판단해 보건데 나는 좀 얄팍하고 싸구려틱한 B급 정서의 소유자인 것이 확실하다. 나를 아는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는 웬만하면 감동하려고 준비운동을 늘 단단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맛있다고 하는 것은 코웃음치고(네가 맛없는 것이 뭐가 있겠니이런 물음을 친구들은 눈빛으로 잘 전달한다)내가 멋지다고 하는 여행지는 자신들의 여행목록에서 지워버리고 내가 좋다고 하는 책은 반쯤만 믿고 내가 좋다고 하는 영화는 아예 제쳐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전히 친구들을 만나면 bhc 치킨 중에서 맛초킹의 날개를 확보하고 남편 몰래 시킨 생맥주 500을 앞에 놓고 감격의 기도를 드릴 것이다. 사우나 매점을 하던 친구가 치킨 집 주방 보조로 들어가게 된 것은 오로지 나에게 맛있는 치맥의 시간을 즐기라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를 친구들은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친구는 오랜 친구가 최고라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독서의 시간은 행복했고, 책을 다 읽고 덮은 지금은 더 행복해져 버렸다.

내 인생에서 한 번의 독서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는 책이 몇 권 있다. 열권은 넘지 않을까 싶은데 더 나이 먹고 기운 빠지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몇 번은 더 읽고 싶다. 아무리 되풀이해서 읽어도 첫 감동으로 울던 장면이 나오면 여지없이 울게 되고, 그동안 모르고 지나쳤던 또 다른 감동의 장면, 문장을 발견하면 거의 죽음에 가까운 희열을 느낀다.

누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다. 여러 권 책을 읽는 거 보다 한권의 책을 깊게 읽는 것이 낫다. 이건 혹시 내가 한 말?

수십 번 이상 읽어도 여전히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성경책을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 처럼 누구나 쉽게 접할 수는 없는 분량이고 내용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뻥투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사기나 거짓말, 그냥 신화나 소설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성경을 넘길 때 성령님이 동행해주시지 않으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 부분이 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전인가, 나의 사랑하는 신앙의 동지님께서 나에게 어려운 성경을 쉽게 풀어서 소설처럼 써보라고 조언할 때 하마터면 그 말에 깜빡 넘어갈 뻔 했다.

 

세음에 빠져 있어서 지금 내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빨리 결론을 맺고 오늘은 그냥 세음에 빠져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모든 수다를 수습할 길은 없지만 재빨리 결론.

다시 듣기를 하면서 다시 읽기를 하는 시간은 행복할 것입니다.

먼지 쌓인 성경을 탁탁 털고 다시 읽기를 한 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귓전에 아슴아슴 세음 다시듣기가 들려온다면 더욱 행복한 시간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마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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